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로잔너머 심포지엄 3차 – 로잔운동과 청년의 공감>에서 발표한

김서진님의 발제문을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였습니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김서진 방송작가

1. 들어가며

로잔너머 심포지움 발제를 맡아보겠냐는 제안에 당연하게도 쉽게 승낙하지 못했다. 복음주의, 전도, 사회참여 등 나에게 로잔은 키워드로만 둥둥 떠서 유영하는 어떤 것이었고, 올해서야 처음 들여다본 수준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섰다. 얕은 이해이지만, 아직까지는 여성 청년들이 들여다보고 참여해볼만한 의미의 운동이라고 판단했다.1) 또한, 여성 청년의 이야기가 개신교 어느 한 곳에서라도 울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로잔의 이름으로 모였으니 작은 이의 이야기도 담론이 될 수 있고, 닿을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밑바탕에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남성 위주의 개신교 내부에서 여전히 자신을 던지며 싸우는 믿음의 여성 선배들에게 화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그들이 지치지 않기를 바라고, 의지를 잃지 말아달라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됐다.

이제 막 로잔을 알아가는, 로잔과 세상과 교회 경계에 서 있는 여성 청년의 정체성을 가지고 발제했다. 한국교회에 성, 차별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곁에 있는 영혼들을 두고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사람의 시선으로 발제했다. 이 자리가 이야기하는 ‘청년’에 엘리트 신학자들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평범한 여성 청년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변화의 첫 걸음임을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2. 여성의 현실2)

예장합동에 속한 본인 교회 대예배는 장로, 남성 안수집사만 대표기도를 한다. 20대 초반 캠퍼스 선교단체 등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교회의 이야기를 접해보니 그제야 이상했다. 이 교단이 남성 목사만 세운다는 것은 알았지만 대예배 기도까지 전부 남성의 몫이라니 새삼스레 불편했다. 목사님께 순수한 마음으로 물어봐도 난처한 대답뿐이었다. 교단의 결정에 따르는 모양이었다. 선교단체 후배의 모교회는 더 이상했다. 여성은 찬양 팀으로 설 때조차도 제약이 많은 교회를 섬기다가 서울로 왔다고 했다. 따끈따끈한 소식도 있다. 매번 예장합동 총회에서는 여성 목회자의 강도권, 안수 허용에 관한 안건이 올라가지만 번번이 무너지는데, 지난 9월에는 총회에서 여성 강도권을 허용했다가 이틀 만에 철회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얼마 전, 페미니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모두 크리스천들이었는데 본인을 제외한 모두가 남성이었다. 질문을 달라고 했을 때 처음 나온 질문은 ‘여성에게 밤길이 진짜로 무서운지’였다. 화는 나지 않았지만 순간 말은 잃었고, 이것이 현실이었다. 자리에 모였던 남성 청년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참여적인 삶을 고민하며, 신앙을 탐구하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적어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일 것이라 믿는다. 알기 때문에 악의 없는 순수한 질문이라고 이해하면서도, 그것은 결국 여성 청년 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그들에게 여성 의제가 ‘여성’만의 의제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여성 의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이유가 ‘아무래도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여성 의제가 남성들의 주요 의제로 여겨지길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까? 여성 의제는 남성과 가정과 교육과 사회구조와, 그렇게 나아가 개인과 연결되어 있고, 때문에 해결되지 못하면 결국 남성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의제가 ‘나의 의제’가 아닐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여타 의제에 대해서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교회 내 여성 청년들이 ‘미래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교회의 주요 자리에 설 수 없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무력감을 갖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어떤 날은 참고, 어떤 날은 수긍하고, 때로는 속으로 분노한다. 왜 여성은 주요 자리에 설 수 없을까. 왜 여성에게는 주로 양육과 봉사에 한정된 사역만을 요구할까. 교회 안의 여성 청년들은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조신한 태도를 취하며 산다. 괜찮아서가 아니라 신앙을 포기할 수 없어서다. 매주 불편해도 매주 분노할 수 없다. 매주 교회를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때마다 분개할 수는 없으니까. 교단과 교회를 떠나라는 조언도 꽤 많이 들었지만, 교단을 옮기고 대안교회를 찾아 떠나는 것이 답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지금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는 사랑하는 지체들이 있다.

어찌저찌 교회를 버텨내고 있지만, 전도의 영역에서는 또 말이 다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넘어서 이 정체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당당하게 초대할 수 있어야 하고 교회는 그 물리적 공간이 되어주어야 하는데, 자랑은커녕 짊어져야 할 십자가다. 만연한 고집과 편견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보니 초대는 고사하고 교회를 다닌다는 게 숨길 거리가 되기도 한다. 나중에 개신교 내부에 남는 청년은, 그 중에서도 여성 청년은 몇이나 될까.

3. 연결되기 위해서는

숨통이 필요하다. 단숨에 교회를 뒤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 그럴 수 없다면 가진 의제를 부담 없이 터놓고 나눌, 함께 변화를 논의하고 지원해 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로잔은 그간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커다란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몇 가지 태도를 지닌다면 로잔이 지금껏 그래왔듯 여전히 복음주의자 여성 청년들에게 공동체가, 공동체를 만날 플랫폼이 되어줄 수 있다고 본다.

1)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흔히들 성도를 하나님의 군사라 한다. 그래서일까, 대화로 시작해도 종종 논쟁이 된다. 논쟁해야 할 때와 받아들여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 때나 신학적 잣대를 들이밀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순간을 종종 마주한다. 일단 다르면 낙인찍고, 그것을 승리라 부른다.

‘우리는 어떤 공통의 신앙 고백을 공유하고 있는가?’ ‘왜 자꾸 갈라지기만 하는가?’에 대해 자주 고민한다. 로잔은 초교파적으로 모인 복음주의자들의 모임이란다. 그런 로잔이 공유하는 커다란 신앙고백이 무엇이며, 정말로 동일한 신앙고백 아래에 있다면 어떤 신학적 견해도 함께 공론장에 올릴 수 있을까?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고, 다르다고 미워하지 않고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로잔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고 싶어 자료를 찾아봐도 손에 딱 잡히지 않았다. 서약문을 읽어보아도 ‘이런 결이겠구나’ 하는 정도로만 느껴질 뿐, 깔끔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웠다. 복음주의자도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곤 하니 로잔도 그렇겠다 하며 ‘맥락’으로 이해했다. 강제성과 처벌로 가득한 법이 아니라 ‘약속’으로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곳이었다. 이것이 이분법에 익숙한 한국교회와 로잔이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래서 아직 기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복음주의권의 여성 청년들은 교회 안팎으로 소외의 두려움에 놓여있다. 여성 청년들에게는 다양한 전제와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는 공론장이 매우 필요하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감각의 개념을 넘어서는, 다른 세계를 끌어안는 일이다. 상대의 배경을 익히고 당사자들과 직접 대면하여 소통하는 일이다. 로잔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런 곳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세상도, 성경도, 로잔도 내러티브로 이해해야 하듯 여성들의 이야기도 내러티브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우리가 같은 신앙고백 아래에 있음을 기억하고, 군사와 재판장이 아닌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2) 시혜적인 태도와 침묵에서 벗어나 여성 의제를 주요 의제로 삼기

이번 예장합동 총회에서 ‘여성 강도권 허용’이 번복되기 전 잠시 허용이 결정되었을 때, 총대들은 “이번 결정이 여성목사 안수와는 관계없다”3)며 선을 그었단다. 기분이 나빴다. 아니나 다를까 강도권 허용마저 번복되었다. 다른 교단은 괜찮을까? 여성안수를 법제화한 예장통합 총회도 남성 목사와 남성 장로에 비해 여성은 턱없이 적은 수준이며4), 여성 총대 할당제를 가장 먼저 도입한 기장조차도 올해 총회에서 여성 총대 비율을 확대해달라는 안건을 기각시켰다.5)

한국교회를 예시로 들었지만 로잔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로잔에 참여하는 여성 비율이 늘고 있다지만 구색 맞추기에 가까운 방안이 칭찬받을 일인지는 모르겠다. ‘제4차 로잔대회 한국준비위원회’에도 온통 남성뿐이다. 여성들이 교육과 봉사와 리더십에 참여하도록 기회의 문을 더 넓게 열자고 외치면서6) 누가 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러다가 “우리는 수치스러운 우리의 피상성과 제자도의 결핍, 그리고 우리의 분열과 사랑의 결핍을 애통해한다.”7) 고 이야기하던 케이프타운 서약 결론의 문장이, 내년 서울대회 문서에도 다시 한 번 더 쓰이는 건 아닌지, 매년 피상성 앞에 무릎 꿇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교회든 로잔이든 이렇게 부분적인 허용과 참여 비율을 늘리는 등의 단순한 방안으로는 진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다. 핵심을 외면하는 것이며 다분히 시혜적인 태도다. 시혜적인 태도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여성을 답답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태도가 ‘침묵’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대다수의 남성에게 여성 의제는 주요 의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견고한 남성 위주의 공동체에서 여성 의제는 대체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소수의 여성들이 언제나 그랬듯 울분을 토하며 바깥에서 이야기해야할까? 여성 의제가 자신의 의제로 여겨지는 남성이 나타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까? 모두가 지금 당장 그런 사람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사회참여와 복음 전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고 총체적인 삶으로 복음을 담아내야 하듯, 여성의제는 다양한 의제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주요 의제로 자연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 남성들이 여성 문제를 ‘내 일이 아니니까’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 일처럼’ 생각하려는 의지와 태도가 필요하다.

3) 자세를 낮춰 다가가기

기성세대에게 로잔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많이 들었다. 나 또한 로잔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의미 있게 여겨진다. 하지만 평범한 젊은이들에게 로잔은 참여의 허들이 꽤나 높은 운동이자 낯선 대회다. 정보량이 부족한 동네 작은 교회의 청년들은 로잔의 존재나 참여하는 방법을 알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로잔정신을 필요로 하고 로잔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잘 닿을 수 있도록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로잔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보다 쉽고 재밌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한다. 사역자, 신학생 중심의 홍보가 아닌, 구석진 동네의 한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로잔이 자발성을 강조하는 운동이라는 것은 알지만 정보과다 시대에 가만히 있어도 필요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고고한 전략은 통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나 설명할 수 있는 쉬운 팸플릿을 만들고, 로고송을 만들고, 프로젝트 팀을 꾸려 직접 영업을 뛰어야 한다. 나 또한 그렇게 이 자리에 서게 되고 로잔에 작은 희망을 걸게 된 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보다 더 낮은 자세로 다가가야 열린다.

큰 교회가 조직적으로 만들어가고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모여 하나의 이어진 운동과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로잔의 원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모을 때다. 로잔이 여느 개신교 모임처럼 ‘그들만의 리그’로 남기 위한 곳이 아니라면.

4. 우리는 진짜 연결되고자 하는가?

사실 진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진짜 연결되고자 하는가? 우리는 진짜 말하는 만큼 살아가고 있을까?

만화가 윤태호의 <미생>이라는 오피스물 작품을 보면, 신사업을 진행시키고자 사업 기획안을 쓰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영업 팀에서 제출한 사업 기획안이 재무 팀을 통과하지 못하고 반려되어 돌아온다.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 작품 내 신입사원은 진짜 사업을 만들지 않고 ‘사업놀이’를 위한 기획안을 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8) 영업 팀은 기획안을 쓰는 시늉만 했을 뿐, 기획안에 담긴 내용이 진짜 ‘일’이 되게끔 만들지 않았다는 거다.

여러 법정 드라마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판사, 검사, 변호사가 사건의 유죄와 무죄를 가려내기 위해 치열하게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 용인되는 지점에서 ‘이정도면 됐다’고 판단할 만큼만 움직여 재판을 빠르게 끝내는 장면이다. 중요한 건 그 사건의 진짜 쟁점을 찾아내고, 제대로 된 해결을 하여 사건에 얽힌 것들을 풀어내는 것일 텐데.

케이프타운 서약 결론에서는 로잔의 여러 활동을 통해 나온 수많은 목소리를 두 가지 주제로 요약하여 제시한다.

■ 급진적인 순종의 제자도가 필요하다. 성숙으로 나아가야 하며, 양적인 성장뿐 아니라 더 깊이 있는 성장을 이뤄야 한다.

■ 십자가 중심의 급진적인 화해가 필요하다. 하나됨으로 나아가야 하며, 믿음과 소망뿐 아니라 사랑 안에서 자라야 한다.9)

2010년 케이프타운 대회 때도 이미 지지부진한 활동들을 고민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그때 고민했던 대로 지금은 진짜 연결되고자 하는 몸부림을 치고 있을까? 안하면 드는 죄책감이 싫어 여전히 흉내만 내며 애통‘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모른다면 방법을 강구하면서, 완벽한 결론이 아닐지라도 일단 행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미생>에서는 삶은 어쩌면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문’을 열어가는 과정이란다.10) 신앙도 그렇고 복음도 그렇다. 우리는 끝없이 문을 열어가는 과정 중에 있다. 망설이기만 한다면 영영 문 너머에 있는 영혼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로잔은 운동이기에, 로잔 정신을 한 사람이 체득하고 온전히 실천해낼 때야 비로소 진정한 지속을 논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의 논의도, 내년 로잔대회에서 문서화될 많은 이야기들도 문장에 갇힌 구호로만 남기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글은 우리의 삶보다 자주 번지르르하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공동체로 부르셨고, 때문에 사람은 실망감 속에서도 여전히 연결될 공동체를 찾는다. 사람과 사람이 늘상 완벽하게 연결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영혼을 향해 기꺼이 내딛자. 우리의 화해가 한 발자국에서 시작될 때 로잔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인 가수 ‘악동뮤지션’의 노래 <물 만난 물고기>의 가사로 마무리해본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예언하듯이 살길 live like the way we sing.’

 


1)상반기부터 알게 된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의 이강일 소장님 덕이 컸는데, 그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청년들의 의견을 대하는 태도가 로잔이 여전히 ‘괜찮은 운동’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2) 개신교 내부의 여성을 말한다.

3) 장창일, 김아영, 유경진, 예장합동 ‘여성 강도사’ 길 열어… 女사역자도 설교한다, 국민일보, 2023.9.21.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22105&code=23111113&cp=nv

4)장창일, [미션 톡!] 해외교회, 여성 지도자 속속 배출하는데… 한국교회는 여전히 ‘유리천장’ 국민일보, 2023.9.21.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23458&code=23111633&cp=nv

5) 나수진, [기장5] 여성총대 비율 확대한 ‘기각’, 뉴스앤조이, 2023.09.20.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5709

6로잔 운동, “케이프타운 서약” (최형근, 역), 2014, IVP, 126쪽.

7) 로잔 운동, “케이프타운 서약” (최형근, 역), 2014, IVP, 130쪽.

8) 윤태호, “미생: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3: 기풍”, 위즈덤하우스, 2012, 146~149쪽.

9) 로잔 운동, “케이프타운 서약” (최형근, 역), 2014, IVP, 129쪽.

10) 윤태호, “미생: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3: 기풍”, 위즈덤하우스, 2012, 234~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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