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가사의 맥락 속에 욕설이 적절하고 정당한가 여부이지, 단지 욕했다고 욕할 일은 아니다. 욕 없이는 작품의 리얼리티가 죽는다는 주장이 우세해지면서 많은 콘텐츠에서 다양한 욕이 흔해졌다. 이런 욕설은 때로는 과잉 감정과 언어 폭력을 조장하기도 한다. (본문 중)
윤영훈(성결대학교 문화선교학과 교수)
I’m still fucking christian. Though I’m wearing new “Christian”
나는 여전히 xxx 크리스천이야. 새 크리스천(디올)을 입고 있지만 말이야.
이 노래는 불편하다. 영어 가사라 정확한 의미를 모르더라도, 후렴구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fucking Christian’은 크리스천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중독성 강한 이 후렴 파트는 뮤직비디오의 익살스런 손동작과 함께 다양하게 바이럴 효과를 일으키며 큰 화제가 되었다. 전체 맥락에서 기독교를 직접적으로 욕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듣는 입장에선 매우 불편하다.
‘Fuck’은 분명 강한 욕이다. 폭력적이며 외설스럽다. 미국에서도 공식 매체에서는 여지없이 삐 처리되고 19금(Parental Advisory) 딱지가 붙는다. 평상시 잘못 사용하면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단어는 발음상 쾌감 때문인지 다양한 상황에서 강조를 나타내는 표현 양식이 되었다. 우리말로는 ‘존나’, ‘헐’, ‘개OO’ 정도의 비속어다. 유사한 사례로 작년에 크게 히트한 (여자)아이들의 “Tomboy”의 앨범 버전에도 강렬하게 등장한다. 여기에서 ‘fucking’은 남자의 사랑에 종속되지 않는 여성의 자기 긍정과 자신감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미친 연이라 말해 What’s the loss to me ya
사정없이 까보라고 You’ll lose to me ya
사랑 그깟 거 따위 내 몸에 상처 하나도 어림없지
너의 썩은 내 나는 향수나 뿌릴 바엔 Ye I’m a (fucking) Tomboy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욕은 언어 속에 늘 존속해 왔다. 김열규는 자신의 저서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에서 욕은 “억눌린 자의 악다구니”로써 그 불가피한 충동성을 주장한다. 욕은 감정의 발산인 동시에 감정의 달램이고, 감정의 삭임이라는 것이다.1) 어쩌면 진정한 감탄의 절정에선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는지 모른다.
대중음악에 욕은 아주 근사하게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의 앨범 <Norman Fucking Rockwell>에서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fuck과 다채로운 미국 욕들을 만날 수 있다.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은 자본과 쾌락에 취해버린 1920년대 미국을 조소했던 화가이다. 라나 델 레이는 오늘의 미국을 바라보며 “노먼 록웰의 예언자적 비전”을 주목했다. 그녀의 노래 속에 fuck은 시대를 품는 탄식을 담아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음악평론가 배순탁은 이 앨범이 “Fuck의 미학을 구체화한다”고 평가한다.2)
문제는 가사의 맥락 속에 욕설이 적절하고 정당한가 여부이지, 단지 욕했다고 욕할 일은 아니다. 욕 없이는 작품의 리얼리티가 죽는다는 주장이 우세해지면서 많은 콘텐츠에서 다양한 욕이 흔해졌다. 이런 욕설은 때로는 과잉 감정과 언어 폭력을 조장하기도 한다.
여성 래퍼 퀸 라티파(Queen Latifah)의 “U.N.I.T.Y.”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욕이 사용된다. 대놓고 욕이 나오지만, 미국 음악계와 방송은 이 노래를 19금 처리하지도 않았고 공식 매체에도 삐 처리 없이 그대로 송출된다. 이 노래는 일상화된 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비판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Every time I hear a brother call a girl a bitch or a ho.
나는 늘 남자들이 여성에게 개년 또는 시팔년이라 욕하는 걸 들어
Trying to make a sister feel low
우리 자매들의 자존감은 바닥에 떨어지지
Love a black woman from (You got to let him know)
흑인 여성들을 사랑해 줘 (너는 그에게 꼭 알려 줘야 해)
infinity to infinity (You ain’t a bitch or a ho)
계속, 계속해서 (넌 절대 개년 또는 시팔년이 아니야)
급한 작업이 필요해 PC방에 들린 적이 있다. 많은 청소년들이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 이들이 쏟아내는 엄청난 욕설들에 나는 주눅이 들어 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청소년들의 일상 언어에는 문화적 영향이 다분하다. 오늘날 많은 콘텐츠(특히 힙합)에 난무하는 욕은 “약한 자들의 악다구니”가 아니라 약한 자들을 향한 폭력이며 이들에 대한 혐오를 자극한다. 이쯤 되면 욕의 미학은 사라지고 욕의 상업화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지올팍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콘셉트’으로 주목받았다. 감각적 사운드, 역발상 가득한 가사, 파격적 비주얼 디렉팅까지 아티스트로서 지올팍은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펼쳐가고 있다. 금기에 대한 도전과 종교적 노이즈 메이킹도 지올팍의 대중적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이 노래도 지올팍의 문화적 전략과 목표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욕설 표현은 과하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도 받아들일 수 없는 종교적 옹졸함으로 비쳐질 수 있지만, ‘fucking Christian’이 의도와 상관없이 하나의 관용어가 될 것이 염려된다. 몇 년 전 래퍼들의 무분별한 여성 혐오적 가사들이 문제를 일으킨 적 있다. 그 혐오 표현보다 언어가 조장하는 혐오 문화가 더 심각하다. 차라리 ”Fuck, I’m still Christian” 정도로 표현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 노래는 오히려 버스(verse) 부분이 훨씬 더 불편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When I was poor, my mom was stressed out
내가 가난했을 땐, 엄마는 나 땜에 스트레스를 받았어.
Now look, money made me a good boy to my mom
지금 봐, 돈은 나를 엄마의 좋은 아들로 만들었지.
When I was poor, I was like a hungry fox
가난했을 땐, 난 굶주린 여우 같았어.
Now look, I saved a lotta buddies from the basement
지금 봐, 난 친구들을 바닥에서 구해줬지.
I just bought a Christian, it’s blinging on my body
난 지금 크리스천 디올을 샀어. 내 몸에서 빛나고 있어.
I’m toasting with celebrities at the same bar
나는 셀럽들이 다니는 바에서 그들과 한잔하고 있지.
Hey pretty, do you wanna fuck with me? That’s no problem
헤이 이쁜이, 나랑 자고 싶어? 이런 것도 이젠 문제없지.
But Sunday morning is coming, I gotta go to church
하지만 일요일 아침이 되었어. 난 교회에 가야 해.
돈은 나를 좋은 아들로 만들고, 좋은 친구가 되게 하고, 나를 멋지게 보이게 하고, 이성의 사랑도 이루어 준다. 더 나아가 어쩌면 교회에서도 돈은 나를 좋은 크리스천으로 만들어 주는지 모른다. 그런데 돈이 없다면…? 돈의 현실성은 우리네 양심을 파고들며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이 노래를 듣고 한 크리스천은 자신의 SNS에 이렇게 고백했다.
이 시대의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무언가 들키고 싶지 않은 민낯을 들켜버린 듯한 수치심이 느껴졌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너무나도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여전히 크리스천 디올(?)을 걸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민낯!
박진규 교수는 이 노래에 대해 “비속어까지 써가며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만은 지키겠다는 오기 섞인 다짐으로 읽힌다”고 평가한다.3) 일리가 있다. 돈과 쾌락을 좇는 삶이라도 일요일 아침이 밝아오면 교회에 오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하니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바울에게서 이 노래와 유사한 고백을 발견한다. “Fuck(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24-25). 지올팍의 노래는 딱 거기에서 멈춘다. 모순과 풍자 너머 회개도 그 너머의 구원 요청도 없다. 바울은 내면의 선과 악의 싸움 가운데 위대한 복음을 찾아낸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자주 죄책감과 패배감에 빠진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위대한 자유가 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초창기 힙합의 미덕이었던 ‘스웨그’(Swag)는 가난한 흑인들의 긍지와 자존감이었고, 디스’(Dis)는 권력을 향한 그들의 용감한 비판 정신을 대변한다. 문화적으로 또 상업적으로 성공한 이후, 오늘의 힙합은 돈과 소비와 쾌락을 누리는 우쭐거림과 타자에 대한 모욕으로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힙합에서 이제 돈 얘기 좀 그만하면 좋겠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모습을 주목한다. “예배를 통해 교인들은 세속적 성공 없이도 얼마든 행복할 수 있음을 배운다.…그들은 쇼핑몰 군중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나눈다.”4) 알랭 드 보통은 기독교인들의 자신감이 끈끈한 공동체성에서 나온다고 분석한다. 복음은 우리 내면에 그런 자신감을 심는다. 돈이 없어 효도와 연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돈 없이 효도하고 연애할 수 있는 대안적 자신감 말이다. 돈 없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 돈 말고 다른 것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가진 것 없이도 당당하고 용감했던 예전 힙합 명곡들이 너무나 그립다.
1) 김열규,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서울: 사계절, 2018), 16.
2) 배순탁, “Fuck it I love you” <Dive>, 2019. 10. 23.
3) 박진규, “지올팍이 묻는 ‘크리스천다움” 「국민일보」, 2023. 5. 5.
4)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서울: 청미래, 201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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