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빙점』은 『빙점』의 기존 등장인물들에 루리코의 살인범 사이시의 딸과 요코의 친모와 그 가족이 더해지면서 이야기가 좀 더 복합적으로 펼쳐진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고의로든 아니든 죄를 짓는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상당수도 죄를 지어 가해자가 되고 그 결과로 피해자가 생긴다.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모두가 죄로 물고 물리는 관계망이 만들어진다. (본문 중)

『(속)빙점』1): 누군가가 있다면

 

홍종락(작가, 번역가)

 

어린 딸 루리코가 사이시라는 악당에게 살해당한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 그러나 쓰지구치 병원의 원장 게이조는 아내 나쓰에가 사실상 공범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에 아내는 집을 찾아온 동료 의사 무라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아이를 집 밖에 내보냈고, 그렇게 해서 아이가 사이시를 만났던 것이다. 게이조는 그런 아내에게 복수를 마음먹는다. 딸아이를 입양하기 원하는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되, 살인범 사이시의 딸을 몰래 데려와 기르게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사실을 밝혀 상처를 주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리를 실천하고 싶다는 고상한 명분으로 산부인과 의사이자 고아원과 연결된 친구 다카기를 설득해서 사이시 딸의 입양을 성사시킨다.

 

부부는 입양한 딸아이에게 요코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하지만 요코를 지극정성으로 기르던 나쓰에는 요코가 일곱 살 때 남편이 꾸민 일의 전모를 알게 된다. 그때부터 요코는 나쓰에의 은밀한 복수의 대상이 되어 험난한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요코는 나쓰에의 은근하고 집요한 차별과 견제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마침내 자신이 살인자 사이시의 딸이라는 원죄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허물어진다. 어머니의 어떤 부당한 대우 앞에서도 자기만 밝고 씩씩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살인자의 딸이라는 어두운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자 그동안 요코를 붙들어 줬던 ‘떳떳하고 결백하다는 자부심’은 빛을 잃고 말았다.

 

복수가 아니라면?

 

요코가 자살을 시도하여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다카기는 사실을 밝힌다. 요코가 사실은 사이시의 딸이 아니라는 것. 게이코라는 여성이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에 불륜으로 낳고 고아원에 보낸 딸이 요코였던 것이다. 뜻밖의 진실 앞에서 게이조와 나쓰에 모두 크게 충격을 받고 요코의 회복을 간절히 빌며 치료하고 간호한다. 앞서 <빙점>을 다룬 연재 글에서 다룬 대로, <빙점>은 원죄를 핵심 주제로 다룬 수작이다. 하지만 게이조와 나쓰에가 요코를 놓고 벌이는 복수극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빙점>은 복수의 부질없음 혹은 무용함의 이야기가 된다. 피가 튀고 흉기를 휘두르는 복수극은 아니지만, 내성적이고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게이조와 나쓰에가 그들의 성정에 맞는 음흉한 방식의 복수를 밀어붙이는 이야기다. 복수가 얼마나 허망하고 생각과 다른 결과를 낳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이야기다.

 

『(속)빙점』은 『빙점』의 기존 등장인물들에 루리코의 살인범 사이시의 딸과 요코의 친모와 그 가족이 더해지면서 이야기가 좀 더 복합적으로 펼쳐진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고의로든 아니든 죄를 짓는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상당수도 죄를 지어 가해자가 되고 그 결과로 피해자가 생긴다.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자들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모두가 죄로 물고 물리는 관계망이 만들어진다. 그 속에서 생기는 고통과 억울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빙점』에서 이미 복수의 무용함을 다룬 작가는 『(속)빙점』에서 그와 다른 해결책인 용서와 화해를 모색한다. 여기서 가해자가 정직하고 겸손하게 용서를 구한다면 일이 좀 쉽겠지만 모든 가해자가 그렇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 1: 무라이

 

루리코를 살해하고 자살한 사이시를 제외하고 이 소설의 악당이 있다면 쓰지구치 병원에서 근무하는 안과 의사 무라이다. 그는 병원장 게이조의 아내 나쓰에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보낸다. 『빙점』에서 먼저 집으로 찾아가 나쓰에가 루리코를 내보내는 계기를 제공한 것도 무라이였다. 그런데 루리코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무라이는 나쓰에에 대한 은근한 유혹을 멈추지 않는다.

 

무라이는 나쓰에에게만 집적댄 것이 아니었다. 쓰지구치 병원의 여사무원 유카코는 무라이의 확실한 표적이었다. 나쓰에가 추파를 던지는 대상 정도였다면, 유카코의 경우 그녀가 게이조에게 품은 연정을 이용해 옭아맨다. 급기야 무라이는 유카코의 순결을 빼앗고는 수시로 농락했다. 한마디로 무라이는 아주 나쁜 남자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카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입은 옷 그대로 하숙집을 나가 이후 10년 동안 소식이 끊”긴다. 살아 있다면 그냥 그렇게 사라질 수는 없는 법이니 다들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무라이는 뜻밖의 행동을 한다. 그녀가 실종된 지 6, 7년이 되었을 때 묘비를 세워준 것이다. 본인의 말마따나 “죽이고 나서 무덤을 만들어 준 셈”이다.

 

평소 무라이는 루리코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뿐인가. 루리코의 죽음과 무관하다 할 수 없는 그였지만 여전히 나쓰에에게 추파를 던진다. 아무리 봐도 인간 말종이다. 그런데 무라이는 안과 의사로서는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무라이가 이끄는 안과는 쓰지구치 병원의 운영에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왜 무라이는 그런 실력을 갖고 개원을 하지 않고 남의 병원에서 일했을까? 나쓰에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쓰지구치 병원에서 일한 지 20년 정도 되던 어느 날, 무라이는 자신의 친척이자 게이조의 친구인 다카기에게 자신이 곧 개업을 할 거라고 선언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오랫동안 쓰지구치 병원에 봉사해 왔으니 뭐 얼마쯤 죗값은 치른 셈이 되지 않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다카기의 질문에 무라이는 상상에 맡기겠다고 대답한다.

 

유카코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묘비를 세워준 것이나 루리코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20년 동안 쓰지구치 병원에 근무했던 것이나, 평소 그의 언행만 놓고 본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그의 뻔뻔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옳고 그름에 대한 나름의 기준과 자기 잘못에 대한 인식이 있는 도덕성의 흔적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든 속죄해야 한다는, 죗값을 갚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두 장면은 인간 말종 무라이를 다시 보게 만든다. 하지만 그의 속죄 방식은 늘 자기중심적이고 뭔가 뒤틀려 있다. 평소 그가 보여 주는 냉소와 비웃음의 태도와 비슷하다. 사실 그는 유카코와 결혼하고 싶어 했고 청혼도 했다. 유카코가 받아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게이조 부부에 대해서도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시치미를 떼고 ‘노력 봉사’로 속죄하고 있었다. 그도 사랑하고 사랑받고 죄의식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다운 관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안과 의사로서 뛰어난 의술을 갖추고 있었지만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에서는 무능했다. 자신의 죄를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무라이의 속죄 노력은 이 문제에서조차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자기만의 해법을 내세우는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속)빙점』 표지, ⓒ홍신문화사

 

가해자 2: 요코의 친모, 게이코

 

게이코는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돌아가 있었다. 마침 친정에 아는 사람의 아들이 하숙을 하고 있었고, 그 기간에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요코였다. 게이코는 아이를 낳고는 고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남편이 돌아오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더 태어난다.

 

게이코는 불륜과 아이의 비밀을 숨긴 채 20년을 살아간다. 고아원에 보낸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 괜히 들출 필요는 없었다. 남편에게도 두 아들에게도 굳이 지난 일을 밝혀서 좋을 게 무엇이겠는가. 게이코는 아마 이와 비슷한 이유와 논리로 자신을 다독였을 것이다. 그러나 요코의 양오빠 도오루가 찾아와 요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게이코는 심각한 정신적 동요를 보인다. 도오루와 만난 직후 교통사고를 낼 정도였다. 고아원에 맡긴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부담감마저 누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두 아들이 엄마와 꼭 닮은 요코를 우연히 보면서, 그중에도 막내아들이 같은 대학에서 신입생으로 요코를 만나 우정을 나누면서 게이코의 오랜 비밀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그 정도 기간이 지났으면 이제 이대로 묻어도 되지 않을까? 20년의 거짓과 기만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은 그 자체로 속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웬만한 범죄에는 공소 시효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장 요코에게 물어보라. 그런 게 말이 되겠는지. 남편에게, 아들들에게 그런 식의 변명이 통하겠는가? 그리고 소설의 끝부분에서 게이코는 결국 밀리고 밀려 더 이상은 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그녀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피해자 1: 게이코의 남편 야기치

 

요코와 어머니의 관계를 의심하고 진상을 알아내려 날뛰던 막내아들이 큰 사고를 내는 바람에 게이코는 더 이상 진실을 숨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결국 그녀는 가족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한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사실이 밝혀진다. 남편은 아내의 불륜과 거짓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모든 것을 덮어준 데는 사연이 있었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 있을 때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등 뒤에서 총구를 들이댄 상관의 명령에 따라 총검으로 중국인 임산부의 배를 갈랐던 것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저지른 일이지만, 본인의 말대로 그런 짓을 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핑계할 수 없는 큰 잘못이었다.

 

그런 피 묻은 손과 죄책감, 트라우마를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아내와 장모의 모습에서 죄지은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죄지은 사람 특유의 태도를 본다. 그리고 이리저리 알아본 끝에 자신이 없는 사이에 아내가 외간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배신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안도감이 더 컸다. 자신이 너무나 흉측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아내가 어쨌든 생명을 죽이지 않고 태어나게 한 것에 따른 안도감이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잘못이 속죄되는, 상쇄되는 느낌마저 받는다.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의 생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그가 어떻게 그 일을 알면서도 아내의 잘못과 기만까지 묻어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해자 2: 요코

 

자신의 잘못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정직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두 사람, 무라이와 게이코를 생각해 보았지만, 『(속)빙점』에는 피해자들에게 찾아가 사죄하는 인물이 하나 등장한다. 그는 범죄의 당사자는 아니다. 루리코를 죽인 사이시는 『빙점』 앞부분에서 자살해 버렸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사이시의 딸 준코가 피해자 가족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용서를 구한다. 이미 루리코는 죽었고 살인범도 죽고 없지만, 친아버지의 죄를 자기 것인 것마냥 아프게 여기고 진심으로 사죄한 것이다. 진실을 숨기고 외면했던 게이코나 자기 마음대로 속죄의 방법을 정하고 실천했던 무라이와는 전혀 다른 대응이다. 준코의 용감한 선택으로 새로운 차원의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이 비로소 열린다.

 

준코는 가해자였던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피해자 유족들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사실 준코는 아버지의 살해와 자살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대범하고 용감한 행동에 나설 수 있었을까? 이것은 요코가 준코에게 갖는 질문이기도 했다.

 

요코는 자신을 버린 친모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요코가 학교에서 만난 준코는 달랐다. 준코는 한없이 밝고 명랑했지만 얼굴에 불쑥불쑥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알고 보니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는 인식과 친아버지의 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준코는 자신을 그렇게 방치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부모를 용서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준코에 따르면 그 원동력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믿음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이에 대한 용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종교라면 범상치 않다. 그래서 요코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준코의 용서와 용기의 비결로서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요코의 눈에 준코는 기독교 신앙의 능력, 진리성에 대한 산 증인이었던 것이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는 증인이었다. 요코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용서하는 준코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그런 용서를 가능하게 만든 원천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가 있다면

 

죄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없어지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희생하고 뭔가 조치를 취한다고 무효화 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떳떳하다고 말하는 걸로 해결이 안 된다는 말이다. 『(속)빙점』에서는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죄를 용서할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는 고민이 내내 이어진다.

 

값싼 은혜, 터무니없는 신의 용서, 인간 회개의 위선과 얄팍함이 지적되고 조롱받는 시대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신에게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하면 끝이냐’는 이의 제기는 정당하다. 당연히 끝일 수가 없다. 모든 것은 기독교적 회개와 용서에 담긴 무게를 놓친 데 따른 귀결이다. 신의 용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 상황을 깊이 인식할 때라야 비로소 의미 있게 다가온다. 죗값을 갚고 보상할 수 있는 문제라면 값을 치르고 보상해야 할 것이고 보상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죄가 그렇게 만만한가? 아이를 낳아서 버리는 행위가,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산모와 아이를 모두 죽이는 죄가, 여자를 농락하여 절망하고 세상을 떠나게 만드는 죄가 인간의 반성과 사죄가 있다 한들 어떻게 없었던 것이 되고 속죄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요코가 도달한 결론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죄는 비록 인간의 목숨으로도 근본적으로 보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죄란 용서받는 것 이외에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을 벗어난 죄의 영향력과 무게 앞에서 요코는 급기야 자기 너머를 보게 된다. 요코는 자신이 사이시의 딸인 줄 알고 절망한 상태에서 남긴 유서에 이렇게 썼었다. “저의 핏속을 흐르고 있는 죄를 참으로 용서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존재가 있었으면 합니다.”

 

요코는 당시의 그 간절한 소원을 떠올리며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끼리의 용서에는 아마 완전한 것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용서해도 언제 다시 미움이 생겨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게이조와 나쓰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와 같은 불완전한 용서에 참된 해결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요코의 생각은 준코가 경험했던 용서의 근원,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갈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 또 어떤 경험과 이어지고 끝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그것이 독자의 삶의 현장에서 과연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는 메시지인지는 독자가 작품에서 직접 확인해야 할 것이다.

 


1) 미우라 아야코 저, 홍신문화사 역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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