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을 사로잡는 환상으로 가득 찬 이 책은, 문화사에서 결코 도외시될 수 없으며 특히 “서구인들의 경우 계시록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 혹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다. 티머시 빌의 『계시록과 만나다』는 이러한 관점, 즉 요한계시록이 해석되고 소비된 역사를 엿보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이 지나온 궤적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책의 부제와 같다. 요한계시록은 괴물이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책 소개] 티머시 빌 지음 | 『계시록과 만나다』

비아 | 2022년 2월 14일 | 300면 | 17,000원

 

루터가 그렇게도 정경에서 빼고 싶어 했던 책, 수많은 신흥 종교를 탄생시킨 책,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책,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굳이 요한계시록이 걸어 온 길을 살펴보지 않아도, 이 책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오감을 사로잡는 환상으로 가득 찬 이 책은, 문화사에서 결코 도외시될 수 없으며 특히 “서구인들의 경우 계시록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 혹은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다. 티머시 빌의 『계시록과 만나다』는 이러한 관점, 즉 요한계시록이 해석되고 소비된 역사를 엿보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이 지나온 궤적을 한마디로 줄이자면 책의 부제와 같다. 요한계시록은 괴물이다.

 

괴물이 된 텍스트

 

소설 『프랑켄슈타인』에는 시작하자마자 반전이 나오는데, 바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다. 흔히 알려진 그 괴물은 소설 내내 ‘피조물’로 불리는, 사실상 이름 없는 존재다. 티머시 빌은 프랑켄슈타인을 예로 들며 요한계시록에도 반전, 즉 통념과는 다른 점이 있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에는 ‘휴거’와 ‘적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는 요한계시록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게 박힌 선입견이다. 이를 비롯해 요한계시록을 읽은 이들은 기상천외한 해석과 예언을 쏟아 냈다.

 

이처럼 프랑켄슈타인과 요한계시록은 오해를 두르고 있는 문서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텍스트가 내뿜는 힘이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적 언어와 생생한 이미지는 문맥을 뚫고 나가며 독자의 범위를 넘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그렇게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도, 요한계시록도 괴물이 되었다. 티머시 빌은 이렇게 덧붙인다. “계시록은 이방인이며, 경계를 넘어선, 종말론적인 괴짜다…. 계시록은 망명자이자 불청객, 내부의 타자로 남았다.”

 

『계시록과 만나다』 표지, ⓒ비아VIA

 

괴물이 된 해석자들

 

티머시 빌은 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를 넓게 다루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루터와 그가 번역한 성서에 삽화를 그려 넣은 친구 크라나흐, <레프트 비하인드>를 비롯한 할리우드 영화와 소설 등의 매체까지 살펴본다. 그중 7장 “신들과 괴물들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존재하는 위험을 다룬다.

 

16세기부터 일부 기독교인은 동양 종교들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괴물을 숭배하는 종교로 묘사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타자와 다른 문화를 공공연하게 혐오했다. 오늘날도 여전하다. 몇몇 개신교인은 바빌론이 로마 가톨릭이며 적그리스도가 교황이라고 말하고, “남성들은 권력을 쥔 여성에 대한 혐오를 표현할 때 창녀 바빌론“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1)는 니체의 유명한 말이 무색하게, 많은 이가 요한계시록이라는 괴물과 씨름하다가 괴물이 되어 버렸다. 저자는 이러한 괴물 만들기, 타자화하는 위험과 폭력을 정확히 지적한다.

 

이 같은 종말론적 괴물 만들기 과정은 괴물이 되는 대상들, 즉 방문자, 이민자, 이방인, 사회 주변부에 있는 구성원들이 현실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만든다. ‘괴물’이 된 이들의 인간성은 부인되고 이들을 향한 폭력은 정당화된다. 더 나아가 이들을 향한 폭력은 선과 악, 하느님과 사탄의 우주적 대결의 일부로 추켜올려져 칭송받기까지 한다. 이 대결은 최후의 심판으로 끝이 날 것이고 우리는 이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말이다.

 

괴물을 괴물 되게

 

또 하나의 위험이 있다. 요한계시록을 길들이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미래를 점치는 문서가 아니고, 666이 바코드가 아니며, 휴거와 적그리스도가 요한계시록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 생기는 위험, 즉 요한계시록이 더 이상 두려운 텍스트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 텍스트는 파악되고 이해돼서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환상 속에는 분명 우리 앞에 놓인, 감당할 수 없는 현재가 보인다. 요한계시록에서 파괴되는 지구의 모습은 기후 묵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전쟁과 폭력 역시 오늘의 이야기다. 요한계시록은 이 시대의 고통을 보게 하고, 또 절망적인 현 상황은 다시 요한계시록을 보게 만든다.

 

“고전은…독자와 싸우는,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데이비드 덴비는 말했다.2) 성경을 빌려 말해 보자면, 고전은 ‘관절과 골수를 찌르고 으깨며’ ‘환도뼈를 걷어차는‘ 생명체다. 이는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역시 안일과 나태에 빠진 신앙인의 감각을 깨우고 긴장시킨다. 임박한 파국을 상상하게 하고,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뇌하게 한다.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지극한 현실 앞에서 읽을 때 비로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외침은 진정한 고백이 될 것이다.

 


1)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2) 데이비드 덴비,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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