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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은 엔도 슈사쿠가 투병 중 완성한 생전 마지막 작품이다. 그리고 『침묵』과 함께 자기 무덤에 넣어 달라고 유언한 책이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임을 예감하고 쓴 글에는 이전 것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을까? 어쩌면 작가의 심오한 작품 세계와 그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했던 그의 인생이 망라되어 있을지 모른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엔도 슈사쿠 지음 | 『깊은 강』

민음사 | 2007년 10월 30일 | 341쪽 | 12,000원

 

『깊은 강』은 엔도 슈사쿠가 투병 중 완성한 생전 마지막 작품이다. 그리고 『침묵』과 함께 자기 무덤에 넣어 달라고 유언한 책이다. 자신의 마지막 작품임을 예감하고 쓴 글에는 이전 것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을까? 어쩌면 작가의 심오한 작품 세계와 그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했던 그의 인생이 망라되어 있을지 모른다.

 

침묵의 바다와 깊은 강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엔도 슈사쿠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며, 한 번 만나면 잊기 어려운 문장이다. 그리고 『침묵』 전체에 깔린 배음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일본 에도 시대의 가톨릭 박해를 다룬 『침묵』은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중 가장 큰 절망은 신의 부재다. 그 절망의 이미지는 바다로 표상되는데, 침묵의 바다는 신부와 교인들을 집어삼키는 죽음의 심연이자, 그들의 절규에도 응답하지 않는 신의 형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 『깊은 강』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다’가 떠오르지만 바다와는 다른, ‘깊은 강’은 어떤 의미일까? 작품에서 깊은 강은 일차로 인도의 갠지스강을 의미한다. 힌두교의 성지인 갠지스강은 각자의 결핍과 질문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떠난 여행의 종착지다. 산 자들의 몸을 깨끗이 하고, 죽은 자들의 몸을 수장하는 성스러운 곳, 즉 생과 사가 하나의 심원을 이루는 곳이다.

 

이 강은 ‘인간의 슬픔의 강’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삶과 죽음을 끌어안는 강에는 그 깊은 곳까지 슬픔이 흐른다. 최승호 시인의 「몸」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끙끙 앓는 하나님/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모든 질고를 지고 묵묵히 견디는 절대자, 그는 ‘슬픈 존재’다. 전부를 수용하는 이 궁극적 존재가 작가가 생각한 ‘신’일지도 모르겠다.

 

인간과 바다 사이의 단절은 이제 무너진다. 절망과 죽음의 바다는 이제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품는 강으로 ‘역류’한다. “갠지스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1)를 생각합니다. …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깊은 강』 표지, ⓒ민음사

 

강으로 향하는 십자가

 

이 강에는 신학교에서 쫓겨난 신부 오쓰가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그는 일본에서 프랑스로 유학 간 신학생이었다. 그러나 종교와 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신학교의 가르침과 달랐기 때문에 마찰을 겪는다.

 

“유럽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명석하고 논리적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바로 너무나 명석하고 너무나 논리적인 탓에 동양인인 내게는 뭔가가 간과되는 듯해서 뒤쫓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명석한 논리나 재단식 결론은 제게 고통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이렇게 ‘서양’ 기독교와 불화한 오쓰는 갠지스강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아웃 카스트(불가촉천민)들의 시체를 강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장례를 치러 줄 사람 없이 객사한 사람들, 갠지스강에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존재들을 “십자가를 지듯 지고, 이 강까지 날라 온다.”

 

오쓰는 버려진 자들과 깊은 강을 연결하고 있다. 소외된 자와 신을 잇는 존재, 기독교 맥락에서 그 존재는 바로 그리스도다. “양파가 이 마을에 들르신다면, 그이야말로 길가에 쓰러진 자를 등에 업고 화장터로 가셨을 겁니다. 마치 살아 있을 때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었듯이.”

 

버려진 자, 오쓰, 깊은 강. 셋의 연결 속에서 비참과 슬픔이 총화를 이룬다. 엔도 슈사쿠가 끝내 그려 낸 것은 이 초라하고 장엄한 연결이다.

 


1) 여기서 양파는 신을 말한다. “그 단어[신]가 싫다면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토마토건 양파건 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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