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가 그저 위에서 부어지는 것이라면 쉽게 예언자를 교체하면 된다.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말씀을 내뱉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계시는 한 사람의 고유한 인생이었다. 예레미야라는 인생 자체가 고유한 계시이기에 그는 대체 불가하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우울했고, 아모스는 화가 많으며, 이사야는 잘났고, 호세아는 가정불화를 겪은 것이다. 그들 삶의 질곡 자체가 어느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계시이기 때문이다.(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렘 15:18; 새번역). 예레미야의 여러 고백 가운데 하나다. 그가 남긴 운문체의 ‘고백’은 예레미야서를 다른 예언서들과는 확연히 다른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1) 그의 입에서 나온 불평불만을 담은 고백이 예언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에는 내가 섬기는 침신대 신대원에서 ‘구약의 신정론(神正論)’이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교재는 크렌쇼가 편집한 『구약성서의 신정론』(Theodicy in the Old Testament)이다.2) ‘과연 하나님은 옳으신지’ 고민한 구약 논문들이 모여 있다. 그 가운데 깊이 있는 문학적 표현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에세이가 있는데, 저명한 독일의 구약학자인 폰 라트(Gerhard von Rad)가 저술한 “예레미야의 고백”(The Confessions of Jeremiah)이라는 글이다.

 

예레미야의 고백 가운데 두드러진 그의 내면 상태는 바로 배신감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배신이다.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보듯, 그는 부름을 받고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살 줄 알았나 보다. 태어나기 전부터 성별했고 늘 함께할 것이니 아무 걱정 말라는 하나님의 부름은 소심한 예레미야를 잘 달랬다(렘 1:5-8). 그러나 사역을 하면서 최악의 내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마치 여자를 희롱하는 나쁜 남자처럼 표현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압도하시고 저보다 우세하시니 제가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모든 이에게 조롱만 받습니다”(렘 20:7; 가톨릭 성경).3)

 

폰 라트의 이 글은 놀랄 정도로 흡입력이 빼어나다. 성서학에 큰 획은 그은 대가가 괜히 대가는 아닌가 보다. 폰 라트는 예레미야의 고백을 통해 흥미로운 두 가지를 지적한다. 그의 고백은 하늘의 예언이 아니라 인간의 토로라는 점, 그리고 그의 절망과 고통은 어느 완성을 향한 암시라는 점이다. 무슨 뜻일까?

 

“주님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렘 15:16).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몰입한다. 그랬더니 그는 인간으로부터 전적으로 소외당한다.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15:17). 예언자의 직무는 그를 주변으로부터 고립시킨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근본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원망을 털어놓는다. 문제의 근원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냐며 날 선 질문을 들이댔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퉁명스럽고 가혹하다(렘 12:1-4).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강의 창일한 물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12:5). 질문에 합당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질문으로 그를 윽박지른다. ‘이 연약한 예레미야야, 이제 시작일 뿐인데….’ 소명자가 지닌 고민을 추론의 영역 밖으로 밀어버리고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관심만 드러낸다. 예레미야의 순종뿐이다.

 

 

소명자가 부름을 받고 그 길을 가게 된 것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나 내적 결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예레미야처럼 힘으로 제압된 것이다. 이사야처럼 “나를 보내주소서”라며 외친 헌신에 기인한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제압당하고 꺾여서 그의 종이 된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달콤한 말로 속삭인다고 해도, 그분과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불균형한 힘의 역학 가운데 있다. 인간이 신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만 그 관계는 정립될 수 있다.

 

예레미야는 눈물로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렘 8:18-9:1). 격하게 토로하고 결국 소망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인지한다. “여름철이 다 지났는데도, 곡식을 거둘 때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구출되지 못하였습니다”(8:20). 이제 오는 것은 겨울이니 거둘 것이 정말 없다. 눈물을 한없이 쏟아 보았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표현이 이어진다.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9:1).

 

폰 라트는 예언과 고백을 구분한다. 전자는 하나님이 아래로 내리고 후자는 인간이 위로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고백은 예언자의 직임을 통한 신탁(oracle)이 아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매우 인간적인 고통의 넋두리가 성경 속의 계시가 되었다. 고통과 슬픔, 절망, 좌절, 고독, 소외, 외로움, 미움, 실패, 자기혐오의 삶 자체가 계시였던 것이다. 계시는 하늘에서 부어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소명자의 삶에서 마치 티백처럼 우러나오는 피눈물도 계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그토록 도망가려 했어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는 예언을 안 하기로 결심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 20:9).

 

계시가 그저 위에서 부어지는 것이라면 쉽게 예언자를 교체하면 된다. 누구인지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말씀을 내뱉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계시는 한 사람의 고유한 인생이었다. 예레미야라는 인생 자체가 고유한 계시이기에 그는 대체 불가하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우울했고, 아모스는 화가 많으며, 이사야는 잘났고, 호세아는 가정불화를 겪은 것이다. 그들 삶의 질곡 자체가 어느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폰 라트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압도하는 여러 경우 중 가장 막강한 것으로 위 구절을 뽑는다. 열 가지 재앙보다도 더 강제적인 것은 인간 스스로의 내면이 불타게 하는 것이다. 역시 소명은 자신의 선택이나 지적 동의, 설득의 영역이 전혀 아니다. 전적인 힘의 문제이며 소명자는 그저 하나님께 압도당하는 것이다.

 

구약의 핵심 사상을 ‘구원’으로 강조했던 매우 기독교적인 폰 라트의 신앙 색채가 끝에서 확연히 드러난다.4) 폰 라트는 예레미야를 절망을 지고 가는 중재자로 본다. 여기부터는 신비의 영역이다.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는 인간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는 자가 아니라, 예레미야는 자기를 향한 인간의 모든 절망을 지고 가는 중재자다. 예레미야 인생의 의미는 그의 예언서와 구약성서 안에서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인생은 ‘오실 분’(the Coming One)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중재자적 직임과 그 깊이를 감지하게 한다.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나와 여러분의 고통도 이웃의 아픔을 대신 중재하는 것일까? 차라리 그것이 고통의 의미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소명자들이기 때문이다.

 


1) 예레미야의 고백들 본문은 다음과 같다: 렘 11:18-12:6; 15:10-21; 17:14-18; 18:18-23; 20:7-13; 20:14-18. 이 글은 폰 라트의 에세이의 내용과 함께 나의 소감을 적은 것이다.

2) James L. Crenshaw, Theodicy in the Old Testament (SPCK, 1983).

3) “꾀시어”는 ‘권유하다/속이다/꼬시다/유혹하다’의 의미로 마치 여성을 유혹하는 것 같은 의미를 지닌 동사고, “우세하시고”는 ‘이기다’의 의미로 레슬링 경기에서 사용될 법한 동사다.

4) 구약 신학의 영원한 척추는 ‘언약’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출간된 폰 라트의 『구약 신학』은 ‘구원’을 대표 주제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환경 신학과 함께 ‘창조’가 중요 주제로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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