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명예, 상승을 추구하던 프란체스코. 이제 그에게 “진정한 얼굴을 부여”하는 자들은 “하느님만큼이나 늙고 말이 없는 계층. 하느님만큼이나 노쇠와 침묵 속에 길을 잃은 자들”이다. 그는 가난한 자, 동물, 자연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평생 낮은 삶을 살아간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 『지극히 낮으신』

1984Books | 2023년 08월 17일 | 176쪽 | 14,500원

 

새가 긴 날개를 펼치고 있다. 기둥 사이를 가볍게 지나고 있다. 빛이 드는 곳을 향해 낮게, 아주 낮게 날고 있다.

 

새는 바람을 타고 날고, 때로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난다. 바람을 거스르기도, 그것을 가르기도 한다.

 

“[성서에는] 바람이 분다. 사방에서 바람이 분다.… 성서는 공기로 이루어진 유일한 책, 잉크와 바람의 범람이다. 의미를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책이다.” 다시 말해 성서는 고체나 액체가 아니다. 성서는 인간에게 가장 낯설면서도 핵심적인, 기체로 이루어져 있다.

 

기체는 어디로든 쉽게 틈입한다. “전쟁과 거래의 말들. 영광과 파멸의 말들. 귀머거리의 말들. 그 사이 측면에서, 밑에서, 위에서 영혼의 바람이 분다.”

 

기체는 움켜쥘 수 없다. “공기로 된 책 속의 말들을 배울 수는 없다.” 인간은 성서의 말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거룩한 바람에 의해 모든 감각과 움직임이 온통 제어될 뿐이다.

 

이러한 바람에 온몸을 맡긴 자, 이 책은 그에 대한 이야기다.

 

『지극히 낮으신』 표지, ⓒ1984Books

 

상인의 아들 프란체스코, 그는 중세의 한복판에서 태어난다. 상인과 기사와 사제의 세계, 곧 부와 영광과 구원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는 자란다.

 

이른바 ‘아버지’의 세계, 부와 영광과 구원을 탐하던 청년 프란체스코의 세계는 불현듯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는 전쟁 포로가 되기도 하고, 큰 병을 겪기도 하면서 세계의 이면을, “진정한 집, 진정한 본성, 진정한 고향을” 감지한다. 그는 자신의 온 생을 던질 만한 존재에게 매료된 것이다.

 

이제 아버지를 떠날 때가 되었다. 아니, 떠나야만 한다. 그는 부와 영광과 구원을 거부하기 위해 아버지를 거부한다. 그는 아버지를 거부하기 위해 부와 영광과 구원을 거부한다.

 

그는 “비와 눈과 웃음을 파는” 아버지를 긍정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직물을 파는” 아버지를 부정한다.

 

“그분은 당신보다 훨씬 가벼운 아버지입니다.… 결에 없을 때 당신보다 훨씬 덜 위협적이고, 함께 있을 땐 내게 훨씬 많은 놀이를 허락합니다. 당신처럼 돈과 의무와 심각한 과업을 신뢰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아이들, 개, 당나귀 같은 하찮은 무리와 함께하는 데 시간을 몽땅 쏟아붓습니다.”

 

“비와 눈과 웃음을 파는” 아버지는 노쇠하다. 강렬한 태양이 아니라 녹아내리는 촛불이다. 구멍 나고 남루한 옷이다.

 

초라한 하느님. 프란체스코의 하느님은 균형이 없다. 한쪽으로 무너진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후렴구나 가난한 이들이 흘린 피, 소박한 사람들의 목소리 안에만 머무“르는 하느님이다.

 

지극히 낮으신 하느님이다.

 

프란체스코는 이전의 세계를 떠나서, 지극히 낮으신 분을 좇아 끝없이 하강한다.

 

성공과 명예, 상승을 추구하던 프란체스코. 이제 그에게 “진정한 얼굴을 부여”하는 자들은 “하느님만큼이나 늙고 말이 없는 계층. 하느님만큼이나 노쇠와 침묵 속에 길을 잃은 자들”이다. 그는 가난한 자, 동물, 자연과 함께, 하느님과 함께 평생 낮은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노래에 반항하는 새. 유서 깊은 한 그루 나무 이파리들 속에서 시들어 가기보다는 비가 내리치는 길 위에서 깡충대며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참새.” 이것이 프랑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이 만난 프란체스코다.

 

보뱅의 글은 경직되고 딱딱한 신앙, 형식적이고 고루한 종교에서는 담길 수 없는, 그런 글이다. 그의 글은 시로 가득 찬 바람과 같다. 때로는 가볍게 스치는 미풍처럼, 때로는 밀도 높은 돌풍처럼 종이 위를 지나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프란체스코가 자유롭게 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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