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문서 예언자가 남긴 예언은 선명하게 다르다. 나라는 흥왕하지만,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로 백성이 고통받고 기득권자의 횡포로 사회 정의가 무너진 시기에, 문서 예언자들은 왕궁을 위한 예언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백성을 향해 사회적, 영적 조언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구약의 문서 예언자의 이러한 예언은 마리 문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의 결과로 고대 이스라엘과 서아시아 간에는 충분한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이 드러났고, 구약성서는 주변 문물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달한 것임이 확실해졌다. 양 지역의 문헌들은 자주 비교되었는데, 이런 비교 연구의 결과는 구약성서의 고유성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특히 구약성서의 예언을 주변의 것과 비교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아시리아 문헌이나 이집트의 ‘이푸웨르의 경고’, ‘네페르티티의 예언’, 그리고 가나안 지역의 자쿠르 비석 등이 구약의 예언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메소포타미아의 마리1)에서 발견된 서신들이 구약의 예언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손꼽힌다. 1933년 마리에서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드레 파로(André Parrot)는 약 이만 개의 토판을 발굴했고,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예언과 비견할 만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마리 문헌에는 성전이나 그 밖의 곳에서 신들이 짐리림왕에게 보낸 예언이 적혀 있다. 예언자나 다른 종교적 직임자는 꿈 혹은 황홀경 속에서 환상이나 환청을 통해 신탁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주로 종교적 메시지와 정치적 조언, 경고, 전쟁에 대한 예고다. 예를 들어 마리에는 짐리림왕에게 누군가가 꿈을 소개하면서 전쟁을 벌이지 말 것을 경고하는 문헌이 있다.2) 구약의 예언에도 매우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열왕기상 22장의 기록을 보면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자신이 본 환상을 전하면서, 아합이 속아서 전쟁에 나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예언은 특히 구약의 ‘문서 이전 예언자’(preclassical prophets)의 예언과 비슷하다.3)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은, 위의 예에서 본 것처럼, 심각한 국가적 이슈와 관련하여 왕에게 주로 전달되었던 것이고, 제의나 군사, 건축에 대한 예언을 통해 왕을 격려하거나 경고했다. 이러한 메소포타미아의 예언은 왕에게 군사적 조언을 하면서 경고하거나 축복하기도 했던 구약의 문서 이전 선지자의 예언과 비견된다.

 

해당 글과 관련없는 이미지 입니다.

 

반면, 구약의 문서 예언자가 남긴 예언은 선명하게 다르다. 나라는 흥왕하지만,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로 백성이 고통받고 기득권자의 횡포로 사회 정의가 무너진 시기에, 문서 예언자들은 왕궁을 위한 예언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백성을 향해 사회적, 영적 조언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구약의 문서 예언자의 이러한 예언은 마리 문헌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4)

 

고대 서아시아의 예언을 구약의 예언과 전반적으로 비교하여 확연하게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전자와 비교해 구약의 예언은 매우 반(反)제의적이고, 이를 야웨 유일신 신앙의 진면모로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 문서 예언자 사상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아 6:6).5) 문서 예언자는 아니지만, 사울을 나무랐던 사무엘의 유명한 발언에도 반제의적 특징이 발견된다.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님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사무엘상 15:22).

 

고대 서아시아 예언과의 비교를 통해 구약 예언자들에 대한 편견도 수정할 수 있었다. 저명한 구약학자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그의 1967년 저작 『예언 화법의 기본 유형들』(Grundformen prophetischer Rede)에서 메소포타미아의 마리 문헌과 구약의 예언을 비교하며 마리 문헌 속에 담긴 예언의 내용은 구약의 소위 구원 예언자의 예언과 유사하며, 둘 간의 역사적 접점도 제시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구원 예언자’(Salvific prophets)란 주로 왕궁에서 왕을 보좌했던 예언자를 말하며, 왕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그저 ‘평화’를 외쳤던 어용 예언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외롭고 정의롭게 활약하며 참 하나님의 예언을 전달했던 소위 ‘멸망 예언자’(Doom prophets)와는 반대 방향으로 서 있었던 자들로 알려져 있다.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둘 간의 대결 구도를 볼 수 있다. 왕궁에서 일하면서 아합의 전쟁을 지지했던 사백 명의 구원 예언자와, 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신껏 참 예언을 전하며 아합의 죽음을 예고한 멸망 예언자 미가야와의 한판 대결이다. 이와 같은 구도 아래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갈등은 구약의 예언사 연구에서 흥미로운 주제였다(참조, 예레미야 28장의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갈등). 지나친 일반화의 탓이지만, 구원 예언자는 왕과 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못 하는 아첨꾼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마침 마리 문헌을 보니 구원 예언자의 예언이 왕에게 격려만 한 것이 아니라 왕을 향해 비판을 날리기도 한 예가 있었다. 이 사실이 구약의 구원 예언자를 신선하게 조명하였으며, 그들도 충분히 왕을 비판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왕궁 예언자면서도 왕을 신랄하게 비난했던 나단 같은 예언자가 역사적 개연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구약의 구원 예언자들이 왕궁에서 오직 ‘평화’만 외치며 왕권에 부역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구약 예언의 고유성은 이러하다. 첫째, 구약의 예언에는 전 백성과 사회를 향해 멸망과 추방을 경고하며 사회의 불의를 꾸짖었던 공동체적 윤리성이 있다. 구약의 예언은 이를 야웨 신앙의 핵심으로 선언하며 야웨와의 언약에 신의를 지킬 것을 강조했다. 반면, 발견된 고대 서아시아의 예언에는 이런 공동체적 윤리 의식이 다소 희박하다. 둘째, 구약의 예언은 유독 반(反)제의적이다. 이는 제의를 부정했다기보다는 성전과 성소를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이 명령하는 규례 가운데 사회 윤리적인 것은 묵살하고 그저 제의적 규례만 이기적 목적으로 강조한 것을 비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요소가 함께 잘 드러난 구절이 있다. 아모스의 입을 빌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24).

 


1) Mari는 텔 하리리에 위치한 시리아의 고대 도시이다.

2) Simon, B. Parker, “Official Attitudes Toward Prophecy at Mari and in Israel”, Vetus Testamentum (1993), 54.

3) 문서 이전 예언자란 기원전 8세기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남겼던 문서 예언자(예,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등) 이전의 예언자를 말한다. 여기에는 나단과 엘리야, 엘리사, 미가야 등이 속한다.

4) 물론 여기에 반론도 있다. 유대 역사학자 아브라함 말라마트(Abraham Malamat)는 마리의 예언 문서가 왕궁의 외교 문헌이 있는 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주로 왕을 향한 예언이 발견된 것이라고 본다. 백성과 사회 전체를 향한 예언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을 수 있지만, 그저 소실되어 발견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5) 참조, 사 1:10-17; 렘 6:20; 7:20-23; 암 5:21-27; 미 6:6-8.

 

 

<좋은나무> 발간 5주년을 맞아 구독자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약 3분 소요) 바쁘시더라도 <좋은나무>의 성장을 위해 꼭 설문에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문항 이벤트란에 번호를 남겨주신 분들 중 추첨을 통해 열 분께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드립니다^^ 이벤트 참여를 원하시면 15번 문항에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설문조사 참여하기(클릭)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문의나 제안, 글에 대한 피드백을 원하시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편집위원과 필자에게 전달됩니다.
_

<좋은나무> 카카오페이 후원 창구가 오픈되었습니다.

카카오페이로 <좋은나무> 원고료·구독료를 손쉽게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_

 

 


관련 글들

2024.12.12

묵시문학의 덫, 의도된 모호성(기민석)

자세히 보기
2024.11.06

국내 최초, 손으로 보는 AL 촉각 성경 지도(정민교)

자세히 보기
2024.11.01

피정,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김홍일)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