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 된 『노인과 바다』를 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연히 쿠바 어부 푸엔테스를 만나 그가 겪은 불운을 들으며 소설의 영감을 받았다. 순간 그의 마음속에선 산티아고라는 인물이 떠올랐고 그를 묘사하면서 어떤 생각이 느껴졌을 것 같은데, 그게 ‘인내는 참는 게 아니라 멀리 바라보는 것’ 같다. (본문 중)
이정일 (작가, 목사)
겪어 보지 않았음에도 마치 겪어 본 것처럼 누군가의 아픔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걸 소설을 읽으면서 경험한다. 『노인과 바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이다. 1952년에 출간된, 수령이 거의 70년이나 된 소설을 사람들이 읽는다. 노인 어부가 700킬로짜리 청새치를 잡았다가 상어에게 다 뜯긴 불운한 이야기를 왜 사람들은 읽을까?
살면서 한번은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산다는 게 뭘까 같은 질문이다. 노인 산티아고도 이런 질문을 했을 법하다. 그는 아내와 사별했고 자식도 없다. 그의 곁에는 이웃집 소년 하나뿐이다. 그는 외로웠고 힘들었다. 한데 그는 벅찬 낚시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84일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불운을 겪고 있음에도.
힘들 땐 누가 등만 두드려 주어도 눈물이 난다. 그 작은 손짓에 담긴 사랑의 힘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첫 도입부를 읽으면 산티아고를 향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깡마르고 여위고, 목엔 주름이 깊게 잡혔고, 두 뺨엔 검버섯이 있고, 두 손에 난 상처가 깊지만, 작가는 유독 두 눈을 강조한다.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1)
쿠바 어부 산티아고의 생업은 낚시다. 도입부에서 마을 술집에 들른 그를 보고 많은 어부들이 놀려댔지만 나이가 지긋한 어부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불운이 주는 아픔을 늙은 어부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 보면 산티아고는 “행운을 파는 곳이 있다면 조금 사고 싶군”(118쪽)이라고 속마음을 드러낸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 된 『노인과 바다』를 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연히 쿠바 어부 푸엔테스를 만나 그가 겪은 불운을 들으며 소설의 영감을 받았다. 순간 그의 마음속에선 산티아고라는 인물이 떠올랐고 그를 묘사하면서 어떤 생각이 느껴졌을 것 같은데, 그게 ‘인내는 참는 게 아니라 멀리 바라보는 것’ 같다.
어떤 선택이 최선일까 우리는 날마다 생각한다. 선택의 순간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다 보면 소심해지기 쉽고, 소심해지면 용기를 내지 못한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놀라는 건 노인이 바라보는 침착한 시선이다. 청새치를 잡으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청새치가 미끼를 문 뒤에는 고기가 밥을 먹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한다.
소설을 읽을 때 좋은 건 한 사람의 삶을 이력서가 아니라 긴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서다. 우리는 이력서나 면접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느껴진다.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주인공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게 실은 현실 속 나의 삶을 읽는 안목을 높인다는 걸. 노인은 귀가 중이다.
이제 배는 바다 위를 가볍게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은 모든 것을 초월한 채 가능한 한 배를 요령 있게 다루어 무사히 항구에 도착할 수 있도록 몰았다. 누군가 식탁에서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라도 하듯 한밤중에도 상어 떼가 고기 잔해에 덤벼들었다. 그러나 노인은 상어 떼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키 잡는 일에만 집중했다. (120〜121쪽)
작가는 노인에게 사자 꿈을 꾸게 한다. 사자 꿈을 꾼다는 건 상상하고, 멀리 보고, 희망을 품고 산다는 뜻이다. 소설은 불운을 말하지만, 실제론 희망을 말하고 있다.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때 사람들은 일을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소신대로 사는 인물을 그려 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소설은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헤밍웨이는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일까를 산티아고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산티아고가 사자 꿈을 세 번 꾸는 게 인상 깊다. 특히 인상 깊은 건 상어 떼에게 패배한 후 꾸는 꿈이다. 꿈을 꾸는 건 자신의 수고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그걸 신뢰할 정도로 삶을 멀리 보기 때문이리라.
1)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김욱동 역. 민음사, 2012,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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