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앤의 안식월 후기]

자유로운 나를 봐 자유로워

시앤(김현아 기윤실 사무국장)

 

 

드디어 안식월!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안식월 제도를 통해 상근자들이 쉼과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미 3년 전에 근속연수를 충족해 주어졌던 한 달의 휴가는 그간 대학원 생활과 사무국장 임명, 단체의 상황 등으로 인해 마음 속 저편에 접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를 시작하면서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 구체적인 계획없이 일단 4월 한 달을 쉬겠노라고 ‘결단’하고 대표님과 동료들에게 ‘선포’했다. 그러자 이내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한 달의 휴가라니, 이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좋을까.

이번 안식월은 단체에서 일하면서 받는 두 번째 안식월이자 사무국장 1차 임기(2년)를 마치고 떠나게 된 안식월이었다. 그래서인지 더 고민이 많았다. 5년 전 첫 안식월 때처럼 한 달 꼬박 배낭여행을 떠날까,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볼까, 수도원 같은 곳에서 지내볼까… 그러다 문득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 하고 있는 일, 늘 같은 버스와 지하철, 편한 환경이나 습관같은 익숙하고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어쩌면 해방이 아닐까. 나의 예측과 통제 안에서 하루를 경영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고 그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의 나’도 ‘어제의 나’인 채로 멈춰 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의 나를 좋아하지만 나의 어떠함이 이대로 굳어져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일상과 마음이 단조롭다고 느낄 때, 안정감이 오히려 불안해질 때 도전과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일상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일과 단체에 과몰입해서 동일시와 일중독 직전인 것 같다는 지인들의 경고와 자각이었다. 일을 조금 놓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지만 놓지 못해 워라밸이 조금씩 치우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안식월 동안은 지금의 일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아주 다른 시간을 보내 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망설임없이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수 있었다. 계절도 운전대도 반대인 저 남쪽나라 ‘뉴질랜드’. 낯선 곳에 나를 내던지고, 그곳에서 새로움을 만나는 여행을 기대하며.

 

매일이 도전이고 선물이었던 시간

예산, 동선, 체력, 느낌적인 느낌을 고려해서 여행 기간은 보름으로 잡았다. 뉴질랜드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라는 도시에서 차를 렌트해서 보름 동안 남섬 이곳저곳을 다니다 퀸즈타운이라는 도시에서 마무리하는 여정이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았지만 여행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나만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이것부터가 도전이었다. 여행블로그와 각종 웹사이트, 어플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예약했다. 계획을 세우다 보니 MBTI 파워 대문자 J 성향이 발동되어 날짜별로 시간별로 타임테이블을 만들 지경이었다. ‘이런, 뭐 하는거야. 그만둬. 그건 이번 안식월 컨셉에 맞지 않는다고’ 나의 루틴을 과감히 내려놓고 렌트카와 거점 숙소, 금방 마감되는 유명 관광지만 예약해두고 나머지는 빈칸으로 두었다.

그리하여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계획과 무계획 사이에서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것도 나를 압박하지 않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걷고 싶을 때 걷고, 먹고 싶을 때 먹었다. 음악, 카메라, 노트와 펜으로 기억에 남는 순간을 짧게 기록했다. 매일 낯선 지명, 새로운 공간으로 향했고,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했다. 여행객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 짧은 영어로 대화를 해보기도 하고, 방탄소년단 때문에 더 유명해졌고 뉴질랜드 여행 필수 코스라지만 내가 할 것은 아니라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공포의 네비스스윙에 몸을 맡겨 보고,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한국 사람을 신기해 하던 동네 아이들과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헬리콥터와 경비행기를 타고 만년설과 빙하가 있는 산에 올라가보기도 하고, 양떼의 풀 뜯는 모습을 한참동안 귀여워하거나 호수가에서 물수제비를 하다가 멍하니 앉아 황홀한 노을을 감상하기도 했다. 이토록 한가하고 무용한 시간이라니. 아! 위험하다고 해서 밤 운전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노을을 보다가 시간이 딜레이 되어 새카만 밤에 가로등 하나 없는 국도를 야광 막대와 차의 불빛에 의지해 3시간 동안 긴장 속에 달리던 순간과, 마침내 나타난 목적지 마을에서 번져 나오는 조명을 보고 안도하며 기쁨의 노래를 불렀던 순간도 잊을 수 없다.

 

 

또 매일매일 생각지 못한 다른 풍경과 장면들을 선물로 받았다. 영화 반지의 제왕, 호빗, 나니아연대기의 배경이 된 뉴질랜드였으니. 어마어마한 크기로 깎아지르는 벼랑과 협곡, 때론 파랗게 때론 하얗게 빛나던 호수, 높고 깨끗한 하늘, 칠흑같은 하늘에 흩뿌려진 별들, 달리고 달려도 끝없던 초원이 매일 눈 앞에 펼쳐졌다. 자유롭고 느긋해 보이던 양, 소, 말, 염소, 알파카, 이름 알지 못했던 새들까지, 모든 눈 닿는 곳이 세상 무해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워서 다니는 내내 감탄을 터뜨렸다.

대학원과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학기 중에는 저녁시간과 주말을 어딘가에 반납한 채 2년 반을 보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야근과 초과근무가 기본값이 되어 귀가길이 캄캄한 건 알지만 별을 올려다보지는 못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렇게 지치는 줄 모르고 달려 온 나에게 주는 선물로 선택한 뉴질랜드 여행에서 신과 자연이 또 다른 더 큰 선물을 주는 것 같았다. 과장 좀 보태서 사진을 아무렇게나 찍어도 배경은 환상이고 내 표정은 밝았다. 여행 전 언제 일중독이었냐는 듯 한국에서의 생활이 전혀 생각나지 않고 나 없는 회사가 걱정 되지도 않았다. 매너리즘, 고단함, 두려움 없이 낯선 해외에서의 시간을 그저 만끽하고 있는 나였다. “자유로운 나를 봐 자유로워”

 

청춘을 응원하는 좋은 어른들과의 만남

여행 중 무척 인상적이었던 두 번의 만남이 있었다.첫 번째는 은퇴 후 매년 봄과 가을에 두 달씩 여행을 다니는 한국인 부부와의 만남이다. 호수와 석양이 아름다운 어느 마을의 숙소 공동주방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평소라면 못들은 척 하고 지나쳤을 텐데, 왜인지 정말 반가운 마음에 ‘한국에서 오셨어요?’ 하고 말을 걸었고 그 분들도 반갑게 인사 해주셨다. 그 부부는 대중교통이나 카풀로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다음 도시로 이동할 차편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고, 나에게 언제 어디로 이동할 계획인지 물어보며 태워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요청하셨다. 마침 방향이 같아 함께 움직이기로 했는데 정말 고맙다며 본인들의 저녁 메뉴로 조리하던 파스타를 접시 가득 나누어 주셨다. 다음날 아침 로비에서 만났을 때도 큰 비닐팩에 사과, 바나나, 견과류, 초콜릿을 담아 건네 주셨다. 어제 밤 간단히 먹으려고 작은 컵라면 하나만 꺼내 놓았던 나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 같다. 아무튼 다음 마을까지 이동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지를 추천해주고, 소매치기 당하지 않는 법을 공유하고, 다음 여행지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나누면서 두 시간 동안 끊이지 않고 대화했다. 여기에서 나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대부분의 한국인 중년 이상 어른들은 내 또래들에게 ‘결혼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 ‘왜 혼자인지’, ‘결혼 생각을 안하는지’ ‘부모님이 걱정 안하시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그 분들은 놀랍게도 나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추측도 하지 않으셨다. 이동하는 내내 카풀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반복해서 표현하셨고, 여행은 혼자 하는 것이 최고라며 나의 여정을 북돋워 주셨다. 목적지에 도착해 헤어지면서 두 분은 나와 눈을 맞추고 ‘멋진 분인 것 같아요. 남은 여행도 안전하고 행복하게 보내요’ 라고 말씀해주셨다. 이토록 나를 존중해주는 품격 있는 어른들이라니… 매우 온화했고 감동적이어서 기쁘고 흐뭇했던 만남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두 번째는 귀국을 하루 앞둔 날 카페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누었던 사쿠라(닉네임)와의 만남이다. 미국에서 남편, 아이들과 휴가를 온 사쿠라는 옆자리에 있던 나에게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는지 물으며 말을 건넸다. 회사에서 휴가를 받아 혼자 왔고 지난 2주간 렌트카로 남섬을 여행했는데 정말 아름답고 환상적인 시간이었다고 했더니 사쿠라는 깜짝 놀라며 의자를 가까이하고 다시 물었다. 대화를 요약하자면,

“혼자서 운전하면서 2주 동안 여행을 했다고? 무섭지 않았어? 사고는 없었어? 괜찮아?”
“한국이랑 방향이 달라서 걱정했는데 금방 적응했고 사고는 없었어. 혼자 다니는 것, 운전하는 것 모두 재미있고 자유로웠어.”
“용감한 여성이구나. 내가 동경했던 청춘의 모습이야. 난 그렇게 못했어. 지금도 못 할거야. 정말 대단하다”
“고마워, 그 말을 들으니 더 많은걸 해보고 싶네.”
“다음엔 LA로 와. 내가 가이드 해줄게. 꼭 연락해.”

그리고 우리는 SNS 친구가 되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도전하는 청춘에 대한 사쿠라의 동경과 응원의 진심이 전달되서 여행 말미에 새로운 설렘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안전하고 행복한 여행을 마치고, 모두의 안전하고 행복한 일상 만들기 

직장에 안식월 제도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친구와 지인들은 물론 타단체 활동가들도 놀라고 부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기윤실에서 상근자에게 안식월을 제공하는 것은 일반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금전적 보상을 대체하는 방편이기도 하고, 정신 노동과 격무로 근속기간이 짧은 청년 활동가들이 건강하게 지속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투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다녀와보니 정말 그렇다. 멈추는 시간을 통해 자신과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성찰해볼 수 있고, 기존의 일상과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으며, 내일 그리고 더 먼 어느 날을 그려보는 여유와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다. 차로 2,000km를 이동하는 동안 길에서 만난 풍경, 사람, 생각은 더 자유롭고 풍성한 새 길을 내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 노동 구조와 직장 문화 속에서 일반 직장에서 한 청년이 한달의 휴가를 사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실제로 안식월을 운용하는 기업들에서도 청년 사원들은 인사고과와 상사의 눈치로 인해 휴가를 온전히 쓰지 못하고 쪼개서 쓰거나 미루다가 퇴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어느 경우에 안식/휴가는 휴식권을 넘어서 생존권의 문제일 수 있다. 노동 시간과 노동 환경으로 인한 갈등과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청년들이 노동과 노동 사이의 쉼표를 권리로 확보하고 그것을 계기로 일과 삶에 있어 회복, 도전, 성찰, 도움닫기의 시간을 보내고, 안식을 통해 일상과 노동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멈출 곳도 무를 곳도 없어 보이는 매정한 사회이지만, 내가 여행 중 만났던 어른들과 같이 청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며 이들의 방랑과 도전을 지지하고 북돋워주는 목소리와 문화가 더 널리 그리고 깊이 깔리기를 바란다. ‘안전하고 행복한 여행’이 되기를 빌어주었던 어른의 따뜻한 바람이 청년과 약자들의 ‘안전하고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확장되기를, 겁없이 도전하는 청춘에게 다음에는 이것도 해보라고 권하는 그 어른의 놀라움과 기대감이 더 많은 청년의 걸음에 날개를 달아주는 응원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히브리서 4장 9-10절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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