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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말하는 직업윤리의 중심 가치는 자아 성화가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의 직업윤리 가르침에서는, 노동을 통한 생산, 수입, 소득 그리고 일의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했다. (본문 중)

 

이동호(목원대학교 강사, 기독교윤리)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자신의 권위 아래 놓고 복종하게 하는 것을 ‘갑질’이라고 한다. ‘갑질’은 직장 등 위계질서 안에서 권위나 권력을 악용하는 현상이었으나, 요즘은 ‘갑질’의 맥락이 사회적 지위에서 돈으로 옮겨 가며, 일상 곳곳에서 돈에 의한 ‘갑질’이 벌어지고 있다. 돈만 있다면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하게 할 정도로, 이 시대에 돈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곧 권력을 얻는 것이요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이라 여긴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자신의 소유(재산, 명예, 권력 등)에 집착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남과 비교하여 자신이 더 우월한 데서 행복을 느끼게 한다. 탐욕,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욕망은, 우리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돈의 지배를 받는 계급주의 사회로 이끌어 나간다.

 

부는 유혹이다. 부 자체는 악이 아니라 유혹이다.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신뢰하려 한다. 그렇기에 부는 우리를 타락으로 인도하는 유혹이다. 물론, 정당한 노동의 대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경제적 성공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유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를 욕심과 탐욕으로 채우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모두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사회 속에서는, 섬김과 나눔의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선망받는 직업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연봉 높은 직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업과 노동의 목적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은 일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일을 통해 얻게 되는 부수적인 결과이다. 직업과 노동은 그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라, 모두의 유익에 기여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 동상 ⓒpxhere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직업은 이웃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루터는 출생과 함께 직업이 결정되던 중세의 신분 제도를 깨뜨리고, 직업을 이웃 봉사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길을 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를 통해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일에는, 거룩한 일과 속된 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직업과 노동의 결과가 이웃을 섬기기 위한 일이라면, 그것이 바로 거룩한 소명을 받은 성직이요 예배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사랑보다 더 큰 예배는 없다”

 

기도, 금식, 율법 준수 등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먼저 우리를 의롭게 만들고, 그 의로움이 우리에게 거룩한 삶의 방향을 가르쳐 준다. 루터에게 있어 직업과 노동이란, 이웃에 대한 섬김이며,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 속에서 드려지는 예배다. 특별히, 루터가 말하는 직업윤리의 중심 가치는 자아 성화가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의 직업윤리 가르침에서는, 노동을 통한 생산, 수입, 소득 그리고 일의 성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했다. 루터는 직업과 노동의 의미를 단순히 인간이 자신을 위해 소득을 취하는 것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소명으로 이해하였고,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유를 허락하신 것이 가난한 이웃들에게 우리의 소유를 나누어 주고 그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재산을 소유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만족과 자기 삶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루터에게 소유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있는 좋은 선물이다. 이 선물은 자신의 생계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도 사용되어야 한다. 루터에게 있어 개인의 사유 재산은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재산이며, 개인은 이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이다. 관리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재산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책임 의식을 가지고 사용해야 한다.

 

넓은 의미에서 부의 과도한 축적은 사회로부터 공공의 물질을 도둑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경제적 평등을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깨트린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부를 내어놓음으로 가난한 자들의 생계를 돌보고, 그렇게 도움받은 자들은 노동을 통해 얻은 물질을 다시 공동체에 내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서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돕고, 그들이 다시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소득을 세금으로 내어놓음으로써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게 하는 것이다. 루터에게 개인의 소유 개념은, 단순히 사유 재산을 인정하여 부의 축적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풍요로움이 공동체를 위한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루터의 섬김을 위한 기독교 경제 윤리, 특히 그의 소유론을 통해, 우리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윤리를 배우게 된다. 또한, 루터의 직업 소명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직업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 짓는 잣대가 되어버렸고, 있는 자는 “갑”이 되고 없는 자는“을”이 된다는 새로운 계급 사회 구조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러한 직업윤리는 직업을 섬김이 아닌 착취와 억압의 수단으로 돌변하게 만들었다. 반면, 루터의 직업윤리 사상의 중심 가치는 이웃을 위한 섬김과 봉사이다. 직업은 단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수단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섬기는 수단이며, 그러한 직업 활동은 곧 예배가 된다. 루터의 직업윤리를 통해 우리는 섬김과 봉사를 다시 배우게 되고,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분 짓는 사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꿈꾸게 되며, 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이동호. 『종교개혁과 디아코니아』. 서로북스. 2023.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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