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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성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고민함과 동시에 구조주의에서 말하듯이 무의식적 체계의 산물로서 인간 문화나 사회적 성취를 받아들일 경우 생겨나는 맹점들에 대한 대안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전개하는 일련의 운동이다. (본문 중)

 

김동규1)

 

앞서 살폈듯이, 구조주의는 인간 사회의 문화나 규약 등이 인간의 결단이나 이성적 인간의 진보의 산물이 아니라, 무의식적 언어 체계를 기반으로 삼아 형성된 것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서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한 근대적 주체성이나 인간 중심주의의 맹점, 사회의 발전을 막연한 이성적 진보의 결실로 보는 편견, 그리고 그러한 진보를 믿는 서구 중심적 이성의 신화를 과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폭로하는 열매를 맺었다.

 

하지만 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이나 접근법을 긍정하더라도 그것의 지나친 탈역사주의나 인간 주체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과도하다고 보는 비판적 문제의식도 함께 생겨났고, 이것이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의 탄생 동력이 된다. 다만 이 용어를 이해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하면서 취해야 할 자세와 비슷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운동은 모더니즘, 곧 근대성이 가진 폐해나 취약성을 비판한다는 취지 아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흐름이나 운동 자체에 무관심한 사상가까지 탈근대성이라는 이름 아래 정렬시키는 무리수를 내포한다. 이에 데리다와 같이 정작 철학자 본인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기를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되어버리는 사태도 생겨났다. 포스트모더니즘 아래 한데 묶이는 경향이 있는 푸코와 데리다는 사실 서로 간에 이루어진 치열한 논쟁에서 보듯이 꽤나 큰 입장의 차이를 보여 준다. 이런 것을 고려할 때, 포스트모던 철학은 하나의 경향성으로만 보는 게 옳다.

 

포스트-구조주의를 논할 때 굳이 이런 경고성 언급을 하는 이유는, 이 사유 운동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일정 부분 공유하는 공통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루이 알튀세르, 질 들뢰즈 등 주로 영어권 학계에서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이 포스트-구조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한다는 점이 일정한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이미 우려한 대로, 매우 다른 사상가들의 사상을 마치 공통적인 것처럼 보게 만들 소지도 안고 있다. 이에 포스트-구조주의 역시 하나의 경향성을 보여 준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이제 그 의미를 밝혀 보자. 사전적으로 구조주의 이후라고 이해될 수 있는 이 용어의 의미를 고려하면,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가 시기적으로 구조주의 이후를 가리킨다는 점을 우선 이해할 수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구조주의가 가진 일정한 문제들을 극복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또한 엿볼 수 있다. 이 맥락에서 게리 거팅의 해명은 구조주의 이후를 꾀하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구조주의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의 비판은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기본 논제를 기반으로 삼는다. (1) 어떤 체계도 구조주의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율적(자기-충족적)일 수 없고, (2) 구조주의 체계의 기반이 되는 이분법적 정의는 그것을 주의 깊게 검토해서 보면 온전히 유지되지 않는 구별을 표현한다”(Gary Gutting 2005: 829).

 

말하자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소위 무의식적 구조를 절대시하지 않으며, 구조를 닫힌 체계로만 보지도 않는다. 또한 체계 안에서의 기호들의 차이와 대립은 단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통속적인 예로, 하나의 체계 안에 남과 여라는 기호가 대립과 차이를 유지한다고 주장한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그러한 이분법적 성별 구조 자체가 맹목적인 것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아울러 여기서 ‘이후’는 단지 구조주의 이후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점도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략 1960년대 이후를 수놓은 포스트-구조주의적 사유의 운동은 시대의 격변을 사유에 반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쇠퇴하거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후를 포스트-구조주의는 자유지상주의자들과는 다르게 사유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이후’는 마르크스주의 이후를 일컫기도 하며, 이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 이후나 인간주의와 반인간주의 이후를 고민해야 하는 과제가 포스트-구조주의의 과제가 되기도 하였다. 정신분석학은 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일견 투명해 보이는 인간 의식이 무의식적 성충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보여 주었는데, 이 경우 인간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무의식적 지배를 받더라도 여전히 어떤 다른 의식적-사회적 동기부여를 받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이 대두된다. 만일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사회나 문화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라고 한다면, 정신분석학의 기본 주장들, 이를테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인격과 문화 형성의 절대적 법칙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 즉,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나 아버지와의 경쟁이 인간 주체가 통과해야 할 의례가 되어버릴 경우 인간은 성충동의 욕망과 욕망의 경제로 환원되는 방식으로만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주체성은 지나치게 성충동의 욕망에 준거한 규범성 아래서만 사고될 소지가 있는데, 과연 이런 규범성 아래 인간을 사유하는 것이 옳은지를 따지는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의 중요한 과제로 급부상한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와 전통 마르크스주의 이후를 사유해야 하는 것처럼, 정신분석학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사유 이후의 사유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계승하거나 단절하려는 경향을 내포한다.

 

이런 성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구조주의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이후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고민함과 동시에 구조주의에서 말하듯이 무의식적 체계의 산물로서 인간 문화나 사회적 성취를 받아들일 경우 생겨나는 맹점들에 대한 대안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전개하는 일련의 운동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구조주의적 문제의식에 대한 계승과 극복을 모두 함축한다. 한편으로, 구조주의처럼 포스트-구조주의는 분명 우리의 삶을 제약하는 어떤 구조적 체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구조주의에서 중요시하는 언어나 기호 체계의 무의식적 운동으로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에 대한 규정과 제약은 언어나 언어적 기호만이 아니라 권력의 네트워크나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전승 등 다양한 효과들의 영향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무의식적 언어나 기호의 닫힌 체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다양하게 형성되었다가 또 사라지기도 하는 권력과 지식의 네트워크와 이 네트워크 속에서 변형되는 주체와 사회적 담론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더욱 역동적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포스트-구조주의는 사회적 제약이나 권력관계 등 인간과 문화를 제약하거나 추동하는 조건들을 파헤치면서도, 이러한 조건 아래서도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바로 이 점이 포스트-구조주의에서 구조주의 이후만이 아니라 마르크스 이후와 정신분석학 이후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이다. 말하자면 사회의 조건이 무의식적 기호 체계의 폐쇄성이건, 경제적으로 결정되고 형성된 이데올로기적 의식이건, 무의식의 성충동에서 비롯한 규약이건 간에, 인간과 사회를 제약하는 조건과 더불어 형성된 삶이 어떻게 해방과 변혁의 삶으로 이행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유들 이후의 사유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유를 여기서 자세히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 부적절하다. 이때 불가능함과 부적절함은 이 사유의 운동에 포함된 사상가들의 광활한 주제 의식과 사유의 모험을 한데 묶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주제 의식을 파헤침으로써 이 불가능한 과제를 시도해 보자.

 

포스트-구조주의는 일정하게 폐쇄된 체계 안에서의 결정론까지 말하지는 않지만, 구조주의를 계승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사회의 특정한 제약 조건이 존재함을 인정하거나 긍정하기까지 한다. 한 예로, 푸코는 인간의 신체가 일종의 훈육이나 권력관계의 망 아래 규율화된다는 점을 그 특유의 계보학적 설명을 통해 보여 준다. 물론 이러한 훈육은 어느 시대나 동일한 것이 아니며, 각 시대나 그 시대의 장소마다 특정하게 형성되는 규율화 권력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근대에는 감옥이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인 형태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예속하는 훈육의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는데, 그 한 가지 예가 바로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이다. 그리스어 ‘pan’(모두)과 ‘opticon’(보다)의 합성어인 이 말은 말 그대로 감옥에 수감된 모든 이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발명된 감옥 형태다. 이 감옥에서 죄수들은 원형 형태로 이루어진 수감소 각각에 각기 투옥되어 있는 상태로 살아가며, 원형 수감소의 정중앙에는 각 수감소를 모두 볼 수 있는 감시처가 설비된다. 조명을 조절하여 감시처에 있는 감시자는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정중앙의 감시처에 누가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볼 수 없게 된다. 이때 죄수들은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중압감 아래 스스로 예속된 형태의 신체로 살아가게 되며, 감옥의 관리자는 매우 효율적인 방식으로 수감자들의 신체를 규율화된 신체로 훈육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감옥의 발명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푸코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이것은 권력을 자동화하고 탈개인화하기 때문에 중요한 장치다. 권력의 원리는 인격보다는 신체, 표면, 빛, 시선의 어떤 조화로운 분배, 즉 내적 메커니즘이 개인들을 얽히게 하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장치에 있다. 이로써 군주가 더 큰 권력을 부여받게 되는 예식, 의례, 표식 등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비대칭, 불균형, 차이를 보장하는 장치가 있을 뿐이다.” (Foucault 1975: 203[298])

 

말하자면, 개인들은 눈에 보이는 군주나 위정자의 통치 아래 놓이는 것이 아니라,. 훈육과 규율의 메커니즘을 내면화함으로써 자동적 장치처럼 작동하는 권력관계에 무의식적으로 예속된 주체성을 습득하게 된다.

 

이렇게 무의식적 구조는 단지 언어나 기호가 아니라 권력의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에게 은밀하게 내면화된다는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일련의 사유의 모험은 구조주의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통찰을 보여 준다.

 

 

루이 알튀세르 역시 포스트-구조주의의 흐름 속에 놓이는 철학자로 분류된다. 구조주의적 통찰을 이어받아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을 꾀한 알튀세르의 이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와 호명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의식이 존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생각을 기초 이념으로 정립했다. 즉, 사회적 정치적 지배 신념 내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존재 조건인 계급적-물질적 토대를 따라 형성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생각이다. 아주 범속하게 말하자면, 노동자의 경제적 삶의 조건에서 노동자 계급의 의식이 형성되고, 자본자의 경제적 조건에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 역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편입하고, 자본주의 질서 체제를 옹호하며, 이를 강고하게 하는 데 일조하는 현실을 목도한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저 자기 존재에 대한 배반이라는 말 정도로 설명할 것인가? 이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와 제도에 의해서 개인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설명을 제시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데올로기는 제도라고 불리는 것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제도들은 그 나름의 지위와 코드와 언어와 풍습과 의례와 관례와 예식을 갖는다.…교회, 정당, 학교, 노조, 가족, 의료계, 건축계, 변호인 업계 등등은 더욱 그러하다. 거기서도 역시, 이데올로기는 저 자신의 물질적 실존 조건들과 물질적 받침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질적 실존 형식들을 요청한다고, 왜냐면 관념들의 이러한 형체는 본래 제도들의 이러한 체계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들 말할 수 있다. (Althusser 2014: 231[218-19])

 

어떤 이들은 이러한 알튀세르의 진술이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학교나 의료계가 과연 이데올로기적 제도나 국가 장치라고 할 수 있는가? 하지만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거나, 의료계에서도 공부를 열심히 한 이들이 의료인으로서 경제적으로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환자들이 더 양질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은 비용을 제공할 경우 의료인은 그에 부합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등의 자본주의적 교환 가치에 입각한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경우를 볼 때, 우리는 알튀세르의 이런 주장을 무조건 도외시할 수도 없다. 물론 알튀세르도 “의료 이데올로기 장치가 오로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확산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환자들을 돌보는 데에도, 다시 말해 노동력의 회복 등등에도 기여하니까. 심지어 교회에 대해서도, 생산과의 관계에서 그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 대해서도, 그것이 순전히 이데올로기적 주입의 장치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Althusser 2014: 231-32[219])라고 말하며, 모든 기관이 반드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열거된 기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역할을 분명하게 수행한다. 현실의 주류 교회가 노동자 계급이나 소수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기보다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일에 힘쓰는 사례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폭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당연시되는 사회 질서를 따라, 합의를 따라 수행된다는 점이다. 즉, 부드러운 방식으로,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이데올로기 장치는 기능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나 병원, 교회가 폭압적이거나 억압적인 장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이 기관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대체로 수긍할만한 작동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 매우 편만한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호명 기능, 즉 제도와 기관이 인격들을 지배 계급의 질서에 순응하게끔 불러내는 기능을 수행한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국가 권력을 장악해 지배적으로 된 계급은 ‘무엇보다도 물리적 폭력으로 기능하는’ 억압적 국가 장치들(군대, 경찰, 법원)의 사용 이외에,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로’, 다시 말해 설득을 통해 또는 지배 계급의 관념들의 주입을 통해, ‘합의’에 의해 기능하는 다른 유형의 장치들의 사용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흘러간다. (Althusser 2014: 235[223])

 

이처럼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의 주체성은,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대한 자발적인 형태에 가까운 동의와 합의를 통하여 지배 계급의 이익에 헌신하는 양식으로 예속화되는 경향을 가진다. 이것은 억압적이고, 가시적인 방식이 아니라 은밀하고, 자연스러우며, 어떤 점에서는 비가시적, 무의식적 동의 아래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구조주의의 통찰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관련해서 더욱 확장한 포스트-구조주의의 통찰이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포스트-구조주의의 사유 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통 특징이 있으니, 그것이 다름 아닌,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제약 조건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저항’의 가능성이다. 앞서 우리는 포스트-구조주의가 제한된 인간의 조건 안에서의 해방을 꾀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 해방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것은 ‘저항’일 것이다. 해방이라는 말은 일정 부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구원이란 말과 맥을 같이 한다. 흔히 구원을 일컫는 말 중에 하나인 redemption은 악과 고통에서 빠져나온다거나 그러한 상태에서 해방된다는 의미를 담기 때문에 구원과 해방은 신학적인 맥락에서나 법적이고 정치적 맥락에서 일종의 짝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Emiliy Haslam 2012: 20 참조).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그런 해방이나 구원을 피안을 향한 꿈이거나 종교로의 성급한 회귀로 본다. 위에서 언급한 푸코는 주체에 대한 예속의 메커니즘 속에서도 저항의 가능성이 드러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사유한다. 그 한 가지 예를 우리는 예술가적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삶의 양식으로서의 도덕적 실천을 실존의 미학으로 규정하면서, 여기에 사회적 질서에 예속되지 않는 실천의 가능성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자 했다. 통념과는 다르게 푸코는 자유로운 성의 추구나 쾌락 추구를 긍정한 사상가가 아니다. 그가 그리스-로마의 삶의 실천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 것 가운데 하나는 오히려 절제의 양식과 기술이었다. 마구잡이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의 몸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자기의 쾌락을 오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푸코가 말하는 절제 역시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사회, 특히 국가가 요구하는 질서를 받아들이기 위한 절제가 아니라, 자기의 삶을 배려하고 쾌락을 자기의 삶을 위해 선용하기 위한 시도다.

 

오늘날 아마도 주요한 목표는 우리들이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의 존재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 개별화함과 동시에 전체화하는 근대적 권력 구조의 이런 종류의 ‘이중적 억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들이 누구일 수 있을까를 상상하고 구축할 필요가 있다. 결론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과제는 국가나 제도로부터의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결부되어 있는 개별화 방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Foucault 1994: 232)

 

여기서 국가나 제도로부터 개인이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결부된 개별화 방식에서 내가 해방되는 것이 자신이 말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의미라고 한 푸코의 주장에 주목하자. 우리는 흔히 정치적 저항을 말할 때, 현재의 불의한 정부를 타도하고, 선거를 통해서건 민중 혁명을 통해서건 새로운 정부나 정치권력을 창출하는 것을 저항의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많은 사례에서 보듯, 그러한 변화가 우리 삶의 실질적 변화를 일으키는지는 의문이다. 이에 푸코는 단지 국가나 정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지금의 국가가 인간 주체를 개별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신자유주의 질서 체제에서 국가나 사회는 개인에게 단순히 노동자가 아닌 1인 기업가가 되기를 요구한다. 모든 것을 기업가적 사고방식에 맞춰 생각하거나 시장의 자율성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마치 나는 기업가처럼 여기고, 주체화하게끔 이끄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국가나 질서가 요구하는 개별화 방식이다. 또한 시장과 기업이 환영하는 인적 자원으로 주체를 변형시키는 것 역시 이 체제가 요구하는 개별화 방식일 수 있다. 나는 단지 나로서, 나의 쾌락과 욕망에 충실한 존재가 아니라 시장과 국가의 요구에 부합하는 자원으로서의 인간이 되도록 길들여진다. 푸코는 진정한 저항과 자기-변형은 바로 이런 개별화 방식, 특정 질서에 예속된 주체화 방식을 거부하고,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는 통찰을 내놓는다.

 

이처럼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보다 우리의 사회 질서의 예속화 메커니즘이나 무의식적으로 구조화된 지배 질서를 더 세밀한 방식으로 나누어서 파악한 다음,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유의 모험을 감행하는 일련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참고 문헌

Althusser, Louis (2014). Initiatiation à la philosophie pour les non-philosophes. Texte établi et annoté par G. M. Goshgaria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국역본: 『비-철학자들을 위한 철학 입문』. 안준범 옮김. 서울: 현실문화, 2021.

Gutting, Gary (1998). “Post-structuralism.” In The Shorter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ited by Edward Craig, 828-832.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Foucault, Michel (1975).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aris: Gallimard. 국역본: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서울: 나남출판사, 1994.

Foucault, Michel (1994). “Le sujet et le pouvoir.” In Dits et écrits. Tome IV, 224-243. Paris: Gallimard.

Haslam, Emily (2012). “Redemption, Colonialism and International Criminal Law: the nineteenth century slave trading trials of Samo and Peters.” In Past Law, Present Histories: From Settler Colonies to International Justice. Edited by Diane Kirby, 7-22. ANU e-press. Available at: http://epress.anu.ed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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