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가 내부패거리주의를 경계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결국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원하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일과 같기” 때문에 “성공한다 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루이스는 두 가지를 조언한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그 가공할 힘』은 C. S. 루이스의 SF 3부작(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랜섬 3부작’이라고도 한다) 중 세 번째 편이다. 전편(『침묵의 행성 밖으로』, 『페렐란드라』)에서 화성과 금성을 무대로 펼쳐졌던 선악의 대결이 이제 지구에서 펼쳐진다. 국가에서 막대한 권한을 부여받은 국가공동실험연구소(이하 국공연, 또는 벨버리)가 권력과 과학과 마법을 사용해 사회와 인간을 개조하려는 사악한 계획을 추진하고, 랜섬이 이끄는 소수의 무리가 그들의 음모에 맞선다.

 

핵심 주제로 보자면, 『그 가공할 힘』은 『인간 폐지』와 짝을 이룬다. 루이스는 『인간 폐지』에서 자연법(도덕률, 따라야 할 궁극적인 것, 객관적 진리, 객관적 삶의 질서)을 도(道)라고 부르고 그 정당성을 강력히 옹호한 바 있다. 『그 가공할 힘』에서는 그러한 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세상에 관철하려는 세력인 국공연을 반면교사로 등장시켜 동일한 주장을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랜섬이 3부작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인물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 책 『그 가공할 힘』에서는 신혼부부인 마크 스터독과 제인 스터독이 이야기의 전면에 나선다. 제인 스터독은 예지몽이라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작품 속 선악의 무리 모두가 관심을 갖는 중요한 인물이다. 마크 스터독은 대학교수였다가 국공연의 일원으로 영입된다. 이 글에서는 마크 스터독에 집중할 것이다.

 

마크는 루이스가 그의 에세이 “내부패거리”(The Inner Ring)에서 다룬 주제인 ‘내부패거리에 들고 싶은 욕망’의 화신이다. 일단 내부패거리가 무엇이며, 내부패거리에 들고 싶은 욕망이 왜 문제가 되는지, 마크 스터독은 그 욕망을 어떻게 구현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어떤 자리로 그를 내몰았는지, 그 과정에서 그가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따라가 보려 한다.

 

내부패거리

 

내부패거리는 모든 인간 집단에 다 있다. 공식적인 조직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 루이스는 “어떤 병원이나 학생기숙사, 교구, 학교, 기업체나 칼리지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분명 패거리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내부패거리를 아름다운 현상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피하고 딱히 뭐라고 나무랄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이다.

 

이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끌리는 내부패거리가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으나, 그런 욕구 자체가 없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루이스는 “사람의 삶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 중 하나가 주위의 패거리에 들고 싶은 욕구와 바깥에 남겨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적어도 특정한 시기에는 겪으며, 대부분 어릴 때부터 아주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욕구와 두려움”이다.

 

루이스가 이 욕구와 두려움을 문제 삼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내부 패거리에 들고 싶은 열정은 아직 그다지 나쁘지 않은 사람을 그 어떤 열정보다 능숙하게 조종해 아주 나쁜 일들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러분 가운데 십중팔구는 여러분이 악당이 되도록 이끄는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은…나쁜 사람처럼 보이는 이들이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위협하거나 뇌물을 주는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음료수나 커피 한 잔을 들면서, 두 농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서 아무것도 아닌 얘기처럼 찾아올 것입니다.…엄격하게 말해 페어플레이 규칙에 들어맞지 않는 일을 제안하는 암시일 것입니다…여러분의 새 친구는 그것이…“우리가 언제나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끌려 들어간다면, 그것은 이득이나 편안함을 원해서가 아니라…다시 차가운 바깥 세계로 튕겨 나가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만약 여러분이 끌려 들어간다면, 다음 주에는 규칙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일이, 다음 해에는 좀 더 멀리 떨어진 일이, 더없이 유쾌하고 다정한 분위기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마크는 정확히 이런 선택의 순간을 계속해서 맞이한다. 그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내부패거리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선택을 내린다. 그들의 주장이 이상하게 들려도, 심지어 사람이 죽어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국공연으로 아내를 데려오라는 미심쩍은 요구를 받고도 “국공연의 일원”이라는 것이 주는 특권과 만족감에 안주하여 그 말대로 하려 한다.

 

그가 국공연의 내부패거리에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많지만 하나만 꼽아보자. 그는 국공연의 핵심 인물 프로스트의 지시대로 아내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랜섬 측의 사람인 딤블 교수를 찾아간다. 그런데 딤블 교수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선 살인도 불사하는 사악한 국공연의 실체를 알고 있었고, 마크가 어떤 상태인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크에게 기회를 주고자 국공연을 빠져나갈 길을 제안하며 그러자면 즉시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크는 딤블 교수의 제안을 거부하고 시간을 갖겠다며 그와 헤어진다. 그러면서 “힘들게 벨버리(국공연) 핵심 그룹에 끼었는데 그 자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루이스가 내부패거리주의를 경계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결국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원하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일과 같기” 때문에 “성공한다 해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루이스는 두 가지를 조언한다. 하나는 직업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체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 안 가 “정말 중요하고 유일한 집단 내부에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집단은 그 직업의 존재 목적에 부합하는 일들을 할 것이기에 합당한 존경을 받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남는 시간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냥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진짜 내부”에 들어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무리의 중심에서 아늑함과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정이다.

 

『그 가공할 힘』표지, ⓒ홍성사

 

내부패거리의 유혹에 대한 환멸과 집착

 

그러나 마크가 이전까지 추구했던 내부패거리들이 여기서 말하는 대로 양파 껍질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면 국공연의 내부패거리는 달랐다. 그들은 명확하게 사악한 목표를 갖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마크를 깊숙이 끌어들여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스트는 딤블 교수를 만나고 나오는 마크를 국공연에서 조직적으로 진행했던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아서 체포한다. 그제야 마크는 그동안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 즉 국공연이 어떤 곳이고 그곳의 핵심 멤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그의 적이었고, 그의 희망과 두려움을 갖고 놀면서 그를 노예 상태로 만들었다”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리고 마크는 이런 선택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며, 그의 인생은 늘 모종의 내부패거리에 들기 위해 자신을 가장하고 좋은 사람들을 버리는 선택의 연속이었음을 깨닫고 이렇게 묻게 된다. ‘[내부패거리에 들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재미있어하는 일을 해본 게 언제였던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린 건 언제였나? 언제 좋아하는 것을 먹고 마셔 보기는 했나?’

 

하지만 마크는 국공연에서 자신이 내부 패거리에 들고 싶은 고질적인 욕망 이상의 막강한 세력과 상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명 ‘매크로브’와 그 추종자들이다. 매크로브는 국공연의 배후에 있는,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들이다. 동물의 하위 단계에 미생물(마이크로브)이 있는 것처럼, 그 상위 단계에 있는 존재들이 매크로브다. 매크로브는 인류의 일부를 선택하여 소통하고 자기들의 수하로 부리고 나머지는 제거하려 한다.

 

마크는 매크로브에 대한 프로스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선, “이들을 믿지 않겠다고, 다시는 미끼를 덥석 물어 협조하지 않겠다”고 각오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시무시하게 강한 감정, 널빤지를 삼키는 파도 같은 욕망”도 느낀다.

 

여기가, 마침내 여기가 (그의 욕망은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모든 것의 진짜 내부 ‘패거리’였기 때문이다. 인류를 중요시하지 않는 패거리…궁극적인 비밀, 최고의 능력, 마지막 입문. 완전히 공포스럽다는 사실이 조금도 매력을 감소시키지 않았다. 공포감이 부족한 것은 어떤 것도 지금 그의 관자놀이를 두드려 대는 짜릿한 흥분을 만족시킬 만큼 강렬하지 못할 것이다.

 

프로스트는 마크를 이런 상태로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비운다. 내부패거리에 들고 싶은 유혹은 아직도 마크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마크, 도움을 청하다

 

혼자 남겨진 마크는 앞으로 있을 일에 두려움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가뿐한 마음도 느낀다. 그것은 “묘한 해방감”이었다. “더 이상 이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과 비참한 희망을 내던지는 것”은 들뜬 기분을 안겨 줄 정도였다. 그리고 자신이 “저들과는 다른 편”이요, “제인과 그녀가 상징하는 모든 것과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스트의 초대를 거부한 자신의 용기에 스스로 감탄하며 자신이 무엇을 거부한 것인지 떠올린다. “인간 생명의 경계를 넘어…세상이 시작된 후로 사람들이 찾으려 애쓰던 것으로의 초대…역사상 가장 용기 있는 무한히 비밀스런 끈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얼마나 끌렸을까, 하고 생각하던 그에게 “빛의 속도로 어떤 갈망이 그의 목구멍을 휘감았다.”

 

개가 생쥐를 물고 흔들 듯 마크를 쥐고 흔든 이 갈망을 화자는 정욕(lust)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여기에 사로잡히면 우주 전체가 시시해진다(화자는 여기에다 ‘탈주술화’라는 표현을 쓴다. 마법에서 깨어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 정욕 앞에서는 사랑, 야망, 허기도 다 “애들 장난감처럼” 보인다. 둘째, 변태자에게 변태가 무서운 것이라고 말해 봐야 소용없다. 이 정욕에 따라오는 공포감은 양념 같은 것이다. 매크로브들은 인류와 모든 기쁨에 죽음의 기운을 불어넣었지만, 오히려 그런 사악함이 마크를 그들 쪽으로 끌어당기고 매혹시켰다. 순리를 거스르는 움직임의 마력 앞에서 “마크는 만족감에 몸을 떨었다.”

 

마크는 국공연의 손에 곧 죽게 될 것이 분명한 자기 처지를 자각하고서야 자신이 방금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깨닫는다. 국공연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겠다고 했던 단호한 결심이 이렇게 순식간에 무너진 것을 깨닫고 그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일종의 공격을 당했으며 아무 저항도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마크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경험을 한다. 이제 국공연의 실체를 파악하고 비로소 제인의 편, 올바른 편을 선택했건만, 그 선택을 유지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야 착해지려 하는데, 우주가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아서 절망한다. 그와 더불어 찾아오는 냉소적인 생각. 그는 자신이 간신히 벗어난 영향력에 다시 사로잡히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 그는 누구든, 무엇이든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말한다. “아, 그러지 말아요. 내가 그 상태로 돌아가게 내버려 두지 말아요!” 그리고 더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러지 마세요. 그러지 말아요!”

 

어떤 면으로든 그가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비명에 녹아들었다. 마지막 카드를 썼다는 섬뜩한 깨달음이 서서히 모종의 평화로 바뀌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단했다.…밤이 지나갔음이 분명하다는 희미한 생각이 엄습했다. 그는 잠에 빠졌다.

 

첫 번째 변화

 

이전까지 마크는 내부패거리에 연연하느라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 애정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옳고 그름이나 정당성을 선택의 척도로 삼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도움을 청한 후, 그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자신을 다시 찾아온 프로스트에게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은 것이다. 여기서 마크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 즉 아내를 데려오라는 임무의 정당성을 묻고 있다. 프로스트의 지론대로 애국심이나 인간에 대한 의무감 같은 도덕적 근거가 설 자리가 없다면 행동에는 어떤 근거가 있을까?

 

“존재는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마크는 되묻는다. 우주의 경향이 그 자체로 정당화된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그 경향이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프로스트는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긴다. 가치 판단은 감정의 표현에 불과하고, 감정은 금세 사라진다고 답한다. 감정과 더불어 가치 판단의 기준도 사라진다. 따라서 ‘나쁜/좋은’의 기준도 쓸 수 없다. 그러나 마크는 그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객관성 훈련

 

프로스트는 정당성의 질문을 제기하는 마크에게 객관성 훈련을 시키겠다고 나선다. “여태껏 행동의 근거라고 여긴 것들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것”이 훈련의 목적이다. 그는 프로스트를 따라서 ’객관의 방‘이라는 곳에 들어간다.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런데 방이 균형 잡히지 않았다. 아치가 전체적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방의 모양새도, 거기 걸려 있는 그림들도 이상했다. 그 목적은 인간 안에서 인간다운 반응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정상의 개념을 없애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크를 가둔 자들의 의도와 정반대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마크가 전에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막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물을 사랑하게 가르치듯, 그 사람이 곁에 없어야 사랑을 절감하듯, 시큼하고 굽은 느낌을 주는 이 배경은 달콤하고 똑바른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다른 것, 즉 그가 애매하게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게 있었다.…마크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같은 말이겠지만 그는 처음으로 깊은 윤리적인 경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쪽을 택하고 있었다. 정상을. 그가 ‘그따위’ 라고 하던 것을 선택했다.

 

십자고상을 밟고 모독하는 훈련

 

파국이 펼쳐지기 얼마 전, 마크는 또 다른 훈련을 받는다. 시험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객관의 방에는 예수의 수난상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프로스트는 마크에게 그것을 밟고 여러 방식으로 모욕하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뜻밖의 반응이 나온다. “기독교를 믿은 적이 없던 마크였지만, 프로스트의 요구를 받고는 거기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아무 의미가 없다면서 왜 이런 것을 요구할까? ‘정상적인 것’과 ‘병든 것’의 대조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이 거기 있었다. 왜 그리스도 수난상이 등장할까? 거기서 그는 두 집단이 충돌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어느 방향으로든 발을 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걸 거야.” 거부하면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압박을 느끼며, 그는 십자고상을 통해 자신이 악의 편에 서야 할지 선의 편에 서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크는 자신이 나무 예수처럼 무기력하다고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수난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무 조각도 아니고, 미신에 따른 기념비도 아닌 역사의 일부로 보았다. 기독교는 허튼소리였지만, 예수가 생존한 인물이며 그 시대의 ‘벨버리’에게 처형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십자가가 ‘곧음’이나 ‘정상’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왜 왜곡된 벨버리의 정반대인지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곧음’과 ‘왜곡’이 만날 때 일어나는 상황의 그림이었다. 왜곡된 것들이 곧은 것들에게 저지르는 일의 그림, 그가 곧게 남아 있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그것은 마크가 이제껏 알던 것보다 더 명확한 의미에서 ‘십자가'(또는, ‘교차’)였다.

 

프로스트의 시험 앞에서 마크는 그리스도의 싸움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옛날의 일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선악이 만날 때 펼쳐지는 일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요 보편적 그림이었다. 거기서 마크는 조금 더 나아간다.

 

그에게 기독교는 우화(fable)였다. 믿지도 않는 종교 때문에 죽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할 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종교가 우화임을 알았고, 믿던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불평하며 죽었다. 우주가 속임수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마크는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등을 돌려야 하나? 우주가 속임수라는 것이 그 옆쪽에 합류할 핑계가 될까? 곧은 것이 완전히 무기력하고, 늘 어디서나 조롱과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 왜곡된 것의 손에 죽는다면 그때는 어쩐다? 배와 함께 침몰하면 안 될까?

 

객관성 훈련을 통해 오히려 마크는 ‘똑바르거나 정상적이거나 건전한’ 것의 개념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십자고상의 ‘시험’을 통해 선악의 싸움, 옳음과 그름의 싸움이 벌어지는 현실을 경험한다. 이로써 그는 사물의 실재를 새롭게 경험한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그는 두려움을 벗고 옳은 편, 곧은 편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래서 그는 프로스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군요. 난 그따위 짓은 안 할 겁니다.” 십자고상을 밟고 모욕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옳은 편에 서겠다는 선택이자, 구체적 행동으로 말하자면 목숨을 잃더라도 아내 제인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

 

마크 스터독은 내부패거리에 들고 싶은 욕망의 문제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욕구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허비했고 많은 기쁨을 놓쳤으며 많은 소중한 관계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같았으면 일개인과 주위 사람 몇 명의 불행으로 끝났을 그의 약점은, 국공연이라는 사악한 집단을 만나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넘어갔다.

 

마크는 내부패거리로 끌리는 욕망 때문에 본인이 망할 뻔한 데서 더 나아가, 국공연이라는 막강한 악의 세력에 큰 발판을 제공할 뻔했다. 자신을 지키는 것, 자신의 죄와 욕망과 싸우는 것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마크의 사례는 잘 보여준다. 늘 하던 대로 자신이 욕망에 휘둘릴 때, 그것이 특정한 상황이나 집단과 어우러져서 어떤 일을 낳을 수 있는지 섬뜩하게 경고한다.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나 하나 똑바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떠올리게 해준다.

 

마크가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고 바른 선택을 내리기로 마음먹지만, 그 선택을 유지할 능력이 없는 것을 발견하는 대목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 자들이 아니던가. 루이스의 작품에는 이렇게 갖가지 막다른 길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여럿 등장한다.

 

도움을 청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미국의 철학자 제임스 스미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떠나는 여정』(비아토르)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명구 “은총의 도움을 욕망하는 것이 은총의 시작이다”를 가져와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만약 자신의 한계에 이르러 도움이 존재하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이따금 초월적인 무언가로부터의 은총을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놀란다면, 이는 이미 은총이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계속 요청하라. 믿지 않아도 요청할 수 있다. 이를 기억하라. 믿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도움을 원하는 것 자체가 믿음의 첫 단계다. 은총을 갈구하는 것이 첫 번째 은총이다. 자기 충족성의 한계에 이르는 것이 첫 번째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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