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글, 곧 문자 기록에 의존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자 기록의 의미를 내가 지금 생생하게 표상해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체로 생생하게 들으려고만 하기보다는 기록된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상황에 대한 해석이 늘 삶에 동반되어야 할 것인데, 적지 않은 이들이 기록된 말에서 생생한 의미를 소유하려는 욕심을 보인다. (본문 중)

김동규1)

 

해체(Déconstruction).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벼리어 낸 개념이다. 이 개념은 본디 하이데거의 해체(Destruktion)에서 유래한다. 데리다 스스로도 하이데거의 Destruktion과 역시나 해체로 번역될 수 있는 Abbau 개념의 프랑스어 번역어로 삼기 위해 해당 개념을 도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Derrida 1987, 388). 그렇다면 규명해야 할 것은 우선 하이데거의 ‘해체’ 개념일 것이다. 이 독일 철학자는 서양 형이상학을,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 곧 존재론적 차이와 그 역운(Geschick)을 따라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체라고 말한다. 여기서 역운이란 존재론이 성취된 길, 존재가 운동하는 다소 필연적인 역사적 경로를 뜻한다. 즉, 해체는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이다.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자에 존재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존재의 고유한 의미를 망각한 시간의 (불)연속체였으며, 이러한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를 망각했다가 또 복원하는 게 형이상학의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음을 드러내는 게 해체라는 철학적 기예다.

 

반면,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번역하면서, 그의 사유를 오롯이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일종의 비틀기를 시도함으로써,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차이를 드러내는 게 아닌, 로고스 중심주의를 지적하는 데 몰두한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해체 작업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데리다에게 서구 형이상학은 로고스로 대표되는 일련의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작업이었다. 한 예로, 데리다는 서양에서 문자에 대한 홀대를 지적한다. 생생한 말, 음성으로 전달되는 의미가 글로 전해지는 의미보다 더 우월하며, 심지어 더 생생한 현실성을 갖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오래전 펼친 바 있는 플라톤 역시 음성의 우위성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글로 남겼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흔적처럼 철학의 역사 속에 새길 수 있었다. 즉, 글은 말의 대리보충, 또는 대체보충으로서 말의 역할을 한편으로 보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글이 말을 보존함과 동시에 말이 글이나 어떤 기록이 없으면 의미 있는 발화로 존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글은 말을 대체하는 효과마저 발휘한다. 이런 식으로 로고스, 곧 음성 또는 목소리로서의 말의 우위성은 해체되고, 말과 글, 또는 말과 기록의 위계적 경계는 흐릿해진다. 일상에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글과 글처럼 기능하는 기록을 포괄적으로 이용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흔하게 활용되는 통화 음성 저장이나 문자 메시지 기록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중요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음성으로 나의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지만, 나의 기억의 한계나 상황의 변화로 인해 기록된 음성이나 문자를 다시 보고, 그것들을 해석해야만 나의 원래 의도를 해명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 이 경우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을 이끌어가는 것은 원래의 말인가? 아니면 기록된 문자나 음성인가? 이처럼 우리의 복잡하고 유한한 한계 상황은 음성과 문자 또는 기록 사이의 경계나 우위성을 자연스레 흐릿하게 만든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과 글만이 주체/타자, 선/악, 남성/여성 등과 같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서양 형이상학의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더는 이전의 체계 속에서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 출현 사이의 간극”(Derrida 1972, 57[66])을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의존해 왔던 형이상학적 체계의 사유로는 도무지 사유할 수 없는 새로운 개념과 통찰이 이 형이상학 해체의 전략 속에서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말/글 사이에 당연시되었던 일종의 우위성을 전복하는 작업에서 나타난 그런 효과 말이다.

 

혹자는 해체의 이런 긍정적 성격에 주목하여, Déconstruction의 전형적인 번역어인 해체 대신에 ‘탈구축’이란 용어를 대체 번역어로 제안한 바 있다(진태원 2011). 이는 해체가 일반적으로 다소간 부정적인 함의를 담는 것처럼 생각되므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개념과 통찰을 자아내는 긍정적 효과를 더 잘 살리기 위해 제안된 번역이다. 해체가 일방적으로 부정적인 관념만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탈구축’ 또한 데리다의 전략을 잘 보여주는 번역어로 존중할 만하다.

 

 

이제 이 논점을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신앙에 전유해보자. 흔히 그리스도교를 책의 종교라고 한다. 이는 철저히 기록된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신앙의 삶 전체를 반성하고 기획하는 일이 개별 그리스도인과 공동체에 깊이 각인되어 있음을 시사한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글, 곧 문자 기록에 의존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 문자 기록의 의미를 내가 지금 생생하게 표상해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체로 생생하게 들으려고만 하기보다는 기록된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상황에 대한 해석이 늘 삶에 동반되어야 할 것인데, 적지 않은 이들이 기록된 말에서 생생한 의미를 소유하려는 욕심을 보인다. 이 경우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는 어디서 그 의미를 가져온 것일까? 만일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난 의미라면,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내면의 목소리일 것이고, 이것이 어떤 일반성이나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시 기록된 말씀에 의존해야 한다. 이 경우 내 안에 생성된 의미가 우선하는가, 기록된 말씀이 우선하는가? 여기에다 기록된 말씀에 대한 문자 기록을 염두에 두게 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를테면, 기록된 말씀에 대한 주해나 해석, 말을 들은 사람들의 이러저러한 서로 다른 이해 방식이 겹치게 될 때, 생생한 의미는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것은 생생한 말의 의미라기보다는 흔적들의 의미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근원적인 생생한 의미가 현전하기보다는 그 기원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기록과 흔적인 것이다. 내가, 또는 우리가, 이 흔적과 기록을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절대적인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신의 뜻을 따라 테러를 일삼는 극단적인 종교 근본주의자들을 보라. 그들 역시 문자 기록으로서의 경전에 의존한다고 하겠지만, 경전을 통해서나 자기 내면에서 생생한 신의 음성을 듣고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기 쉽다.

 

이 경우 글은 단지 말을 표상하고, 말의 의미를 재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데, 데리다가 해체의 전략을 세우면서 극복하려고 한 또 하나의 계기가 바로 글을 재현의 도구로 간주하는 일련의 사유였다. 문자 기록은 단지 말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의미를 새롭게 새기는 의미소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 의미소를 통해 의미에 접근할 경우, 우리는 생생한 의미를 재현하기보다는 텍스트에 연결된 채로 생성된 낯선 의미와 마주하게 된다. 빵을 떼어주고 그것을 자신의 살이라고 하고, 포도주를 내어주면서 그것을 자신의 피라고 하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은 이들은, 그 말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실제 그 음성을 듣지는 못했고, 기록된 말로 그 명령 또는 권고를 접한 공동체와 개인은 어떻게 그 말을 수행하고 있는가? 대체 어떻게 해야 잘 기념하는 것인가? 이렇게 문자 기록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생생한 어떤 음성을 듣기보다는 기록으로 침전되는 흔적을 쫓아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나서게 된다. 누군가는 그것을 말 그대로, 그 빵과 포도주를 통해 예수를 기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다른 이는 살과 피가 우리에게 다시 생생하게 현전하기를 기대한다. 그와 또 다르게 빵과 포도주와 신자를 매개하기 위해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이 모든 것과는 또 다르게 예수의 만찬은 그 자체로 만찬이므로, 성도들의 식사가 곧 예수를 기념하는 행위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문자 기록에 의존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유한한 한계를 인식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삶의 갱신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내가 든 성만찬 해석의 예 가운데 어떤 해석을 예수 그리스도의 ‘진심’으로 특권화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전해진 생생한 음성은 없다. 단지 기록들이 있고, 우리는 그 기록을 더듬는 가운데 흔적을 쫓아 생각할 뿐이다. 이처럼 해체는 우리에게 한계를 인식하게 해 주며, 우리가 마치 내가 하나님이 된 것 같이 사고하거나 행동할 수는 없고, 우리가 의존하고 긍정하는 삶의 의미들이 이러한 기록과 텍스트의 한계 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진술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Derrida 1967, 227).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 도서

Derrida, Jacques. 2005. Apprendre à vivre enfin. Paris: Galiée.

Derrida, Jacques. 1967. De la grammatologie. Paris: Éditions de Minuit.

Derrida, Jacques. 1972. Positions. Paris: Éditions de Minuit. [국역본: 1992. 󰡔입장들󰡕. 박성창 옮김. 서울: 솔출판사.]

Derrida, Jacques. 1987. Psyché Inventions de l’autre. Paris: Galiée.

Hägglundm Martin. 2008. Radical Atheism: Derrida and the Time of Life.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국역본: 2021. 󰡔급진적 무신론: 데리다와 생명의 시간󰡕. 오근창 옮김. 서울: 그린비.]

진태원. 2011. 「해체 또는 탈구축」. 󰡔사람과 글 人ㆍ文󰡕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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