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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는, 사건의 형성이나 대상의 구성과 관련해서 주로 주체 또는 자아의 일인칭 개입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사건과 인식의 핵심이 구조와 구조 내에 속한 것들의 관계에서 비롯한다는 사유다. 이 사조는 철학적으로 볼 때,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크게 성장했으며,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부터 문화 현상에 대한 분석,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실천으로까지 그 영향을 확장했다. (본문 중)

 

김동규1)

 

구조주의는, 사건의 형성이나 대상의 구성과 관련해서 주로 주체 또는 자아의 일인칭 개입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사건과 인식의 핵심이 구조와 구조 내에 속한 것들의 관계에서 비롯한다는 사유다. 이 사조는 철학적으로 볼 때,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크게 성장했으며,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부터 문화 현상에 대한 분석,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실천으로까지 그 영향을 확장했다.

 

가장 기본적으로, 구조주의에서는 언어나 사회-문화적 현상에서 나타나는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에 대응하는 의미가 있다거나 그 사건을 일으킨 기계론적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보다는 모든 현상과 사건은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구조적 장에서 파생된 하나의 사태들이라고 보는 것이 구조주의의 기본 관점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선조처럼 여겨지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하면, 세계의 실재들과 인간의 언어 사이에는 언어의 지시 대상과 발화된 말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는다. 즉, 인간이 ‘강아지’를 발화할 때, 그렇게 발화된 말은 강아지 자체의 특성이나 의미를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은 특정한 기표들 간의 관계에서 우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우발적으로 개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것이다. 즉, 강아지라는 단어는 현실의 강아지의 어떤 특징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기표들의 배치, 즉 망아지, 송아지와 같은 기표들과의 차이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게 된 말이다.

 

소쉬르의 언어를 사용하자면, 우리는 언어에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을 구별해야 한다. 전자가 언어의 추상적 형식을 일컫는다면, 후자는 일상에서 실제로 발화되는 말을 의미한다. 여기서 소쉬르는 전자에 언어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보면서, 위에서 언급한 기표들의 관계가 먼저 있고, 그 관계에서 파생된 기호의 의미, 즉 기의가 있게 된다고 보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의미는 기호들이 서로 대립하고 구별되는 차이를 기반으로 형성되는데, 이 입장을 따르자면, 현실 세계의 대상들은 언어적 의미를 선험적으로 내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언어도 신비롭게 대상과의 대응을 성취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조주의의 중요한 특성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 주체나 사건 안에는 그 어떤 의미의 원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의미는 기호들의 놀이의 임의적 파생 효과이며, 이 기호들이 우연적으로 마주치는 사태를 분석해 보니, 우리는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적인 구조의 체계 아래서만 의미의 놀이를 하고 있더라는 것이 구조주의의 가르침이다. 요컨대 언어는 “기호들의 닫힌집합”이고, 이러한 닫힌 기호들의 연쇄는 인간의 의도나 문맥이 아니라 “문법, 음소, 통사론 규칙이라는 체계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언어는 언어 자체의 고유한 자율적 조직체에서 그 의미를 도출하고, 이것이 또한 의사소통 기능을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Allison 1999, 883).

 

그렇다면 이런 언어학적 사고가 과연 철학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인류학 연구에서 한 획을 그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인류학적 탐구에 이런 구조주의적 사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인간 사회, 부족 사회의 어떤 문화적 특징을 인간이나 집단의 선택이나 자유, 의지의 결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특정 부족이나 민족의 문화나 사회적 실천은, 해당 부족과 민족의 결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법칙이 작동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널리 회자되는 예가 바로 근친혼의 금지다. 우리는 흔히 서구화된 현대의 문명에서 근친혼 금지가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객관적 결론에 이르게 되어 그러한 금지 법규를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구 유럽 문명만이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미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보편적 문화 규범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러한 근친혼 금지와 같은 사회적 규례는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어떤 법칙을 따라 얻어진 것이지, 생물학적이거나 진화론적, 또는 도덕적 결론이 아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친족은 하나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그 구조 안에는 아버지, 아들, 형제, 자매라는 네 항목이 있다. 그런데 만일 여기서 친족 내 여성을 아내로 삼게 되면, 이것은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여성은 다른 부족에게 답례로 제공되어야 할 일종의 선물이자 상호성 아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딸이나 누이에 해당하는 여성을 다른 집안에 제공하고, 또 다른 집안의 딸이나 누이를 내 집안에 맞이함으로써 상호적, 또는 호혜적 관계가 집단끼리 형성되고 화목이나 평화가 생성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상호적 관계, 바로 주고받음의 원칙을 통한 공존을 위해 근친혼을 금지하는 것이지, 다른 생물학적,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근친상간을 막는 것이 아니다. 혹자는 물을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생물학적, 유전적, 또는 도덕적 이유로 근친상간을 금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그러한 이유는 근친혼 금지를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이유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근친혼이 사회적 관계, 부족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런 근친혼 규칙을 사전에 생각해 내서 마련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법칙을 받아들인 문화 속에 산다.

 

앞서 우리는, 소쉬르에게 언어적 의미는 기표들의 차이와 대립이라는 일종의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이러한 차이와 대립을 이루는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호들의 작용이 곧 언어의 의미와 문화를 형성한다. 이와 유사하게 레비-스트로스는, 민족이나 부족, 한 집안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집안 간, 부족 간 대립과 구별 아래서 일종의 집단이나 인간 사이의 균형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법칙이 하나의 문화와 금기로 나타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구조주의라는 명칭을 부여받을 만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이나 집단의 주체성을 살피기보다는 그들 안에 내재한 불변하는 관계의 특성을 고찰해야, 인간 군상이나 집단의 문화 현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삶의 여러 사건[출생, 입사(initiation) 의례, 결혼, 계약, 죽음 또는 상속] 속에서 연루된 사람들(신입 회원, 중개자, 증여자)의 수와 배역이 아무리 임의적이더라도, 이전 활동들은 언제나 더 적은 수의 활동과 집단 또는 사람으로 환원될 수 있다. 결국 남는 것은 주어진 사회의 유형에 따라 다채롭게 구상되고 다양하게 실현된 균형(équilbre)의 기본 항들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유형은 이러한 내재적 특성에 의해 정의되고 서로 비교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특성은 이제 어떤 질적 차원이 아니라 어느 사회 유형에서든 일정하게 유지되는 요소들의 수와 조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Lévi-strauss 2023, xxxiii-xxxiv[52-53])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 현상의 질적 차원이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정 영역의 요소를 찾고, 그 요소들이 어떻게 대립하고 구별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신화소나 요리소 같은 것(레비-스트로스가 신화나 요리의 기본 요소를 일컫는 말-편집자 주)이 그 예다. 요리소에는 날 것, 익힌 것, 신선한 것, 썩힌 것, 마른 것, 축축한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요리 행위는 아무리 창조적이라고 해도 바로 이러한 요소들 위에서만 움직인다. 요리 행위의 본질적 법칙에 대한 파악은, 요리의 질적 특성이 아니라, 바로 이런 요소들의 분류와 분류된 것들의 대립 및 차이에서 찾아져야 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이러한 사유가 철학적으로 더 큰 호소력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장-폴 사르트르에게 행한 비판 덕분이다. 사르트르는 프랑스의 데카르트주의 전통을 이어받아 의식적 주체와 인간 실존의 세계 내에서의 선택을 강조한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반드시 인간중심주의적 결론에 이르게 되며, 사회와 문화에 내재한 본질적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특성에만 주목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한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모든 문화나 역사의 추동력을 인간에게서 찾고자 하는 시도에 저항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사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가 탐구를 위한 이성을 분석적으로만 사용할 뿐, 역사 속에서 변증법적으로 기획하는 이성의 운동에 무관심하다고 보았다. 그 점에서 사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는 게으른 심미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오히려 그 말을 긍정해 버린다.

 

심미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람을 마치 개미와 같은 존재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르트르가 이 말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태도는 불가지론의 입장에 설 때 모든 학자들이 취하는 태도라고도 볼 수 있으며, 또 그다지 위험한 태도인 것도 아니다. … 그러므로 나는 인간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심미주의자라고 불리기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Lévi-Strauss 1962, 326[354])

 

즉, 구조주의는 인간 역시 무의식적 구조의 법칙 아래 있으므로, 인간을 역사의 주체라거나 변혁의 주체로 성급하게 상정하는 시도를 거부한다. 이 점에서 푸코 역시 구조주의를 인간을 해체하는 동시대적 징후, 한 시대의 인식론적 층위로서의 에피스테메2)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긍정한다. 구조주의를 기반으로 삼는 “민족학은 인간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 개념을 거쳐 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과 민족학은 언제나 인간의 외부 한계인 것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민족학에 관해 말한 것은 정신분석학과 민족학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즉, 정신분석학과 민족학은 인간을 해체한다고 말할 수 있다”(Foucault 1966, 390-91[516]).

 

레비-스트로스가 밝힌 것처럼, 또한 푸코가 인정한 것처럼, 구조주의가 철학적으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지점은 인간의 해체, 곧 반인간주의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반인간주의는 인간이 더는 없다거나 인간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나 일인칭적 관점에서 자유롭게 결단하고 세계를 생성해 내거나 변혁하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좋건 싫건, 더 정확하게는 무의식적 수준에서, 구조 속에서 생성된 의미를 담지하고 있고, 바로 그런 식으로 형성된 의식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은 주체로서 세계를 구성해 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구조의 체계를 따라 임의적으로 형성된 문화와 기호, 사건 속에서 행위 해 왔다. 그것이 일인칭적 관점에서 자유로운 행위와 의식의 실현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인간은 모든 것을 주도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어떤 체계나 그 체계에서 파생된 담론으로부터 형성된 사유의 공간 안에서 일하는 존재다.

 

이런 통찰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인간에 대한 개념을 재정의해야 할 자리에 선다. 인간은 더는 자신의 자유와 능력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자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만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이성이나 의지, 마음의 작용을 고찰하기보다, 인간의 지위나 위치를 알려주는 문화적 구조와 담론의 체계를 분석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보편적 법칙이 발견된다면, 인간은 그 보편적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자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실제적인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조금 실천적인 차원에서 이해해 보자. 사실 이성이나 의지를 중심으로 인간 주체의 본질을 파헤치고 인간에게 절대적 지위를 부과하는 것은, 전형적인 서구적 사고의 일환이다. 우리는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이나, 그 이성을 사회-문화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발휘하는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인간 주체에 대한 정설처럼 막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레비-스트로스의 민족학적, 인류학적 분석에 의하면, 서구만이 아니라 서구인들이 미개 사회라고 부르는 부족이나 민족 사회에도, 그 자체로 합리적이라고 할 만한 호혜적 관계에 입각한 문화나 사회적 규약이 발견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발견은 그 자체로 서구의 식민주의적 사고나 서구 중심주의적 사고에 도전하는 함의를 가진다. 왜냐하면, 문화 간 차이는 문명의 진보를 따라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회의 무의식적 구조를 따라 형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와중에 동과 서, 또는 유럽과 남미 등지를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할 수도 있고, 양자 간 고유한 차이를 보여 주는 문화를 발견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차이는 이성적 진보의 차이가 아니라, 체계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는 기호들의 작용에서 비롯한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차이다. 고유한 문화적 질서 안에서 고유한 문화적 법칙이 각 사회에 존재할 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미개인(혹은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의 세계는 주로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최근까지 미개인 세계와 우리들 세계 사이의 변별성이라고 착각해 온 것에 대해 부정적 평가가 내려져 온 것일 뿐이다. 마치 두 세계 간의 차이가 미개인의 정신적, 기술적 열등함에 대한 설명까지 포함한다고 믿은 것이다. … 미개인이 그들 세계를 개념화하는 방법은, 통일성을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불연속적 복잡성을 기본 구조로 삼는 대상을 대할 때 반드시 요구되는 방법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논리적 심성과 전논리적 심성 사이에 정립된 사실무근의 이율배반도 이것으로 단번에 극복되었다. 야생의 사고는 우리의 사고와 같은 의미에서,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논리적이다. (Lévi-Strauss 1962, 354-55[380-81])

 

문화적 현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분명히 소위 미개인이라고 (잘못) 불리는 이들의 집단 문화에도 그 자체로 정합적인 논리가 있다는 것, 이것이 구조주의의 대표적 사상가 레비-스트로스가 밝혀내고자 했던 사실이다. 자칫 서구 중심주의에 함몰되어 진보한 문명과 퇴보한 문명 사이를 구별하려 하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스스로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도 과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문화적 양식의 본질적 의미를 하나하나 밝혀냄으로써 그러한 도전을 감행한 것이 바로 구조주의의 성과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이 구조주의 역시 인간과 역사성에 대한 지나친 도외시로 인해 비판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포스트-구조주의가 싹을 틔우는 지점이기도 하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2) 한 시대나 문화에서 지식의 기본 구조와 조건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인식론적 체계를 일컫는 푸코의 용어(편집자 주).

 

참고문헌

 

Allison, David (1999). “Structuralism.” In The Cambridge Dictionary of Philosophy. Second Edition. Edited by Robert Audi, 882-228. London and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Lévi-Strauss, Claude (1950). “Introduction à l’œuvre de Marcel Mauss.” In Marcel Mauss, Sociologie et anthropolog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68. 국역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박정호·박세진 옮김. 서울: 파이돈, 2023.

Lévi-Strauss, Claude (1962). La Penseés sauvage. Paris: Librairie Plon. 국역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정남 옮김. 서울: 한길사, 1999.

Foucault, Michel (1966). Les mots et les choses. Paris: Éditions Gallimard. 국역본: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서울: 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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