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우리가 환대에 어떤 조건을 부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조건적 환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무조건적 환대는 무조건 추종해야 할 이상은 아니더라도 어떤 가능성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이주민에 대해, 이방인에 대해, 이런 존재자들을 내 영역에 맞이하고자 한다면 최선의 환영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것이며, 우리는 비로소 그런 최선의 가능성에 비추어 조건을 부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무조건적 사랑이나 섬김의 환대는 불가능할지언정 무의미하지는 않다. (본문 중)

김동규1)

 

환대(hospitalité; hospitality)는 현대 유럽 대륙철학의 맥락에서 보자면, 레비나스와 데리다 이후 일반화된 윤리학적, 정치철학적 개념이다. 물론 이 개념을 사용하고 강조하는 풍경은 비단 20세기 이후 유럽철학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그 유래는 훨씬 더 오래되었다. 우리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 아브라함 종교 전통에서 이방인, 손님, 나그네를 특별한 조건 없이 맞이한다는 환대의 기본 이념을 묘사한 경전의 이야기를 여럿 알고 있다. 마므레 상수리나무 부근에서 손님 셋을 만나 “손님네들, 괜찮으시다면 소인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물을 길어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나무 밑에서 좀 쉬십시오”(창세기 18:3-4)라고 제안했던 아브라함의 손님맞이가 그 대표적인 예다.

 

이것은 환대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이자 이야기지만, 이를 둘러싼 쟁점들을 총체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해당 행위를 개념화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와 데리다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 우선, 레비나스는 자신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의 목표를 제시하며, “주체성을, 타인을 맞아들임으로, 환대로서 제시할 것”(Levinas 1961, xv[16])이라는 점을 명시한다. 특히 그는 주체를 자기 집에서 자기만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집에 거주하며 다른 것을 맞아들이는 자로 묘사하는데, 여기서 타인인 인간 타자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인간이 아닌 타자는 주체인 내가 나의 소유물로 삼아 저장하고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인 타자, 곧 타인은 그렇지 않다. 타인이 내 집에 들어왔을 때, 이 존재자는 나에게 마실 물과 먹을거리, 누울 자리를 요구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소위 불합리해 보이기까지 하는 요구를 하며 나의 안정과 평온을 깨트린다. 어떤 식으로건 이런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이고, 이 윤리적 책임을 감당함으로써 나는 타인의 요구에 응답하는 윤리적 주체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요구에 내가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주체는 윤리적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타인의 요구는 나의 수용 여부와 상관없이 윤리적 성격을 내포한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에게는 환대의 주체성이 곧 윤리적 주체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요컨대, 레비나스에게 환대는 “타인에게 열려 있는 집으로 [타인을] 거둬들임”(Levinas 1961, 147[256])이며, 이것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윤리적 관계의 기초이자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철학적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같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에밀 벤베니스트는 환대 개념이 라틴어 hostishospes에서 유래했음을 지적하며, 이 두 개념은 손님을 가리키면서, 또 적을 가리킨다고 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라틴어 hostis의 의미는 적(ennemie)이다. ‘손님(hôte)’과 ‘적(ennemie)’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두 의미가 또한 라틴어에서도 확인되는 ‘이방인(étranger)’이란 의미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호의적인 이방인→손님’, ‘악의적인 이방인→적’으로 설명된다”(Benveniste 1969, 92[111]).

 

이렇게 보면, 환대는 레비나스의 용어로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서 주인인 주체가 손님인 타자를 집 안으로 맞이하는 사태지만, 어원을 고려해서 보면, 그것은 주인 대 손님 또는 적의 관계 안에서의 맞아들임의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환대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있음을 알려 준다. 우리가 맞이하는 타인이 반드시 착한 손님일 수는 없고, 어떤 경우 손님은 나에게 적대적인 원수이거나 최소한 내가 너무 낯설어하는 이방인일 수 있다. 이 경우 주인인 나나 공동체는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수 없을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환영하겠다고 한다면) 조건적이고 제한적인 절차나 규준을 내세움으로써 일군의 타자를 맞이해야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환대가 앞서 언급한 성서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무조건적이거나 아름답기까지 한 윤리적 사건으로만 남지 않는다. 적과의 관계나 환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나의 여건 등, 환대의 상황을 둘러싼 많은 조건을 계산해야 하는 과제가 나 또는 공동체에 주어지게 되고, 이는 환대가 윤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문제이며, 법과 경제적 고려까지 수반해야 함을 가르쳐준다.

 

데리다는 이런 환대의 어려움을 잘 사유한 철학자다. 그는 레비나스를 통해 환대가 기본적으로 타인을 아무 조건 없이 맞이하는 윤리적인 사건이라는 규정 자체는 받아들이지만, 우리의 유한한 조건을 고려할 때 실제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환대는 매우 난해하고 역설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고 본다. 이를테면 성서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천사 둘을 자기 집으로 맞이하고, 음식을 주며, 편히 쉬게 하는데, 바깥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그 천사 둘과 즐겨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내놓으라고 한다. 이에 롯은 그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딸을 탐욕스러운 군중들에게 대신 내어주겠다는 황당하고 끔찍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환대를 통해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어떤 분란과 소요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모셔야 할 손님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 손님은 적이나 유희의 대상, 쾌락의 도구, 배제되어야 할 존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이주민이나 난민, 외국인과 더불어 살려고 할 때 일어나는 일련의 혐오나 소요, 범죄 사태와도 연관된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데리다는 환대가 반드시 무조건적일 수 없으며, 환대의 가능성은 또한 필연적으로 폭력의 가능성을 동반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즉, “환대와 배제는 짝을 이룬다”(Derrida 223[274]). 누군가를 환대하는 것은 누군가에 대한 배제나 또 다른 폭력을 일으킬 수 있다. A라는 이방인을 내 집이나 국가, 또는 공동체 안으로 맞이하는 일은 동일자로서의 집, 국가, 공동체가 지닌 한계 때문에, B라는 이방인을 위한 자리를 박탈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주민 정원이 한계치에 이르면, 어떤 이방인이 국내에 받아들여지는 그 순간, 다른 이방인은 배제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에게는 무조건적 환대가 마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윤리적 주체성의 온전한 모습처럼 여겨질 수는 있지만(물론 레비나스도 윤리적 환대의 한계로 인해 정치적 헤아림이나 정의의 계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데리다에게는 그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놓이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조건과 한계로 인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Hägglund 103-04[192-93]).

 

환대는 항상 위에서 언급한, 또 그 외의 어떤 조건적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는 점을 반드시 고려할 때, 오히려 우리는 환대와 관련한 오류나 오해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만일 환대의 낭만에 도취되어 무조건적 환대를 하나의 이상처럼 설정한다면, 그 경우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환대 더불어 또는 환대 이후 동반된 폭력을 도외시하거나 그 위험성을 축소할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환대는 조건적인 환대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는 점, 타자는 천사의 모습으로만이 아니라 적이나 악마의 모습으로도 도래할 수 있다는 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 최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는 언제나 최악의 가능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데리다가 사유한 환대의 아포리아에 대한 짧은 요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의 관점에서도 무조건적 환대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조건적 환대에서 조건적이라는 제약조차 무조건적인 것을 염두에 둘 때 가능하다. 좀 길지만 이와 관련한 데리다의 말을 되새겨보는 게 필요하다.

 

확실히 무조건적 환대로 삶을 영위한다는 건 실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떤 식이건 정의상, 우리가 무조건적 환대를 조직할 수는 없습니다. 일어나는 일은 일어나며(도착하는 자는 도착하며), 결국 이것만이 사건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유일한 사건입니다. 또한 이 순수 환대라는 개념이 어떤 법적 지위나 정치적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국가도 순수 환대를 제 법률에다 기입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순수하고 무조건적 환대를, 환대 그 자체를 최소한 사유해보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환대 일반의 개념을 갖지 못할 것이며…조건적 환대의 규준조차 정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순수 환대의 사유…없이는, 타자에 대한 관념, 타자의 타자성에 대한 관념, 다시 말해 초대받지 않고도 당신 삶으로 들어오는 그 또는 그녀에 대한 관념을 갖지도 못할 겁니다.…무조건적 환대는 법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것과 법적인 것의 조건입니다.…환대 없는 ‘윤리’가 있을 수 있을까요? 역설, 아포리아는 이 두 환대가 서로 이질적인 동시에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Derrida 2003, 129[234-35])

 

이처럼 우리가 환대에 어떤 조건을 부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조건적 환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무조건적 환대는 무조건 추종해야 할 이상은 아니더라도 어떤 가능성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이주민에 대해, 이방인에 대해, 이런 존재자들을 내 영역에 맞이하고자 한다면 최선의 환영이 무엇인지를 고민할 것이며, 우리는 비로소 그런 최선의 가능성에 비추어 조건을 부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무조건적 사랑이나 섬김의 환대는 불가능할지언정 무의미하지는 않다. 타자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질 수 없지만, 내가 시행할 수 있는 최선, 무한한 책임에 대해서는 고려할 수 있고, 또 상상할 수 있다. 한 예로, 범위를 좁혀 한 국가가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된다. 실상 국가가 질 수 있는 책임은 그것이 정치적이건, 법적이건, 도덕적이건 간에 한정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이념적 차원에서건, 프로파간다의 차원에서건 국가의 책임을 무한으로 놓을 때, 안전의 문제를 최대한 고려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비로소 현실을 헤아리는 가운데 유한한 책임을 국가에 물으면서, 책임적 위치에 있는 관료나 정치인에게 도덕적, 법적, 정치적 추궁을 할 수 있다. 사랑하는 한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혼인 서약이나 맹세를 통해 당신을 죽기까지 사랑하겠다거나 힘들거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라도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한다고 해보자. 이는 실제로는 지켜질 수 없는 맹세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연인은 자신의 조건적 제약으로 인해, 사랑을 둘러싼 여러 관계의 충돌로 인해 무한하기는커녕 상대방이 원하는 수준의 사랑의 말과 행동을 다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상대방을 전적으로 사랑하겠다는 약속에는 정서나 도덕성, 언행 전반과 관련한 무한한 요구가 담겨 있다. 바로 여기에 비추어서 이후의 조건적인 사랑의 수행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에 의하면, 환대는 조건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무조건적인 것과 조건적인 것의 연관 아래서 사유될 수 있고, 양자 사이에서 빚어지는 충돌과 역설, 아포리아를 거쳐야만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교와 관련해서 이 환대의 아포리아 문제를 생각해보자. 흔히 그리스도교는 무한한 사랑과 책임, 심지어 다른 사람의 짐이나 죄를 대신 짊어지는 대속의 문제까지 고려하는 종교로 표현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환대의 사랑이나 윤리를 수행하는 교회는 무조건적 환대를 수행할 수 있는가? 아니 애초부터 그런 것은 불가능한 게 아닌가? 교회는 모든 이를 위해 문이 열려 있다고 선전하지만, 실상 그 문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 않다. 교회에서 성찬례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의례를 떠올려보자. 이는 대체로 세례 교인이라거나 믿음을 확증하는 절차를 거친 제한된 이들에게만 조건적으로 실행된다. 그리스도교 예배나 전례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성찬례조차 모든 이들에게 무조건적으로 허락된 게 아니다. 물론 이런 조건적 성찬례 실천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교회의 질서 유지나 성찬례 남용 금지와 같은 교리적, 관례적 이유가 있다. 분명 그 조건들은 나름의 합리적인 내적 논리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무조건적 사랑과 섬김을 표방하는 특정 종교 공동체의 환대가 그 자체로 무조건적일 수는 없고, 조건적인 어떤 제약 아래서 그 행위가 실천될 수밖에 없음을 가르쳐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무조건적 사랑은 이 현실 안에서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특히 그리스도교의 (적어도 현실 속에서의) 사랑의 사역에 대해서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이들은 이 환대가 조건적 제약 아래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전승과 경전에 새겨진 환대의 정신이 최소한 서구의 윤리나 정치, 도덕적 실천에서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일견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이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전통을 더 소중히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삶 안에서의 그 환대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환대의 아포리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해야 할 것이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문헌

 

Benveniste, Émile (1969). Le vocabulaire des institutions indo-européennes 1: Economie, parenté, société. Tableau et index établis par Jean Lallot.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Derrida, Jacques (2003). “Autoimmunity: Real and Symbolic Suicides: A Dialogue with Jacques Derrida.” In Philosophy in a Time of Terror: Dialogues with Jürgen Habermas and Jacques Derrida. Edited by Giovanna Borradori.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국역본: 「데리다와의 대화: 자가-면역, 실재적이고 상징적인 자살」. 『테러 시대의 철학: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손철성·김은주·김준성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4.

 

Derrida, Jacques (1993). Spectres de Marx: l’état de la dette, le travail du deuil et la nouvelle Internationale. Paris: Galilée, 1993. 국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서울: 그린비, 2007; 2014.

 

Hägglund, Martin (2008). Radical Atheism: Derrida and the Time of Life. Stanford, CA: Stanford University Press. 국역본: 『급진적 무신론: 데리다와 생명의 시간』. 오근창 옮김. 서울: 그린비, 2021.

 

Levinas, Emmanuel (1961). Totalité et infini: essais sur l’extériorité. La haye: Martinus Nijhoff. 국역본: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문성원·손영창 옮김. 서울: 그린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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