루스와 이모가 함께 하기 위해 집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집에 평생 매여 사는 우리네 모습이 떠올랐다. 예수님이 난민이셨다는 사실을 난민을 다룬 책 『보시는 하나님』(바람이불어오는곳 역간)을 읽고서야 새롭게 깨달았듯, 이 소설은 우리가 불안정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떠올려 준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루스와 루실 자매는 도시의 허름한 아파트에 살았다. 어느 날, 엄마가 이웃의 차를 빌려 그들을 태우고 어딘가로 간다. 엄마가 운전하는 모습에 아이들은 신기할 따름이다. 엄마가 아이들을 데려간 곳은 고향 핑거본이다. 할머니가 교회에 가서 없는 시간에 집에 도착한 엄마는 아이들에게 크래커를 쥐어 주고 베란다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그리고 차를 몰고 떠나간다.1)
엄마는 그 길로 절벽 아래로 차를 몰아 호수의 물속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아이들은 고아가 되고, 할머니는 둘째 딸을 잃고 두 손녀를 맡아 기른다. 아이들의 첫 번째 양육자 할머니 이야기부터 해보자.
할머니
외할머니는 젊은 날 남편을 기차 사고로 잃은 슬픔을 겪었다. 기차가 호수에 추락하면서 타고 있던 남편도 함께 빠진 것이다. 남편은 언덕에 직접 지은 집과 연금을 남기고 갔다.
남편을 잃은 그녀 곁을 사춘기의 세 딸이 지켰다. 마치 어린 시절이 돌아온 듯, 세 딸은 엄마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각자가 집안일을 나눠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그렇게 남편이 떠난 5년 동안 오히려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졌다.
물론 남편을 잃은 할머니의 슬픔은 컸다. 그러나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녀는 일상을 꾸려갔고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그녀는 검은 상복을 입고 지내던 날에도 “믿음의 행위로서 일상의 의식을 치르”듯 집안일을 감당했다. 그녀가 어떤 자세로 살아갔는지, 큰 슬픔의 시간 속에서 그녀를 붙들어준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할머니는 딸들을 속박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지극하지만 공평하게 사랑했고, 너그러우면서도 원칙에 충실하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흙과 하늘과 정원이 달라 보인다. 그날, 딸들의 얼굴도 늘 보던 것과 달라 마치 다른 사람 얼굴 같았다. 그때도 그녀는 조용하고 태연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렇게 달라진 딸들은 다 떠나갔다. 그중에도 둘째 딸 헬렌은 7년 후 돌아와 두 딸을 데려다 놓고 영영 떠났다. 꽤 여러 날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할머니는 결국 떨치고 일어나 손녀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딸들을 돌보았던 그 정성으로. 그러나 정성껏 돌보았던 딸들은 결국 다 떠나갔고 둘째 딸은 그렇게 되어버렸기에 이제 할머니는 자신이 없다. “비행기에서 아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앞치마로 받으려”는 꿈, “차 여과기를 가지고 우물 속에서 아기를 건지려는” 꿈처럼 자신이 가진 부족한 것으로 어떻게든 애쓸 따름이다.
5년 동안 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본 할머니는 마침내 두 가지를 마련해 놓고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양육자로 시누이 자매가 오게 주선했고, 집과 약간의 수입을 남겨준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떠났다고 할 수 있겠다.
실비 이모
할머니의 시누이 자매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훈육해야 하는지 몰랐고 새로운 집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할머니의 셋째 딸 실비와 연락이 닿자 그녀에게 양육의 책임을 넘기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처음 실비 이모가 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그녀가 금세 떠날까 봐 불안해하고 졸졸 따라다녔다. 이모는 외할머니와 많이 달랐다. 오랫동안 떠돌이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고, 그런 생활을 선택하게 만든 성향과 습관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잘 때도 신발을 잘 벗지 않고 웅크리고 잤다. 깡통을 모았고, 신문을 모으고 집의 상태에는 크게 개의치 않고 정돈하고 꾸미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햇볕을 받게 한다고 소파를 밖에 내놓았다가 잊어버려서 소파가 탈색되기도 했다. 먼 곳을 바라보거나 불쑥 나갔다가 호수에서 시간을 보내고, 철로에 위태롭게 서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카들 곁에 남아 그들을 돌보았다. 어두워진 후에 불을 꺼놓고 하는 저녁 식사처럼 좀 특이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녀가 떠돌이 생활의 자유를 상당 부분 포기하고 조카들을 돌보는 데 전념한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부족함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신발 같은 물품을 사줄 때도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는 싸구려들을 사댔다. 할머니가 남겨준 돈은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있는 안목이 없었던 것이다. 좀 더 잘할 수 없었는가라고 물을 수는 있겠으나 누구도 자기에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는 법. 결국 자기에게 있는 것을 어떻게 진실하게 내어주느냐가 본질이겠다. 그런 면에서 이모도 할머니 못지않게 진정성 있게 조카들을 돌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모의 그런 생활방식과 취향, 한계가 조카들이 어릴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특히 루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된다. 이제 루실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루실이 원한 것
루실과 루스는 한 살 터울의 자매다. 둘은 어린 나이부터 많은 일을 함께 겪었다. 둘은 오랫동안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키만 큰 어린이에 지나지 않던 언니와 달리, 루실은 빨리 여자가 되었던 탓이다.
이모가 사다 주는 물건, 이모의 살림살이, 이모가 꾸려가는 집구석, 이 모든 것이 루실의 마음에 안 드는 때가 온다. 루실은 이웃집의 어느 부인처럼 집을 근사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살림과 패션에 무능한 이모가 싫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고, 또래 여자애들처럼 되고 싶다.
루실이 원한 것은 대다수 사람이 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딱한 눈길, 이상한 시선은 지긋지긋했다. 어릴 때야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루실은 구제불능 이모는 제쳐두고 언니를 자기와 같은 길에 끌어들이려고 한다. 언니를 개선시키려고 시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루실은 가게로 가는 길에 언니를 데려간다. 하지만 마음이 없던 루스는 먼저 집에 돌아온다.
옷본과 옷감을 구해서 귀가한 루실은 옷본의 설명서를 읽기 위해 언니의 도움을 구한다. 두 사람은 사전을 꺼내온다. 그런데 루스가 설명서에 등장하는 단어를 하나씩 찾을 때마다 사전 사이에 끼워진 꽃잎이 눈에 들어온다. 쓸모없는 꽃잎에 정신이 팔린 언니의 모습에 화가 난 루실은 사전의 양쪽 모서리를 잡고 흔들어댄다.
루실이 떨어진 꽃잎을 난로에 넣어버리자고 했지만 루스가 다른 책에 넣겠다고 나서자 루실은 그것들을 손바닥 사이에 놓고 짓뭉개 버린다. 두 사람은 몸싸움에 돌입하고 결국 루스는 이렇게 선언한다. “좋아, 난 안 도와줄 거야.”
루실은 언니가 애초부터 도와줄 마음이 없었다고, 도와주지 않을 핑곗거리만 찾고 있었다고 비난한다. 여기서 두 사람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진다. 며칠 뒤 루실이 옷핀도 빼지 않은 옷감을 태우는 것을 보고 루스는 사과하지만 화해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루실은 그 사건을 계기로 언니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 같은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탓이다.
“언니가 어쩔 수 없다는 거, 나도 알아.”
“너 역시 어쩔 수 없다는 거, 나도 알고 있어.”
“나는 그래서는 안 돼, 나는 달라.”
“무엇과 다르다는 거야?”
“실비 이모하고 다르다고.”
하지만 남들처럼 입고, 남들만큼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루실 또래의 여자 청소년들은 대부분 엄마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그 일을 어렵사리 해낸다. 많은 이들에게 그건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할 수 있는 힘든 일이다. 루실은 언니가 그 부분에서 도울 마음도 능력도 없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모가 차지한 집에서 언니에 대한 기대마저 접게 된 루실은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가정 과목을 가르치는, 혼자 사는 로이스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몸을 의탁한다. 루실은 로이스 선생님을 엄마로 선택한 것이다. 그날 실비 이모는 조카를, 루스는 동생을 잃었다.
루스가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만한 것
루실과 달리 루스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니,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알아내는 동생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루스와 루실의 차이 배후에는 이렇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성향과 심미안보다 더 결정적인 원인이 따로 있었다.
동생에게 이끌려 가게로 간 그날, 그곳에서 동생이 또래 여자아이들이 보여주는 최신 헤어스타일, 옷본과 옷감에 홀딱 빠지는 것을 보고 루스는 집으로 가려고 한다. 루실은 언니를 말리고 “우리는 좀 더 세련돼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루스는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동생이 루스를 끌어들이려 하는 세상이 루스에게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 탓이다. 그곳은
나로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던 세상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내가 잃어버린 것, 또는 잃어버릴 만한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이모의 집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스가 잃어버린 것, 또는 잃어버릴 만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모의 집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루스가 잃어버린 것은 무언일까? 루스는 그것을 콕 집어서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장면 이후로 여러 사건을 겪고 그에 따른 여러 사색을 거친 끝에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시하게 되는 까닭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엄마다. 루스가 잃어버린 것은 엄마다. 잃어버릴 만한 것은 루스가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막연히 엄마처럼 생각하는 이모다. 엄마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자매의 진로를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두 자매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부터 달랐다.
자매가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두고 다투는 대목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루실이 기억하는 엄마는 “정리 정돈을 잘하고 활기차고 분별 있는 미망인”이었다. 그러나 루스의 기억은 달랐다. 엄마는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말 것도 없이 매우 단순하고 제한된 삶을 영위한 사람. 차라리 혼자인 것을 더 좋아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무관심으로 아이들을 키운” 사람이었다. 엄마의 사인에서도 둘은 갈라진다. 루실은 차가 움직이지 않아서 액셀을 세게 밟는 바람에 발생한 사고라고 말한다. 루스는 정황상 자살이 분명하다고 근거를 대어 반박하지만, 루실은 언니가 엄마를 깔아뭉개서 이모를 옹호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루실에게 엄마는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보호자다. 죽은 엄마는 루실의 기억 속에서 바로 그런 모습으로 재구성되어 있고, 그렇지 못한 이모는 루실에게 엄마의 자격이 없다. 그래서 루실은 자신의 엄마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가 엄마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그런 생각의 전개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자신을 버린 존재를 갈망하는 치욕감과 싸울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루스는 달랐다. 루스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자살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엄마에게 연연하는 마음은 아무래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엄마를 향한 그리움, 엄마 같은 존재에 대한 욕구는 사라질 줄 모른다. 엄마에게 받은 상처와 엄마에 대한 갈망, 이 둘의 충돌이 해소되어야 했다. 그전까지는 엄마를 향한 갈망은 제대로 직시되고 채워질 수 없었다. 그리고 상처와 갈망의 충돌 해소를 위해 소설 앞부분부터 등장하는 것이 바로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다. 한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가게에서 루실과 헤어져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루스에게 친숙한 것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봄에 찾아오는 만물의 소생을 부활이라고, 새롭게 움트는 나무들을 나사로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중에서 죽어버린 두 나무를 거론하면서 그 나무들에서 잎이 나온다고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 일상적 변화일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죽은 (소멸한) 것이라고 해서 잃어버린 것이 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이모는 소멸한 것의 생명을 느꼈다고 덧붙인다.
죽음과 부활이 기적이 아니라 일상적 변화라는 말. 죽은 나무가 잎을 맺어도 그건 늘 있는 일이라는 말. 이건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루스의 일방적 주장이다. “죽은 것이라고 해서 잃어버린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소멸한 것의 생명” 같은 알쏭달쏭한 구절들을 루스 엄마의 죽음과 새로운 엄마에 대한 기대로 읽어내면 그 의미가 명료해진다. 엄마는 죽었지만 그래도 내게 엄마가 생길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엄마를 엄마라 부르기까지
루실이 떠나간 그날, 루스는 이모가 전에 제안했던 호숫가의 보트와 집, 그곳의 아이들을 보러 가겠다고 한다. 학교 시험 때문에 루스가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소풍인데, 시험을 때려치우고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루실이 집을 떠난 반동으로 루스는 이모 쪽으로 쏠리게 된 셈이다.
그 여행에서 두 사람은 이모가 말한 호숫가의 허물어진 집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런데 이모는 루스를 거기 혼자 두고 밤이 늦도록 자리를 비운다. 루스는 혼자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엄마를 떠올린다. “만약 엄마만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꼭 엄마의 눈이고 엄마의 머리카락일 필요는 없으리라. 엄마의 옷소매를 만지지 않아도 되리라.” 엄마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루스도 알았다. 그러나 엄마는 여전히 루스에게 돌아오는 존재였다. “엄마는 내가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음악이었으나, 다른 것이 아닌 음악 자체로 내 마음속에서 울리고 있는바, 모든 감각을 다 잃어버렸으되 그래도 죽지는, 죽지는 않았다.” 엄마는 자신을 버리고 자살한 사람. 자신을 버린 사람. 그러나 엄마가 죽었으되, 엄마를 물리적으로 잃었으되 루스는 엄마를 놓지 않으려 한다.
루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이모가 돌아와 안아주고 코트를 덮어 준다. 루스는 자신을 오랜 시간 방치한 이모에게 화가 나면서도 이모에게 안긴 채 그렇게 자기를 안아 주던 할머니를 떠올린다. 이모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이모가 루스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것을 느낀다. 이모는 루스를 장님처럼, 넘어질 것처럼 팔을 두르고 데려간다. 이후 실비 이모가 루스를 딸처럼 대하는 것이 자세히 그려진다. 루스도 드디어 이모를 명시적으로 엄마처럼 생각한다. ‘만일 내 눈에 이모가 엄마로 보인다면 사실상 어떻게 이모가 엄마가 아닐 수 있을까?’ 그리고 한번은 아예 “엄마”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호수 여행을 통해 실비 이모와 루스는 친모녀 사이처럼 끈끈하게 이어진다.
이모의 선택
그러나 두 사람의 호수 여행은 또 다른 뜻밖의 결과를 낳는다. 그로부터 몇 주 사이에 보안관이 두 번이나 집으로 찾아온다. 두 사람이 철야 호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화물 열차에 올라탄 것이 문제였다.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이모가 떠돌이 증세가 가라앉지 않았을뿐더러 조카딸마저 떠돌이로 만들고 있다고 의심하게 된다. 이모가 화물 열차를 타게 된 정황을 설명하느라 호수에서 밤을 샌 이야기까지 하면서 떠돌이 생활에 대한 의심은 짙어진다.
핑거본은 기반이 취약한 동네였다. 해마다 홍수가 나고 화재도 한번 일어난 곳, 한마디로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런 동네에서 간신히 정착 생활을 이어가는 주민들에게 떠돌이는 언제라도 자신들의 신세가 될 수 있는 존재로 다가와 심각한 위기감을 안겨 주었다. 그들에게 집에서 살지만 떠돌이 비슷하게 지내는 루스를 그런 생활로부터 구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으로 자신들의 핑거본 생활이 안정된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자 했다고 할까. (물론 이것은 루스의 설명이다.)
이모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자신이 떠돌이가 아니라 멀쩡하게 하우스키핑(집안 관리, 살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주려 한다. 집안에 쌓인 깡통도 정리하고 종이들도 태운다. 청소도 하고 떨어진 커튼도 단다. 기존의 하우스키핑 방식을 변경하고 남들이 용인할 만한 방식을 시도한다. 어느 날은 잠도 포기하고서.
그러나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마침내 공청회를 앞둔 날, 이모는 이대로라면 루스를 빼앗길 거라는 판단을 내린다. 그간의 모든 노력이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다. 할머니가 남긴 모든 것을 과감히 버리기로. 이모는 루스에게 떠나자고 한다. 떠돌이 생활도 그리 나쁘지 않다면서.
남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을지 몰라도 이모는 조카들을 위해 떠돌이 생활을 접고 정착해서 여러 해 동안 조카들을 돌봤다. 그런데 둘째 조카는 그녀의 보살핌을 거부하고 집을 나갔다. 이제 하나 남은 조카와 함께하고자 이모는 다시 떠돌이 생활을 선택한다. 이모는 늘 조카들이 일 순위였고, 그 마음을 아는 루스는 이모에게 호응한다. 둘은 집을 버리고 서로를 선택한다.
집이란 무엇인가
루실의 선택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길만한 것이다. 살길을 찾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루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모와 언니와 집을 떠났다. 다른 사람들처럼 세련되게 살 가능성이 없는 집은 루실에게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이 소설은 루스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루스와 이모는 함께 하고자 떠돌이 생활을 선택한다. 둘은 서로가 함께할 수 없는 집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하우스키핑은 ‘집안 관리, 살림, 가사’라는 뜻이지만 문자적으로 읽으면 ‘집을 지킴’, ‘집을 보유함’이라는 뜻이 된다. 책 전반부에 첫 번째 의미의 하우스키핑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후반부에서는 루실도, 루스와 이모도 ‘하우스키핑’이라는 제목과 달리 원하는 것을 얻고자 집을 떠난다. 할머니가 외손녀들의 안정적인 삶에 최소한의 기반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집이 두 손녀 모두에게 떠나야 할 곳이 되다니, 지독한 아이러니다.
루스와 이모의 선택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게는 집이 근본적인 삶이 조건이기 때문이다. 집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생각하기 어려웠다. 나와 같은 ‘정착자’에게 떠돌이의 삶은 열등하고 불온해 보인다. 이런 주류의 고정 관념, 편견을 강화하는 소설이라면 텔레비전 아침 드라마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주류의 시각과 다른 것을 보게 만들고, 가려진 자들, 소수의 목소리들을 듣게 하는 것이 문학이다. 저자가 루실이 아니라 굳이 루스를 화자로 삼은 것도 그렇게 떠돌이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의도일 테다. 당신의 삶은 그렇게 안정적인가? 혹시 집을 붙들고자 다른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마치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떠돌이 그리스도인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핑거본 마을의 생활은 만만하지 않다. 홍수와 화재는 이미 거론했다. 마을의 가장 중요한 지형적 특성인 호수는 어떤가. 승객을 가득 태운 기차를 통째로 삼킨 채 품고 있다. 호수는 할아버지, 엄마가 죽은 곳이다. 마을의 놀이터이기도 하지만 봄이 되면 얼음이 갈라지고 주저앉는 소리가 세상을 흔드는 곳이다. 살인 사건, 가정 폭력, 온갖 사건 사고도 유난히 많다.
마을 사람들은 핑거본이 든든하고 안전한 곳인 양 떠돌이를 경계하지만, 소설을 처음부터 따라온 독자는 보안관이 루스 집을 찾아올 무렵이면 ‘뭐 그리 대단한 곳이라고 그러느냐?’ 하는 생각마저 슬며시 들 지경이다. 그곳의 삶이 불안정하고 일시적이고 덧없음을 다각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루스와 이모가 함께 하기 위해 집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집에 평생 매여 사는 우리네 모습이 떠올랐다. 예수님이 난민이셨다는 사실을 난민을 다룬 책 『보시는 하나님』(바람이불어오는곳 역간)을 읽고서야 새롭게 깨달았듯, 이 소설은 우리가 불안정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떠올려 준다. 떠돌이 루스가 펼쳐 놓는 단상과 추억, 상상은 기독교 신자가 대부분 그대로 받을 만한 내용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삶의 구체적인 선택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연 아무 의미도 없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자 집과 가족을 떠나 새 엄마를 찾아간 루실, 서로 함께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이모와 루스, 양측 모두 귀중한 것을 얻고 지키고자 커다란 것을 포기한다. 둘 다 그 만만치 않은 선택을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었다. 『하우스키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것을 얻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내게 그렇게 묻고 있다.
1) 메릴린 로빈슨, 『하우스키핑』(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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