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저는 오히려 『침묵』이야말로 참으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교와 박해, 순교와 배교…,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극한의 시공간이 함축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부재 현실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역설적으로 침묵하지 않고 말을 건넵니다. (본문 중)

윤진영(목사, 높은뜻광성교회)

 

신학교에 갓 입학한 스무 살 시절, 저에겐 표지만 봐도 무서운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소설이었지만, 호러도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아니었습니다. 샛노란 표지에 오묘한 폰트, 기묘한 스크래치 패턴으로 장식된 이 소설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홍성사 역간, 2003)이었습니다. 청년부 목사님의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에 관심을 가지자 목사님은 제게 단단히 경고하셨습니다. “이 책은 그냥 소설이 아니다. 그저 호기심으로 집어 들었다가는 아주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함부로 읽어선 안 된다.” 하지만 강한 금지는 강한 욕망을 야기하는 법이지요. 먹지 말라는 열매를 향해 손 내민 태고의 그 사람들처럼, 저도 어느새 도서관 서고에 꽂힌 『침묵』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스무 살 여름방학에 읽은 『침묵』은 그 목사님의 말씀처럼 여느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을 얼마 전 다시 읽었습니다.

 

신학생이던 저는 어느덧 청년부 목사가 되었습니다. 팬데믹으로 수년간 막혔던 국가 간 이동의 장벽이 낮아지고, 우리 청년부는 오래간만에 해외 탐방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선교 현장과 종교 유적들 중 오래 고민하여 결정한 곳은 일본 ‘나가사키의 순교자·은둔 그리스도인 유적지’였습니다. 소설 『침묵』의 배경이 된 바로 그 곳이었습니다.

 

『침묵』 표지, ⓒ홍성사

 

어머니를 따라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엔도 슈사쿠는 나가사키를 여행하던 중 한 후미에1)를 보고 영감을 얻어 소설 『침묵』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소설은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자신의 대표작이 되었지만, 정작 그는 제목인 『침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침묵’은 출판사의 지인이 추천한 제목이었는데, 엔도 슈사쿠는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이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출판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전자의 의미로 소설을 받아들이고, 일부 교회들에서는 ‘읽지 말아야 할 금서’나 ‘읽는 데 주의가 필요한 책’으로 여긴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합니다. 후일 그는 다시 제목을 선택할 수 있다면 『침묵』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며, 『침묵』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이중 의미를 전달하기엔 적절하지 않다고 후회를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침묵』이야말로 참으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교와 박해, 순교와 배교…,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극한의 시공간이 함축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부재 현실을 경험하는 모든 이들에게 역설적으로 침묵하지 않고 말을 건넵니다. 소설 속에서 그리고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 보이는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노래하고, 어떤 이들은 기도하며, 어떤 이들은 용서를 구하고, 어떤 이들은 설득하고, 어떤 이들은 읊조립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지만,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존재의 소리들, 실존의 비명들, 고통의 대화들, 위안의 노래들을 포개고 겹쳐 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침묵』이라는 제목 때문에 우리 안에 새겨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나가사키 순례를 준비하면서 『침묵』을 청년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이번에 읽을 때는 『침묵』의 텍스트가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청년들의 삶과 신앙이 워낙 다양하니 각자 이를 어떻게 소화해 낼지 염려는 조금 생겼습니다. 제게 『침묵』을 선뜻 권하지 못했던 청년부 목사님도 아마 이런 마음이었나 봅니다. 그래도 같이 읽었습니다. 책을 읽기 어려운 청년들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를 함께 보았습니다. 청년들도, 저도 여러 시공간들이 겹쳐 읽혀서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그래서 나눌 수 있는 대화들이 있었습니다. 불안정하고 고달픈 젊음의 일상들, 쉽게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혼란과 관계의 어려움들, 이유를 알 수 없이 찾아오는 비극과 상실 그리고 아물지 않는 상처들, 우리 모두가 그저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9년 전의 그 바다, 삶의 틈을 넓혀 보려 찾았던 곳이었지만 생명의 공간마저 확보되지 않았던 이태원의 그 골목,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우크라이나와 전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폭력과 죽음의 소식들…, 청년들과 제가 함께 겪고 있는 하나님의 침묵을 서로 포개고 겹친 채로 우리는 나가사키를 향했습니다.

 

그리고 나가사키에서는 그곳에 응결해 있던 수많은 침묵들과 마주했습니다.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바를 믿기 위해 순교한 이들, 수 세대에 걸쳐서 신앙을 전수해 왔음에도 배교자라는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은둔 그리스도인들, 박해가 아니라 강제 포교로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했던 일부 그리스도교 영주들, 결국 일어나버린 종교 전쟁과 학살들, 시간이 흘러 원자 폭탄이 할퀴고 간 나가사키의 흔적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통일교와 정치권의 유착관계가 밝혀진 뒤, 종교계 전체가 위축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의 일본 교회들…, 우리가 나가사키를 향하기 전에 갖고 있던 침묵에 더하여 오히려 현지에서 마주한 수많은 침묵들까지 안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침묵이 만들어 준 수많은 대화들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침묵 위에서 낯선 일본인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 침묵 위에서 가톨릭교회와 대화할 수 있었고, 그 침묵 위에서 신앙을 포기한 이들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 침묵으로 서로의 오늘을 지탱해 줘야 할 이들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목회자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게 침묵하시지요. 아니, 엔도 슈사쿠의 표현을 따르자면, 하나님은 언제나 제게 침묵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침묵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청년 목회자인 저의 책장에는 바오로 딸에서 새로 출간한 새하얀 표지의 『침묵』(2009)이 꽂혀 있습니다. 누군가 다가와서 책장을 살펴본다면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달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못 이기는 척, 이 책을 빌려줄 것입니다. 대신 반납할 때는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덮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꼭 말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오늘도 저의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과 대화하고 싶습니다.

 


1) 일본 에도 막부 시대에 기독교 신자를 색출해 내기 위해 사용했던 나무 또는 금속으로 만든, 성화가 그려진 판(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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