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로잔너머 심포지엄 3차 –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에서 발표한

박다혜님의 발제문을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였습니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라고 묻는 것에서 시작하기1)2)

박다혜 변호사3)

1. 들어가며

저는 85년생 11년차 변호사입니다. 굳이 숫자로 제 소개를 시작하는 이유는, 소위 ‘청년‘으로서의 어떠한 지표나 정체성을 제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밀레니얼 세대(M세대)의 끝자락에 걸쳐있기는 하지만, 저의 가치와 지향과 별개로 제가 가지고 있거나 저를 둘러싼 생애경험을 고려한다면 흔히 한국사회에서 ‘청년’이라는 세대로 일컬어지는 의미와 맥락을 갖고 저 스스로를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4) 아울러 이번 심포지엄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이 청년이라는 ‘세대’를 호명하는 맥락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1974년 로잔언약의 선포 당시 혹은 그 가까운 시기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을 청년으로 통칭하며 이들이 로잔정신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며 본 발제를 준비했습니다.

발제에 필요한 범위에서 제 소개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대학과 일반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법학전문대학원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국회, 환경단체, 노동조합 법률원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소송과 자문, 연구, 입법, 교육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환경, 정당정치, 복지국가, 불평등 등의 의제에 관심이 많고 노동운동과 노동안전보건운동에 활동으로 직접 참여하고 있으며 여성운동과 기후위기운동에 애정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지난 2차 심포지엄(8. 29.) 발제문에서 구교형 이사장께서는 ‘86형 복음주의 세대’의 공동의 목표가 독재와 재벌 반대였다고 하셨는데5) 저는 민주주의, 국가폭력, 자본주의, 불평등 등의 문제를 여전한 ‘오늘날의 과제’로서 껴안고 씨름하면서, 동시에 젠더, 차별, 기후위기와 같은 의제 역시 ‘나의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건강한 노동을 하며 널리 이웃과 함께 존엄한 시민으로 사는 삶을 꿈꾸는,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변호사입니다.

어린 시절 보수적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캠퍼스 선교단체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신나게 신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분명하고 구체적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다른 운동에 비한다면 교회나 교계, 복음주의 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등에 대한 일종의 소속감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입니다. “(아직도) 교회를 다니냐”며 저를 낯설고 신기해하는 질문을 교회 안팎에서 자주 받아 왔습니다. 한번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교회가 제 고민이자 숙제라고 느낀 적도 많았습니다.

2. 로잔정신의 무엇에, 어떻게 공감하는가

이런 제가 이 자리에 섭외될 때 좀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로잔운동에 대한 공감이라니, 새삼스럽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일찍이 대학 시절 출석하던 교회에서 로잔언약의 내용을 설교를 통해 배워 알고 있었고, 로잔언약과 마닐라 선언, 케이프타운 서약이 모두 등장하는 교리신조를 공동체의 신앙 고백으로 하는 교회에 현재 출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앎과 경험은 제게 분명 어떠한 유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교회에서 배운 ‘복음의 총체성’을 실천하고자 어떠한 삶의 경로를 거쳐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 교회는 해외선교를 강조하며 제게 의대 진학을 강하게 권면했고, 제가 기억하는 한 제가 활동한 캠퍼스 선교단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교사로 헌신케하는 것에 집중했을 뿐 사회참여나 사회선교에 대해 언급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정치학을 공부하며 접한 르완다 학살과 같은 분쟁지역 문제, 제3세계 국가들에서의 빈곤과 착취, 전 세계 만연한 불평등과 차별 등에 대한 깊은 고민, 당시 ‘장로’ 대통령의 통치행위와 범죄로 인해 위협받는 민주주의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한탄과 기도가 공명될 공간이 없었습니다. 신우회 등의 모임도 꾸준히 시도했지만 성적과 시험합격 같은 사적 성취를 여럿이 모인 공적인 자리에서 기도제목으로 내놓는 자리에는 좀처럼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시절 제가 공동체라고 부르던 교회나 선교단체의 지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함께 모여 열정적으로 예배하는 기쁨을 배웠지만, 아쉽게도 어디에서도 세상 한 복판에서 같은 뜻을 품는 이, 동지(同志)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어떻게 복음이 나와 이웃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지,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는6) 나의 노동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조금이나마 실천할 것인지와 같은 고민이 가득했지만, 정작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부르던 이들과 그것을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교회 밖에서 저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서야 복음주의 운동 등 교계의 여러, 그러나 작은, 결코 다수는 아닌 활동을 알고 반가워했을 뿐7), 제가 주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은 교회 밖에 있습니다, 지난 심포지엄에서 백소영 교수께서 본인이 ‘복음주의 진영의 딸’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저는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자랐지만 복음주의 진영은 커녕 교회의 딸도 아닙니다(저 스스로 뿐만 아니라 저를 그렇게 보시는 분도 없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공공성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그 관심이 보다 구체화되었습니다. 지금의 저와 저의 예배를 이루는 내용은 교회가 흔히 ‘세상’이라 부르는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책, ‘믿지 않는 이들’로 가득한 크고 작은 공동체, 투쟁하는 이들로부터 배운 사랑과 연대의 경험, 공부하는 이들이 쌓아 올린 지적 성취에 빚진 것입니다. 그 덕분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땅의 곳곳에 반영되도록 애쓰는 길 위에 서고 싶다고 감히 꿈꿀 수 있었습니다.8)

이는 하나님 앞에서 한 걸음 두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가며 써 내려간 저의 서사로서, 어떻게 보면 교회는 대부분 무관했습니다. 보셨다시피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동시에 저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성령님께서 인도하셨음을 고백하려 합니다. 보수적인 신앙교육을 받고 협소한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렇게 이어졌는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주님의 신비가 존재했음을 압니다.9) 캠퍼스 시절 거의 매일 모여 열방을 향해 열정적으로 부르짖었던 기도는 오늘날 현장에서의 생생한 부르짖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앙과 삶은 불화하지 않았고 제가 믿는 것은 자연스럽게 저의 공부, 일, 활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물론 그 과정에는 고민과 버팀으로 지난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복음의 총체성’이나 ‘하나님의 선교’ 등의 개념을 잘 알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자연스럽게 복음을 총체적으로 인지함으로써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구하며 예배하여 왔습니다.10) 재판을 준비하며 조용히 책상에 앉아 밤을 새워 법원에 제출할 서면을 써내려가는 시간을 통해 그 어느 순간보다 간절하고 실제적으로 이웃들의 삶을 헤아립니다. 누군가를 저주하기도 하고, 주께 탄원하기도 합니다. 세세한 기도와 찬양으로 올려 드리기도 합니다. 여러 일터와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분투하며, 때로는 사건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온갖 책과 논문과 보고서를 뒤지며 근거와 논리를 찾아 헤매는 순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진실된 예배이자 선교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지지받는 안정감 속에서 노동의 과정과 열매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고백하면 제가 꽤 단단하고 의연한 사람 같지만 자주 그렇지 못합니다. 추운 겨울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농촌이주여성의 노동을 추적하며, 재벌기업에서 노조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경찰까지 동원되어 온 가족이 사찰을 당했던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회가 운영하는 복지시설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산재가 은폐되고 장시간·야간노동이 헐값으로 후려쳐지는 것을 보며, 심지어 법원 판결조차 소용없는 뻔뻔한 기업들과 철옹성 같은 공권력 앞에서 수없이 무너지는 이들을 계속 마주하며, 자주 분노하고 한탄합니다. 우리의 노동과 애씀이 한없이 헛되게 느껴질 때면 온종일 찬양을 들으며 침잠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게다가 수고하고 애쓴 소송에서 패소해 내 이웃이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거나 정당한 대우를 쟁취하지 못할 때, 법원이 일터에서 죽은 이들을 외면하고 ‘목숨값’을 한없이 가벼이 볼 때와 같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은 ‘때’를 만나면 심히 낙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좌절하지 않고 넘어진 사람들을 돌보고 다음을 도모하는 멋진 동지들을 보며, 일터에서 공동체를 꾸리며 이윤보다 일하는 사람의 몸과 삶을 기준으로 변화를 일구는 빛나는 이들 덕에, 마음을 추스르고 무릎을 일으켜 세웁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말씀들을 떠올리며,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한 자락을 조금이나마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는 때때로 실패해도 그 중심에 자리한 사랑을 보시고 이를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 끝내 승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성경이 보여 주는 인간의 노동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는 노동이 창조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각기 다른 소명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우리의 노동하는 삶 전체가 사역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케이프타운 서약 2부 행동요청 A항).

복음이 상황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고, 이면의 불의한 세계관과 체제에 도전하고 이를 변혁하지 않는다면, 악한 날이 올 때에 그리스도인의 충성은 헌신짝처럼 버려질 것이고, 사람들은 거듭나기 전의 충성이나 행위들로 되돌아갈 것이다(케이프타운 서약 2부 행동요청 B항).

구체적인 맥락과 결은 조금씩 달리 하지만 로잔언약과 이를 계승한 각 서약이 보여주는 로잔정신은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이 상황에 뿌리 내리라고, 교회 담벼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우를 범하지 말고 세상에 들어가 사랑하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저는 로잔정신에 공감하고 이를 계승하려 애쓰는 삶을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저는 이 자리가 “2024 로잔대회가 담아내야 할 ‘총체적 복음의 이슈’와 한국교회가 로잔정신을 영적, 신학적 자양분으로 삼아 실천해야할 과제들”을 고민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주되게는 오랫동안 복음주의 운동을 하며 그 실천을 돌아볼 수 있는 경험과 책임이 있는 분들의 몫이겠습니다만, ‘세상의 딸’인 저로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를 묻는 것에서 그 고민을 시작해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자리는 어디에 위치하고 있냐는 것이지요.

세상의 이웃, 특히 작고 약한 이들을 사랑하다 보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질서를 만나게 됩니다. 함께 저항하는 동지들도 만나게 됩니다. 공공성과 운동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몫을 두고 지금까지 제가 찾은 답입니다. 변호사로서 입법활동을 하고 환경운동에 관여하고 지금처럼 노동운동에 참여하는 시간, 그리고 이제 법률원을 나와 내년부터 새롭게 움직이려 하는 시간은 그 답을 구체화하는 과정입니다. 법정에서의 언어와 운동의 언어처럼 서로 다른 상황에서 각각의 언어를 쓰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은 실천에 유리한 지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의 몫과 과정은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복음의 우산 안에서 가능한 정체성, 가능한 서사가 단 하나가 아니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다른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언어, 이중언어를 쓰는 것을 널리 상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죽음은 무의미한 통계숫자처럼 일상화되어서 아무런 충격이나 반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고 이 사회는 본래부터 저러해서, 저러한 것이 이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죽음조차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나와 내 자식이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평온에 감사할 뿐, 인간은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해간다. (중략)

이윤의 추구는 기업의 본래 그러한 모습이고, 모든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된다고 하지만 인간은 비록 밥줄이 시장에 얽매여 있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산다. 경쟁과 이윤추구, 비용절감이 시장의 진리라고 들이대는 사람들도 있는데, 시장은 시장의 작동방식이 빚어내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해결하지 못하는 까닭은 시장은 그 문제를 시장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인류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11)

우리에게는 세상 곳곳의 깨어짐과 숱한 움직임을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곁에 서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깨지고 상한 세상’이라는 것이 나와 이웃이 당면한 현실로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고개 돌리고 거리를 두는 핑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보다 더 교묘한 방식으로 더 큰 불평등을 양산하는 불로소득 자본주의12)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화답이 침묵, 무관심, 중립을 지킨다는 핑계로 그에 공모하는 것은 아닌지 아프게 돌아봅니다. 오늘도 7명 이상의 노동자는 일터로 출근했다가 생을 잃었을 것인데,13) 우리의 자리가 이윤추구와 시장의 논리로 다져진 매끈하고 평온한 길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리에 눈을 떴다고 하는 이들이 세상이 깨지고 상한 곳임을 인지했다면서도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 예배하고 말씀 묵상하고 주변 사람들을 친절히 대하며 교회로 초대하고, 나머지 각자 일상은 ‘깨지고 상한’ 그 질서와 크게 다르지 않게, 혹은 그에 복무하며 산다?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나라를 꿈꾼다는 사람들이라면서, 우리의 ‘복음’이 어쩌다 그렇게 귀결되는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소위 믿음의 공동체에 갇히거나 안주하지 말고 세상에서(도) 동지와 공동체를 찾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나아가면 그곳에도 함께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주께서 예비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과 손·발이 교회나 선교단체, 가령 이런 자리나 성서한국 대회에 모이는 단체들 같은 정도에만 한정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문 밖으로 나가 그곳에 참여하든 베껴와서 교회나 복음주의 운동 안에 변주하여 이식하든 말이지요. 다양한 옷을 입고 다른 언어를 쓰며 세상의 역사 속에서, 오늘의 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을 함께 목격하고 예배하는 동지들이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끝)

 


1) 본 발제문은 ‘로잔너머’ 연속심포지엄을 위해 모인 제한된 범위의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개인적 고백임을 밝힙니다.

2) 발제문의 제목은 벨 훅스,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2023에서 영감을 받아 가져왔습니다.

3) 민주노총 법률원(금속노조 법률원), 법무법인 여는 소속

4)저는 ‘청년‘이라는 집단이 동질적이지 않다는 평가에 동의하며, 소득, 재산, 학력, 성별, 지역, 직업 등을 배제한 채 세대라는 분류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사유하는 대부분의 세대담론을 거부합니다. 이와 같은 취지의 분석은 신진욱, 그런 세대는 없다, 2022, 제1장과 제2장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5) 복음과 상황 2021년 1월호에 실린 이강일 목사의 글(사이더도 바꾼 복음주의, 우리는 어떻게 할까)에서도 ‘우리 때’ 복음주의 운동을 동일한 취지로 평가합니다.

6시편 127:1

7) 몇 년 전부터 복음과 상황을 구독하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교계 내 여러 활동을 그제서야 인지하게 되었고, 여러 투쟁 현장에서 스치듯 마주친 소수의 예배가 누군가의 활동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서한국 대회는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올해에서야 처음 혼자 참여해봤습니다. ‘활동가’라는 용어를 그쪽(?)에서도 쓴다는 사실과 스스로를 활동가라 칭하든 직업인이라 여기든 이런 활동을 하는 이들이 이만큼이나마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8) 복음과 상황 2023년 6월호에 실린 제 글(신학하는 마음, 다행의 마음)의 일부를 수정하여 가져왔습니다.

9)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신앙교육과 신앙생활 등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의미없는 가정에 불과합니다만,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저는 분명 다른 교회, 다른 캠퍼스 선교단체를 선택할 것입니다.

10)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총체적이지 않은 복음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도무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1) 김훈, 빛과 어둠 –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부쳐, 노동과세계, 2019. 9. 25.

12) 윌 스트런지 외, 오버타임, 2021, 12, 13쪽

13) 고용노동부, 2022년 산업재해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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