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살펴볼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된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지하 조직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코리 텐 붐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주는 나의 피난처』다. 코리 가족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코리가 교도소에서 만난 독일군 장교 이야기부터 해 보자. (본문 중)

홍종락(작가, 번역가)

 

오늘 살펴볼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된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지하 조직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코리 텐 붐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주는 나의 피난처』다. 코리 가족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코리가 교도소에서 만난 독일군 장교 이야기부터 해 보자.

 

람스 중위

 

코리는 지하 조직 활동이 발각되어 끌려간 교도소에서 독일군 중위 람스를 만난다. 그는 자신의 막사 가장자리에 튤립을 심은 섬세한 사람이었고, 코리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그녀의 처지를 배려해 준다. 그러나 나치즘 철학에 경도된 사람이기도 하다. 코리가 교회에서 정신 지체아들에게 성경을 가르친 일을 열심히 소개하자 이렇게 소리친다.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했군요! 회심을 시키려면 그런 얼치기 같은 모자란 놈들 수십 명보다 제정신 박힌 사람 하나가 더 낫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깊은 어둠 속에 있다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코리가 소개하는 빛 되신 분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여러 날에 걸쳐 영적 의문과 성경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중위는 코리의 아버지가 얼마 전 그곳 교도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분개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정의감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는 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에 힘들어한다. 코리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지금 같은 때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지요? 대체 어떤 하나님이 그렇게 늙고 힘없는 노인을 여기 이 스헤브닝겐 같은 곳에서 돌아가시게 한답니까?”

 

하급 장교인 람스에게 어떻게 나치 같은 절대 악에 복종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과한 요구일 것이다. 그로서는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굴러가는 나치스 독일의 만행에 희생되는 유대인들의 눈에 람스 중위의 반응은 어떻게 보일까? 자신의 협조로 굴러가는 체제, 권력이 횡포로 발생한 노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묻는 것을 보며, 나는 그가 지금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람스 중위는 노인의 부당한 죽음이라는 악에 분개하고 악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낼 뿐, 자신이 이런 악을 저지르는 시스템에 일조하고 있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은 이런 악행을 두고 보시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나’, 이런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혹시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그는 엄연히 악한 체제에 봉사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그 바깥에 서 있는 관찰자, 비평가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의 질문은 보다 근본적인 반성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나아갈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자신의 영혼이 지금 어떤 자리에 처해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의심과 의문에 주저앉는다면 큰 불행이 아닐 수 없겠다.

 

여행 가방 이야기

 

코리 텐 붐은 람스 중위의 질문에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왜 그런 곳에서 돌아가셨는지 코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난문제를 대하는 기본적인 방향을 잡아준 아버지의 답변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질문을 아버지에게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대답 대신 선반에 있던 여행 가방을 들어 바닥에 내려놓고는 기차에서 내릴 때 코리가 들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코리가 힘껏 끌어당겨도 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날 아침 구입한 시계와 시계 부품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무겁다고 말하는 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지식도 마찬가지란다, 코리. 어린아이가 알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지식도 있어. 좀 더 크고 좀 더 강해지면 그때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은 아빠가 널 대신해서 그 가방을 들어줄 거라고만 믿으렴.

 

이해할 수 없는 온갖 부당하고 악한 일을 마주할 때, 코리가 상황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이와 같다. 자신이 상황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이가 무거운 가방을 짊어질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지식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이 아는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아이가 아버지를 신뢰하듯 하나님을 신뢰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리와 코리 아버지는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과 유대인들을 학대하는 이들을 보면서 그런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은 악당들에게로 향한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지독한 악행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만드는 사람들의 운명을 우려하고 불쌍히 여긴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것을 미워하시고 어떤 것을 원하시는지 아는 지식에 따라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물리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리라 마음먹는다. 이제 그들이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떻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지 이야기해 보자.

 

 

기도의 응답

 

네덜란드가 독일군의 침공에 항복하고 난 후, 코리 가족이 사는 하를렘에서는 유대인들이 길거리에서 체포되는 경우가 잦아졌다. 시계점을 하는 코리네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유대인 손님들이 시계 때문에 위험하게 시내를 오가는 일이 없도록 손님 집을 찾아가 수리할 물건을 받아다가 고쳐서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유대인 손님 집을 방문했다가 차를 얻어 마시며 당장엔 평안한 그 집에 언제라도 독일 군인이 쳐들어와 그들을 끌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리는 어느새 이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주 예수님, 주님의 백성들을 위해 나 자신을 드립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든 말입니다.”

 

얼마 후 코리네 집 ‘베예’에 위험에 처한 유대인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남편이 체포되고 아들은 은신처로 피한 상태에서 가게 문을 닫으라는 명령을 받은 후, 가게 위층의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안 나서 찾아온 여성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틀 만에 같은 처지의 유대인 부부가 찾아온다. 이미 유대인들을 돕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던 코리 오빠에게 이 일을 상의하자 ‘배급 카드’가 있는 사람에게만 은신처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베예를 찾아온 유대인들을 도우려면 우선 배급 카드부터 구해야 했다.

 

코리는 지적 장애인 딸이 있는 교인인 프레드 콘스트라를 떠올린다. 프레드가 다니는 식량 사무소에서 혹시 배급 카드 발급을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코리가 문 앞에서 주일 예배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자 프레드는 그녀를 들이고 문을 닫은 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자, 코리, 나를 찾아온 진짜 용건이 뭐죠?”

 

코리는 이때 속으로 기도한다. “프레드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면 너무 늦기 전에 이 대화를 중단시켜 주세요.” 프레드의 적극적인 협조로 일단 백 장의 배급 카드를 구한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찾아왔고, 배급 카드와 안전한 피신처 마련 외에도 복잡한 문제들이 늘어갔다. 해법을 궁리하던 코리는 자기 가족이 하를렘 사람 절반은 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물론 그들의 정치적 견해는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다. 이 사실에 코리는 가슴이 뛰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기도로 그분께 모든 결정을 맡기는 것뿐이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에 대한 실천적 답변

 

이것은 아름답고 귀한 고백이고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영리하고 치밀하고 약지 못한’ 코리의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고 안전한 전략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응답된다. 일단 그녀는 지하 운동 전국 조직망과 연결된다. 그리고 베예에 밀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문가의 주도로 베예 안, 3층 코리 방 한쪽에 감쪽같은 ‘피난처’가 만들어진다.

 

피난처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피해야 할 사람들이 제때 피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경보기를 설치하고 대피 훈련을 시작한다. 빠르게 피난처로 숨어야 할 뿐 아니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전문가의 지도를 받아 성실한 훈련을 진행한 끝에 처음에 4분이던 대피 시간이 70초로 줄었다. 피난처는 끝까지 발각되지 않았고 베예가 급습을 당하고 코리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끌려갈 때도 피난처에 숨은 이들은 안전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선택의 관계가 이론적으로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지만, 코리 가족들의 활동을 보면 실천적 측면에서는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유대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귀한 마음이겠으나 그것은 코리 가족이 평소에 가졌던 신앙과 신념에 충실한 것이었고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코리 가족은 자신들이 가진 인맥과 노동력, 지성을 발휘하여 유대인들을 도울 방안을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함께 하는 동지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를렘 조직의 리더가 된 코리에게는 특별 훈련이 실시된다. 밤중에 갑자기 비밀경찰이 들이닥쳐서 질문을 받게 될 상황에 대비하는 훈련이었다. 코리가 처음 불시에 받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유대인 아홉 명을 어디다 숨겨 줬지?” 코리는 잠결에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은 여섯 명뿐인데요.”

 

순간 사방이 고요해졌다. 코리의 기막힌 반응에 그녀를 훈련시키러 온 사람들 중 한 명은 머리를 쥐어뜯는다. 게슈타포가 코리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당연히 ‘우리 집엔 유대인이 없는데요’가 되어야 했다. 반복 훈련을 통해 나아지긴 했지만 코리의 마음에서 부담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이 위험해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코리 가족은 정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엄청난 악들이 벌어지는 그때,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 생각하는 일에 헌신하기로 선택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싸우지만, 아니 그렇게 싸우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운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적임을, 자신의 실수로 모든 것을 그르칠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시시때때로 발견하고 도움을 구한다. 그리고 도움을 받는다.

 

성경과 오일 병

 

피난처는 제 역할을 다했지만, 결국 코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체포되어 교도소로 끌려가고 네덜란드의 부흐트 집단 수용소에 갇혔다가 결국 독일의 라벤스브뤼크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다. 교도소에서 아버지를 잃고, 코리와 언니 벳시는 함께 수용소에서 생활한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도 자매는 자신들을 세심하게 돕고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그중에서 두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하나는 성경과 관련이 있고 또 하나는 병약한 벳시를 위해 챙겨 두었던 작은 비타민 오일 병과 관련된 것이다.

 

살인적인 환경의 기차에 실려 라벤스브뤼크에 도착한 코리는 큰 난관에 직면한다. 그동안 코리는 교도소와 부흐트 수용소에서도 여러 번 검문과 검사를 받으면서도 성경을 간직할 수 있었고 덕분에 코리 자매 본인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라벤스브뤼크 수용소는 감시와 통제가 훨씬 엄격했다. 죄수들은 접견실에 도착하여 관리들 앞에 담요와 보따리, 몸에 지닌 것을 다 내놓아야 했다. 그다음 입고 있는 옷까지 다 벗고 SS 대원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받으며 샤워실로 들어가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얇은 죄수복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만 신었다.

 

병약한 벳시 언니에게는 입고 있던 스웨터가 꼭 필요했고, 비타민도 있어야 했다. 성경책도. 척박한 수용소에서 성경책 없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런데 감시하는 눈이 수두룩한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 어떻게 성경책을 들여갈 수 있을까? 일단 코리는 어찌어찌 샤워실에 스웨터와 성경, 오일 병을 숨겨 간직할 수 있었다. 그다음 그것들을 옷 안에 걸치고 접견실을 지나 막사로 들어가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두 번이나 철저한 몸수색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 죄수들 하나하나의 몸을 앞뒤 양옆으로 훑어서 수색하던 SS 대원들이 코리의 몸에는 손대지 않고 빨리 지나가라고 거칠게 밀어댔다. 성경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신케 한 또 하나의 사례는 다비타몬 오일 병이다. 작은 병이었고 하루에도 여러 번 썼기 때문에 남은 양이 거의 없어야 했다. 벳시만 쓴 것이 아니라 침상의 다른 사람들까지 받아 쓰고 있었다. 코리는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는 언니를 위해 숨겨 두고 싶었지만 열에 들끓어 눈이 허연 사람, 오한에 덜덜 떠는 사람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병약한 사람의 수도 열 명, 스무 명, 스물다섯 명으로 계속 늘어났다.

 

그런데 작은 병을 기울일 때마다 마개 끝부분에 오일이 한 방울씩 나타났다. 병이 짙은 갈색이라 얼마나 남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도,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배급받은 빵 위로 기름방울이 떨어졌고, 주위의 죄수들은 경외심에 사로잡힌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일에 배정받은 동료 수용자가 효모 혼합물 비타민을 한 병 구해왔고, 그날로 다비타몬 오일 병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주는 나의 피난처』 표지, ⓒ좋은씨앗

 

기적이 말해주는 것

 

이 두 가지 사례만으로도 코리 자매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섬세한 함께 하심과 크신 능력을 짐작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코리 자매의 이런 놀라운 간증에 감동하는 동시에 평소 막연하게 느껴왔던 어떤 부조화를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혹시 자잘하고 세밀한 부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다고 고백할 수 있지만, 자신이 처한 여전히 암울한 전반적 상황 앞에서 그런 고백이 무색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경험하는 은혜와 주변 상황의 크기가 너무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한구석에서 밀려오는 이런 의구심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뭐가 달라졌는데?’ 코리와 벳시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순종하여 유대인들을 돕다가 잡혔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열악한 수용소로 끌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다 떨어진 스웨터, 성경, 작은 비타민 오일 병 하나가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작은 일’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왜 ‘큰일’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가? 너무나 큰 악이 버젓이 허용되고 활개 치는 상황을 왜 허락하시는가? 왜 막지 않으시는가. 사실,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작은 일’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그분의 보이지 않는 ‘큰일’과 어떤 관계인지 잘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C. S. 루이스가 『기적』에서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해 제시한 통찰을 빌려와서 설명을 해보겠다.

 

그리스도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 기적들은 자연을 침공1)한 세력(그리스도)이 낯선 세력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왕이신 분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그 모든 기적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해 오셨던 일, 또는 앞으로 하실 일을 순식간에 한 장소에서 하신다. 각 기적은 하나님이 자연이라는 캔버스 전체에 걸쳐 우리가 쉽사리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글자로 적어놓으셨거나 또 앞으로 적으실 무언가를, 우리를 위해 작은 글자로 적어주는 행위다.”

 

그리스도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기적을 생각해 보자. 이 기적은 “포도주의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선포”다. “매년 자연 질서의 일부로서, 하나님은 포도주를 만드”신다. 그분은 “물과 토양과 햇빛을 주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식물 유기체를 창조하시며, 그렇게 만들어진 주스는 적절한 조건이 맞춰지면 포도주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이렇게 늘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계신다. 포도주는 결국 물이 변해서 된 것이니까. 그런데 단 한 번,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그 과정을 단축시켜 순식간에 포도주를 만드셨다. 기적이란 “말하자면 지름길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만들어 내는 일 자체는 평범한 것”이다. 루이스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한다. “늘 하시던 일을 작게, 가까이서, 도구 없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적은 그리스도가 바로 자연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그분임을 알려주는 ‘작은 글자’라는 대목을 떠올려 보자. 나는 코리가 경험한 기적도 이와 비슷한 식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큰일은 방치하시거나 할 줄 모르시고 작은 일만 하시네.’ 이렇게 삐딱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보아야 한다. 오일 병의 오일이 계속 나왔던 일을 먼저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의 기적이 자연의 창조주이자 보존자로서 늘 크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하시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작은 규모로 빠르게 해 보이신 것처럼, 코리에게 오일 병의 오일이 떨어지지 않은 범상치 않은 일은 하나님이 커다란 글자로 적고 계신 것을 작은 글자로 적고 계시는 것이었고 온 세상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도 함께 하시고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였다. 하나님은 왜 이런 작은 일만 하시는가, 코리의 생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평소 그분의 뜻에 따라 너무나 큰 규모로 수많은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코리가 감지하고 체감할 수 있는 수준과 크기와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받아들였다.

 

스웨터, 오일 병, 성경이 그 많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수용소로 들어갈 수 있었던 일의 의미도 생각해 보자. 이 사건은 오일 병의 경우와 다르다. 여기서 코리가 경험한 것 중에 그 자체로 평범하지 않고 초자연적인 일은 하나도 없었다. 감시자들의 무신경하고 무심한 몸짓과 대응이 뜻밖에도 물건을 숨길 곳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적절한 타이밍에 적재적소에 물건을 숨길 의자가 놓여 있었고, 코리가 걸친 물건들 때문에 옷이 불룩 튀어나온 것이 수많은 감시자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마침 코리만 몸수색을 하지 않는 것 등 하나하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다. 코리는 이런 것들이 이렇게 절묘하게 모여서 만들어진 결과물에서 심지어 적대적인 사람들을 통해서도, 온갖 상황 안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황에 좌절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코리와 벳시는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수용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곳은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리로 간다고 끝이 아니었다. 코리와 벳시는 그 상황과 그 자리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경험했고, 우리는 그중 두 가지 사례만 살펴보았다. 결국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코리는 바로 이것을 전하고자 했다. 그렇듯 깊은 심연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분이 함께할 수 없는 상태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하고자 했다.

 

수용소에 있는 이유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의 코리 자매가 수용된 막사 옆에는 징벌 막사가 있었다. 징벌 막사에서는 하루 종일 일정한 리듬에 맞춰 사람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비명이 따라왔다. 코리는 이것을 비롯한 온갖 비참한 일과 의미 없어 보이는 숱한 고통을 겪으며 ‘주 예수님, 이 짐도 들어주실 건가요?’ 기도하게 되었다.

 

이런 절망과 비참함 가운데 코리는 특별한 고백을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 한복판에서 언니와 자기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가 점점 확실해진다는 고백이다. 다른 이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로 말하자면, 아침부터 밤에 불이 꺼질 때까지, 줄을 서서 점호를 받을 때 외에는 언제나, 성경에서 도움과 소망을 바라며 모여드는 사람들의 구심점이었다.” 코리의 비범한 고백은 이렇게 이어진다. “라벤스브뤼크에서의 생활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그것은 공존할 수 없는 삶이었다. 하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인 삶으로, 이 삶은 날이 갈수록 끔찍해졌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이 삶은 날마다 더 좋아졌고, 진리 위에 진리, 영광 위에 영광이었다.”

 

코리가 스스로 고백했으니 안심하고 말할 수 있겠다. 코리 자매가 수용소에 갇힌 것은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코리 자매는 너무도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이 그곳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복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들 자매에 힘입어 다른 세계를 엿보고 경험할 기회를 얻었다. 코리 자매는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코리는 자신을 잘 지켜야 했다. 그녀가 수용소에서 평안을 잃고 능력을 잃어버린 때가 있었다. 그때 코리는 언니의 형편을 빙자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혔다. 코리는 그렇게 된 핵심적 원인이 그동안 자신이 수용소에서 했던 일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사람으로선 불가능한 일이기에 도움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극악한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자기중심성, 누구에게나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반응으로 보일 수 있는 원수에 대한 분노와 원통함은 코리에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이런 것들을 처리하고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녀가 수용소에 와 있는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을 터였다. 코리 자매는 그들의 삶과 태도를 기반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능력 있게 전하여 절망의 나치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분을 의뢰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피난처

 

긴 글을 쓰기는 했지만, 내가 코리 텐 붐 여사가 말한 메시지들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게 코리 여사의 놀라운 경험과 고백을 소리 내어 감탄하고 흠모하고 되새기는 과정이었다. 코리 여사의 간증은 내가 오랫동안 품고 있던 의문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다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례들을 잔뜩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학생의 학습 노트 같은 이 글이 나와 비슷한 또 다른 학생에게 유익을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주는 나의 피난처』의 영어 제목은 『그 피난처』(The Hiding Place)다. 일차적으로 이 피난처는 코리의 집 베예에 설치되었던 은신처를 가리킨다. 뛰어난 건축가가 실력을 발휘하여 만들어 낸, 유대인 거주자들을 위한 완벽한 은신처 말이다. 베예의 유대인들은 비밀경찰의 급습을 피해 그곳으로 달아나 목숨을 구했다. 코리에게도 그처럼 위험할 때 달려갈 수 있는 다른 피난처가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을 돕는 지하 조직 활동과 수용소 생활 가운데 그 피난처로 수시로 달려갔다.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코리는 성경이 증언하고 자신이 생생하게 체험한 그 피난처를 전했고 전쟁의 상처에 시달리는 이들을 도왔다. 『주의 나의 피난처』는 출간된 지 35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확신과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에게 묻고 있다. 당신에게는 피난처가 있느냐고. 혹시 주님이 당신의 피난처가 되시느냐고. 베예에 있던 유대인들처럼, 수용소에 있던 자기처럼, 환난 날에 피난처로 급히 달려가고 있느냐고.

 


1) 루이스에 따르면 기적은 자연법칙을 깨뜨린 것이 아니다. 기적은 일종의 간섭이다. 여기서 루이스는 재미있는 비유를 든다. 이번 주에 내가 책상 서랍에 1000파운드를 넣고 다음 주에 2000파운드를 더 넣고 그다음 주에 1000파운드를 더 넣었다고 해보자. 그러면 산술 법칙에 힘입어 다음번에 서랍을 열어보면 4000파운드가 있을 거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다음번에 서랍을 열었는데 1000파운드밖에 없었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될까? 산술 법칙이 깨어졌다는 결론을 내릴까? 그럴 리가 없다! “저는 누군가가 영국 법을 어기고 제 서랍에서 삼천 파운드를 훔쳐 갔다는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그것이 더 합리적인 결론이니까요. 더욱이, 산술 법칙 때문에 도둑의 존재나 도둑이 들 가능성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우스꽝스러울 것입니다. 반대로, 그런 법칙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도둑의 존재와 활동이 드러났다고 말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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