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타나크가 헬라어로 번역될 때, 본래 유대인들이 정경화하였던 책들 이외의 다른 책들이 첨가되었고, 그 분류 구조도 바뀌었다. 토라에 무게 중심을 둔 구성에서 탈피하여 ‘시간’적 구성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성서의 책들을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열거했고, 이 틀 안에 ‘율법-역사서-시가서-예언서’라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역사’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은 크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역사서에 속하는 책들은 무게감이 실려 있다. 역사서로 분류되는 여호수아서, 사사기, 룻기, 사무엘서 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가 그러하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구약성서를 처음 형성한 유대교의 ‘정경’에는 ‘역사서’라는 분류가 없다.1) 유대교 성경에는 Torah(율법서)와 Nebi’im(예언서), Ketubim(성문서)이라는 분류만 있다. 기독교 역사서의 핵심적인 책인 ‘수-삿-삼-왕’은 유대교 정경 속에 ‘예언서’로 분류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다가 그 땅을 잃을 때까지 그 정복과 왕국기의 기록은 담은 ‘수-삿-삼-왕’은 ‘역사’라 불리는 것이 옳은 듯하다. 그런데 유대인의 정경 속에 이 책들은 왜 ‘예언’인 것일까?

 

히브리어로 적혀진 이 유대교의 성경이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헬라어로 번역되는데,2) 이때 책들이 다시 분류되면서 ‘역사서’라는 부분이 생겨났다. 후대에 유대교 내로부터 기독교인들이 분파했고, 기독교는 자신의 정경에서 헬라어 구약성서의 책 분류를 따랐다.

 

유대인은 그들 성경을 분류한 세 부분의 첫 자를 따서, 그들의 성서를 ‘타나크’라고 부른다 (Tanakh = T+N+Kh).3) 타나크는 그 핵심이 토라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주셨다는 토라(율법)는 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정중앙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이 오경은 타나크의 가장 첫머리에 위치하는 것이며, 이 중요성은 다른 정경 순서에도 반영되어 한결같이 오경이 가장 첫머리에 나온다.

 

예루살렘 ⓒpixabay

 

율법이 유대교 정경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고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성서의 가나안)에 살다가 기원전 6세기에 나라를 잃고 많은 유력한 인물들이 동방으로 잡혀가 살게 된다. 가나안의 토착민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들 신앙의 핵심을 성소에 두었고, 특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 유다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 믿었던 예루살렘은 그들 눈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더욱이 유배 생활을 하던 그들은 자기들의 성소가 있던 곳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에는 큰 신학적 전환이 오게 된다. 신앙의 핵심을 성소에서 율법으로 전환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러 특정 장소로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세상 어느 곳에 있든지 율법을 가지고 삼삼오오 모여 있기만 하면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신앙이 형성된다. ‘처소’를 중심으로 하는 정착민 특유의 원시적 신앙 양태에서, ‘말씀’(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형이상학적인 신학으로 진보한 것이다.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은 그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자신들의 민족적 신앙적 유산을 성문화하여 보존하려 하였고, 이렇게 성경을 구체화하던 시기에 그들의 신앙 핵심은 율법이었던 것이다.

 

이후 타나크가 헬라어로 번역될 때, 본래 유대인들이 정경화하였던 책들 이외의 다른 책들이 첨가되었고, 그 분류 구조도 바뀌었다. 토라에 무게 중심을 둔 구성에서 탈피하여 ‘시간’적 구성에 역점을 두었다. 그래서 성서의 책들을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 열거했고, 이 틀 안에 ‘율법-역사서-시가서-예언서’라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 구조를 그대로 기독교가 받아들였고, 개신교는 이 시간적 구조를 유지한 채 헬라어 번역 경전에 첨가되었던 책들만 제거하였다. 즉, 개신교의 구약성서는 유대교 타나크의 책들을 가감 없이 전수받아 그 구조를 토라 중심에서 시간 중심으로 옮긴 것이다.

 

기독교의 구약성서가 율법 중심이 아닌 시간 중심의 구조를 취하는 것은 신학적 의의가 있다.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는 유대교의 타나크는 미래의 예수를 예표하는 ‘과거’의 책이며, 신약은 이미 현현한 예수에 의해 발생한 책이고 재림할 예수를 고대하는 ‘미래’의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구약성서의 핵심이 율법이 아니라, 비록 구약성서 자체가 역사적으로 증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가 그 핵심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는 ‘오실 예수’를 신약성서는 ‘오신 예수’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신약 성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는 무척 ‘종말론적인’ 성격의 종교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시간’은 기독교인들에게 의미심장했다.

 

처음 질문으로 다시 가 보자. 왜 역사를 다룬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들은 왜 ‘수-삿-삼-왕’을 예언으로 보았을까? 예언이란 보편적으로 미래의 일을 예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언을 종교적 현상으로 볼 때, 이는 하늘의 신비(神秘)를 알아 인간 세계의 운명을 예지하는 초월적 행위이다.4)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약은 그와 같은 예언의 개념을 충분히 반영하는데, 예를 들어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아합 왕이 전쟁에 나서기 전에 예언자들에게 전쟁의 결과를 의뢰하는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를 형성하던 시기 유대인들은 율법을 신앙 핵심으로 두었고, ‘예언은 단지 미래를 예견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토라를 조명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예언에 대한 이 전환적 이해는 우리가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성서의 많은 곳에 이와 같은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모세는 절대 이사야나 아모스처럼 정통적인 예언자의 활동을 한 인물은 아니지만, 종종 예언자로 언급되고 있다(신 18:18; 호 12:13). 그 이유는 모세가 예언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워낙 ‘토라’ 즉, 율법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절대적 인물이기에 후대에 그를 예언자라고 명예롭게 부른 것이다. 결국 예언서는 미래를 예견했던 책이라기보다는 율법을 가르치는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실제로 예언자들의 예언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진단하는 것이 핵심 취지다. 아모스도 예레미야도 그러했다. 유대인들이 예언으로 분류하는 ‘수-삿-삼-왕’도 같은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 책들이 단순히 과거에 여호수아가, 다윗이, 요시아가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보고하는 기사(report)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의 행적은 모두 율법(말씀)을 조명하는 기사며 신앙고백이며 설교인 것이다. 율법(말씀)을 조명하기에 예언이다. 단지 그 당시 벌어졌던 사건들을 열거하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들로 율법과 소통하며 ‘율법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전달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1) 현존하는 구약 정경으로는 대표적으로 유대교, 로마 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의 것이 있다. 정경(canon)이라는 말은 ‘측량기’나 ‘자’ 등을 가리키는 헬라어 ‘kanon’에서 비롯되었으며, ’정통적‘ 신앙의 내용과 행위를 규정하는 데 권위적이고 규범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성서 문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고대 이스라엘에 수많은 신앙 문헌들이 있었지만 그중 일부만 정경으로 받아들여졌고 나머지는 대게 외경이나 위경으로 분류되어 있다. 참조, J.A. Sanders (1992), ‘Canon’, Anchor Bible Dictionary, Vol. 1.

2) 이를 70인역, 혹은 셉투아진트(Septuagint)라고 부르며, LXX라고도 표기한다.

3)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경을 이와 같이 삼분하였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누가복음(24:44; 약 1세기 말)과 탈무드(Baba Bathra 14b-15a; 3-5세기), 요세푸스의 Contra Aionem(I, 8; 약 95년)이 증언하고 있다.

4) 기민석(2005), “우가릿 문헌 KTU 1.16.v 와 사 6장을 비교하여 살펴본 이사야의 사명”, 엄원식 박사 퇴임논문집 발간 위원회, 『코아마르아도나이』, 14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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