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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이 이번 교리 선언문에서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을 허용하면서 밝힌 신학적 핵심 근거는, 인간이 아직 죄인일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같은 난제에 대해, “사목적 자비는 주관적 죄책성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에 의해 과실이나 책임이 완화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라고 답변했다. (본문 중)
구자창(국민일보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12월 18일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이라는 제목의 교리 선언문을 통해 동성(Homosexual) 커플에 대한 사제의 축복을 허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기에는 이번 교리 선언을 ‘동성 간 결혼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된다는 엄격한 단서가 달렸다.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교리 선언문 서두에서 “이 선언은 혼인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 교리를 확고히 견지하며,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어떤 종류의 전례 예식이나, 전례 예식과 비슷한 축복도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해석의 한계를 정했다. 가톨릭의 7성사 중 하나인 ‘혼인 성사’는 여전히 한 남자와 한 여자 간에만 이뤄질 수 있는 성례라고 못 박은 것이다. 이 점에서 가톨릭이 동성 간 결혼을 수용하기로 했다거나, 동성애를 죄로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해석은 분명한 오해로 보인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보도자료 및 바티칸 교황청이 발표한 영어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선언의 의미는 ① 동성 커플을 축복할 수 있지만, 그들의 ‘결합’을 축복할 순 없다. ② 이때의 축복은 예배나 성사에서 이뤄지는 ‘공식 전례 상’ 축복이 아니라, ‘사목적’(司牧的, pastoral) 축복이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보도자료에서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을(그들의 결합이 아닌) 대상으로 하는 (전례적이지 않고 예식화 되지도 않은) 짧고 단순한 사목적 축복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으며, 이는 전례 형식을 띠지 않고, 이 사람들이 놓인 상황을 승인하지도 정당화하지도 않는 축복임을 강조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사목’이라는 가톨릭 용어는 개신교의 ‘목회’에 해당하는 단어다. 그러므로 ‘사목적 축복’은 비공식적이지만 목회 상 필요에 따라 하는 성직자의 축복 행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교리 선언문의 발단은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교황청은 지난 2021년 2월 22일, “동성 결합의 축복에 관한 의혹(Dubium)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A4용지 2장 분량의 답변서를 낸 적이 있다. ‘교회는 동성 커플에게 축복을 내릴 권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부정적이다’(Negative)라고 답변하면서,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 문서였다. 그러나 가톨릭은 이후 이 문서로 인해 심각한 내부 진통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에서 신학적인 문제 제기가 빗발치자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전문가 자문과 회의를 거친 뒤 프란치스코 교황의 승인을 받아 A4 13매 분량의 교리 선언문을 냈다. 교리 선언문은 교황이 직접 쓰지 않은 바티칸 교황청의 문서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권위를 가진 문서다(시사IN, “교황청 ‘동성 커플 축복’ 허용, 한국 교계도 바뀔까” 참조) 이는 교황청이 이번 교리 선언문을 통해 오래 묵은 동성 커플 축복에 대한 논란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 했다는 의미다.
흥미로운 건 교황청이 앞선 답변서에서 이미, “이번 답변은 하느님의 계획에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개인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는 점이다. 동성 간 결합은 허용하지 않되, 동성애자 개인과 동성 커플에 대한 사목적(목회적) 접근은 이어가려는 고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교황청은 답변서에서 “동성 간 결합처럼 혼인 밖에서 성행위를 수반하는 관계에 축복을 부여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면서도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사목자들은 동성애 성향을 가진 이들을 존중하고 민감하게 맞이하도록 부름 받았으며, 교회 가르침에 따라 그들에게 복음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라고 적었다.
교황청이 이번 교리 선언문에서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을 허용하면서 밝힌 신학적 핵심 근거는, 인간이 아직 죄인일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같은 난제에 대해, “사목적 자비는 주관적 죄책성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에 의해 과실이나 책임이 완화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단순히 죄인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라고 답변했다. 교황청은 이와 관련해 “사람들이 축복을 간청할 때 축복을 베풀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철저한 윤리적 분석을 둬선 안 된다”며, “그들에게 윤리적 완전성을 사전에 요구해선 안 된다”라고 설명했다.
교리 선언문 곳곳에는 교황청이 시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흔적이 묻어난다. 교황청은 우선 “축복은 축복의 대상이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표현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할 것을 요구한다”며 “교회는 언제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혼인 안에서 이뤄지는 성관계만을 윤리적으로 합법적이라고 여겨왔다”라고 적었다. 이 같은 전제만 놓고 보면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이 허용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청은 축복을 ‘공식적인 축복’과 ‘비공식적인 축복’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이를 교황청은 ‘전례적 축복’과 ‘사목적 축복’으로 구분한다.) 교황청은 교리 선언문에서 “오직 이러한 관점(축복에 대한 엄격한 접근)으로만 축복의 의미를 축소하는 위험도 피해야 한다”며, “단순한 축복(비공식적 축복)을 위해서도 성사를 받을 때 요구되는 것(공식적 축복)과 똑같은 윤리적 조건을 강요하도록 우리를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융통성을 발휘했다. 교황청은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의 모든 결정과 태도를 관통해야 하는 사목적 자비를 잃지 말고,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배제하기만 하는 심판관이 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권고했다”라고 밝혔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운용의 묘’를 발휘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교황청은 “하느님에게 우리는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죄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문장으로 동성 커플 축복에 대한 입장을 최종 요약했다. 구체적으로는 “죄인(교도소나 재활공동체에 있는 사람들)들이 중대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축복을 받고 있으며, 하늘 아버지가 그들의 선을 원하고 그들이 선을 향해 마침내 마음을 열기 바란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며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조차도 그들이 회복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버릴지라도, 하느님께 그들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이다”라고 적었다.
교황청의 이번 교리 선언문은 한국 교회에도 파급 효과를 미칠 가능성이 크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판자인 동시에 구원자인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교회 내부의 논의는 결코 헛수고가 아닐 것이다. 물론 한국 교회는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져 있어 토론이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동성애 문제에 있어 보수적 입장을 보여 온 대다수 교단이 갑작스레 입장을 선회할 가능성도 낮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필자는 가톨릭이 동성애 문제에 접근한 방식 자체에 대해 주목하는 편이다. ‘동성애는 죄’라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교회가 마주한 도전을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한국 교회 내부에서도 생산적인 논의가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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