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나라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끝까지 남았던 아버지라면 그의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과 굴곡이 있겠는가. 그런 빨치산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로 규정되어 사사건건 인생에서 발목이 잡혀 수십 년을 살아왔는데, 그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런 이야기를 참으로 경쾌하면서도 시니컬하게, 그리고 끝내 눈물 나게 풀어낸다.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추억하는 자식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대외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었다 해도 집안에서의 모습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본 자식의 눈을 어찌 피할 수 있으리. 게다가 어린 시절 자식은 자신의 욕구와 필요, 한계 내에서 부모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성장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부모에 대한 기대가 꺾이고 환멸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다 장성하여 부모가 되거나 나름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면서, 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모의 뒷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게 되면서 부모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인 양가감정으로 바뀌어 간다.

 

물론 이건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해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겠다. 하지만 아버지가 빨치산 출신이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여기가 어딘가. 극한의 이념 대립으로 나라가 갈리고 전쟁까지 겪고 이후 수십 년간 그 극심한 파장에 시달리고 지금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수십 년 동안 투철한 사회주의자로 끝까지 남았던 아버지라면 그의 인생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과 굴곡이 있겠는가. 그런 빨치산 아버지의 딸이라는 사실로 규정되어 사사건건 인생에서 발목이 잡혀 수십 년을 살아왔는데, 그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런 이야기를 참으로 경쾌하면서도 시니컬하게, 그리고 끝내 눈물 나게 풀어낸다.1)

 

아버지의 사회주의가 일관성을 잃고 비껴가는 모습

 

인간은 모순투성이의 존재다.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대개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우선시한다. “나도 살려고 그랬다”는 영화 대사처럼 말이다. 선을 행할 능력과 의지 모두에서 한계가 있는 인간이 사회주의라는 신념에 (아니, 어떤 일관된 신념 체계에라도) 충실하게 살아가려고 마음먹는다고 할 때, 필연적으로 사상과 실천의 일관성 면에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모순적인 존재, 위선자로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특히 소설의 앞부분에서 저자는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그런 한계를 여러 방식으로 드러낸다. 자본주의에 맞서야 할 사회주의자가 깡촌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는다. 가치 창출의 유일한 근원인 ‘노동’에 도무지 정을 붙이지 못하고 소주의 힘에 기대어 최소한의 농사일을 근근이 한다. 딸의 박사 학위 취득과 저서 출간에 기뻐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아버지는 어떤가. 딸의 말대로, 사회주의자라면 논문과 책 나부랭이보다 노동자 농민의 역할을 더 자랑스러워하고, 딸에게도 그 길을 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깡촌으로 들어가 농사짓는 것은 빨치산 출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의 길이었다. 소주의 힘에라도 기대어 노동에 충실하고자 했던 노력을 가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번듯한 학위를 따고 고상한 책을 낸 자식의 성과를 자랑스러워하는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굳이 그렇게 삐딱하게 쳐다볼 것이 무엇인가. 박사 학위와 저서 출간을 위해 아버지가 사회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딸이 열심히 노력하여 이루어낸 결과물을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무어 그리 흉이 된단 말인가.

 

뭔가 원칙을 가지고 거기에 충실하려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그를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는 이도 있지만, 그런 사람의 원칙이 온전히 지켜지지 못하고 어그러질 것을 기대하며 그런 일이 벌어질 때 ‘너도 별수 없잖아’ 하며 비웃는 이도 있다. 그렇게 신념을 가진 누군가의 부족함을 비웃는 것으로 마치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거나, 그런 것에 ‘매이지 않은’ 자신의 유연함, 자유로움에 안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가벼운 일이기도 하다. 처음에 딸이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반응이 그와 같다. 아무것도 안 하면 뭔가를 잘못했다는 말을 들을 일이 없겠고, 신념이 없으면 신념의 일관성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의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점점 드러난다.

 

아버지가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

 

화자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빨치산으로 목숨을 걸고 싸운 전사였다. 그리고 그들은 혁명을 위해 싸웠다. 모두가 사람 대접받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민중을 위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막연한 구호나 이념에 그치지 않았다.

 

초반에 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긴 했지만, 차편이 끊겨서 막막해진 생판 모르는 방물장수를 방 두 칸짜리 집에 불쑥 데려온 장면에서 그것이 잘 드러난다. 집에 자리가 없으니 밥이나 먹여서 보내자는 아내의 말에 아버지는 일갈한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그리고 놀랍게도, 어머니는 그 말에 곧장 꼬리를 내리고 없는 형편에 극진한 식사와 잠자리를 대접한다.

 

그런데 다음 날, 그 ‘민중’은 서까래에 매달아 놓은 마늘 반 접을 가지고 사라진다. 화자 부모의 선의에 대한 통렬한 배신이라 할 만한데, 여기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은 ‘오죽하먼’이었다. 오죽하먼 그랬을까. 그러니 더더욱 민중이 마늘 반 접을 훔쳐 갈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지 하고 다짐한다. 그런 일은 오히려 아버지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더 강화시킬 따름이었다. 그의 사회주의의 근저에 놓인 것이 바로 이 인간에 대한 사랑, 연민이지 싶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는다. 믿어주고, 자신의 것을 헐어서 사람들을 돕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표지, ⓒ창비

 

그가 꼭 성공을 확신해서 사회주의를 끝까지 붙든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누가 강한지를 파악할 정도의 현실 감각은 있었다. 어쨌든 한 명의 동지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그가 목숨을 구해준 누군가가 은혜를 갚겠다며 함께 싸우게 해달라고 찾아왔을 때는 그를 쫓아낸다. 왜 그랬을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질 싸움이라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자기는 이미 발을 들여놓았지만 신념도 없는 애먼 사람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은혜를 갚는 것도 신념 아니냐는 항변에 아버지는, 그건 ‘인간의 도리’라고 답한다. 여기서는 아버지가 신념(이념)과 인간의 도리를 구분하는 것이 흥미롭다. 아버지는 민중을 도구로 삼고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민중은 목숨 걸고 지키고 싶은 삶의 목적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오히려 사회주의가 민중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현실에서는 이념에 경도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여러 군데서 드러난다. 감옥에서 사식 혼자 먹겠다고 화장실에 숨겨놓는 사회주의자보다 자신의 사식을 모두와 함께 나눠 먹는 여호와의 증인이 훨씬 낫더라는 아버지의 회고는 현실을 인정하는 정직함을 보여준다. 아버지의 평생지기가 빨치산 토벌군으로 투입되었다가 결국 평생 교련 선생을 했고 조선일보 애독자라는 것도 범상치 않다. 사상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인정이랄까.

 

평생 투철한 사회주의자였으나, 그것은 자기를 희생해가며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모습으로 구현될 뿐, 다른 신앙인들의 아름다운 행태를 부인하거나 자신의 교우 관계를 이념적으로 제한하는 편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라는 점만 빼면’ 동네 사람들의 무한한 신뢰를 얻은 사람, 진실하고 말이 천금 같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 순수한 마음은 어디에 기반한 것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계속해서 떠오른 질문이다. 어떻게 그는 사람을 ‘오죽하먼’의 정신으로 한결같이 불쌍히 여기고 믿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런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나의 아버지

 

문상을 온 사람들의 증언이 점점 늘어가면서, 생전에 아버지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사연들도 하나둘씩 더해진다. 그 사연들을 구구절절 소개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결국 이 책은 ‘사회주의자의 해방일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딸에게 아버지가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하며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아버지에게 딸은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딸은 기어이 눈물을 쏟고 만다.

 

6살 때까지 누구보다 가까웠던 부녀지간. 수년간의 감옥살이로 소원해지고 끝내 회복되지 못한 두 사람의 관계. 소설 초반에서 딸은 이 소원해진 관계의 프리즘을 통해, 유년기에 자신을 방치한 존재로서 아버지를 냉랭하게 바라본다. 하지만 유년기에 자신이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이 감옥에 있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서러움에 눈물지었던 것 이상으로 아버지는 감옥에서 딸을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가 자주 찾던 하동댁 가게에서 하동댁 궁뎅이를 두들기다 딸아이가 ‘썽을 내자’ 화들짝 놀라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때의 심정을 담아낸 아버지의 대사를, 아버지의 담배 친구인 소녀가 딸에게 이렇게 전해준다. “아부지라는 거이 이런 건갑다, 산에 있을 적보담 더 무섭드래. 겡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드래.” 그리고 비로소 딸은 아버지를 따스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빨치산도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로.

 

다른 신앙의 길에서 배운다

 

민중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세는,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힘쓰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아버지가 이웃을 사랑하는 어느 여호와의 증인의 미덕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신자는 민중을 위해 한결같이 투신하는 화자 아버지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로서 화자의 아버지 고상욱 씨가 그 길에서 만나는 유혹, 시련도 신자가 신자답게 살고자 할 때 겪는 시련과 닮은꼴이었다. 차라리 사회주의를 접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생도 없었을 거라는 생각, 없었을까? 그는 젊은 날의 선택으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어떻게 자신을 지켜냈을까? 자신의 선의가 배신당할 때 겪는 배신감과 환멸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순교와 배교라는 용어로 설명해도 무방할 먼저 간 동지들의 죽음, 본인의 장기 투옥과 전향의 순간들은 또 어떤가.

 

여기엔 다른 언어와 논리로 펼쳐지기는 하지만 신앙인이 고민할 만한 문제들이 상당수 들어 있어서. 그것은 특정 신념의 문제라기보다는 믿는 존재, 신념의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 또는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이들과 관계하여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내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찰하게 해주는 면에서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독자인 나를 겸손하게 만든, 가슴 뭉클한 이 책을 나누고 싶었다.

 


1)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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