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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M. 루이스가 쓴 『기독교 시온주의의 역사』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기독교 시온주의’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 기독교 시온주의를 “시대를 초월하여 유대 민족은 중동에 위치한 그들의 옛 조국에 대해 성경이 위임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기독교 운동”(15)으로 정의한다. (본문 중)
도널드 M. 루이스 | 『기독교 시온주의의 역사』 | 홍수연 옮김
새물결플러스 | 2024년 5월 10일 | 632쪽 | 35,000원
김동문(목사, 중동 연구가)
성경에서 언급된 그 약속의 땅은 지금도 평화에서 멀다.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이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무슬림이라고 생각하면서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평화를 깨는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의 완전 궤멸을 통해 이스라엘의 평화를 회복하겠다고 한다. 그 충돌을 언론은 ‘가자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크게 고통당하는 이들이 있다. ‘평화’를 바라고 호소하지만 무너져 가고 스러져 가는, 어떤 선택권도 갖고 있지 못한 이들이다. 그리고 하마스에 인질로 잡힌 이스라엘 시민과 그 가족이 있다. 사면이 막힌 곳 가자에서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는 하마스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정의와 평화, 안전을 되찾겠다는 명분으로 8개월이나 일방적인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하마스가 아니라 자기 운명의 결정권이 전혀 없는 절대다수의 가자 난민이 최고 최대의 희생을 치르고 있다. 이들은 1948년 1차 중동전과 이스라엘 독립 전후 과정에서 난민이 된 이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안타깝지만, 가자 난민이라는 정체성은 세습되고 있다. 그들은 그냥 팔레스타인 주민이 아니라 신분증에 ‘가자 난민’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 그들은 가자 전쟁을 겪고 있지만, 전쟁 난민이 될 수도 없다. “생명의 위험에 처할 두려움으로 인해 국경을 넘어 피난”하여야 전쟁 난민이 될 수 있는데, 국경이 막혀 있다. 이들은 국내 실향민(internally displaced persons, IDP)으로 다뤄질 뿐이다. 난민으로 태어났고 이제 실제로 새로운 난민이 된 이들, 이들의 눈으로 본 ‘평화’는 무엇일까?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지지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에서는 소수의 교회가 전쟁 반대와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대학가에서는 전쟁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정부의 전쟁 추구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이스라엘 안팎에서 더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 영역에서는 약속의 땅, 그 땅을 두고 “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땅인가?” 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의 주인은 성경 속 이스라엘인가?” “이스라엘은 누구이며 성경 속 이스라엘과 현실 속의 이스라엘은 같은 존재인가?” 하는 질문을 둘러싼 논쟁이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개리 버지의 『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땅인가?』(새물결플러스, 2019)를 권한다. 사실 일상과 교회 안팎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은 이미 굳은 편 가르기 상태인 것 같다. 서로의 간격을 좁히기가 힘들어 보인다.
도널드 M. 루이스가 쓴 『기독교 시온주의의 역사』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지하는 움직임을 ‘기독교 시온주의’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 기독교 시온주의를 “시대를 초월하여 유대 민족은 중동에 위치한 그들의 옛 조국에 대해 성경이 위임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기독교 운동”(15)으로 정의한다. “19세기 후반까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한 대부분의 계획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한 것이었다”(25)라는 언급이 눈길을 끈다.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랍비 유대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시온주의 계획에 반대”(25)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인 또는 소규모의 집단 정착은 허용할 수 있었지만, 이보다 더 큰 정치적 계획은 유대인의 구속이 오직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것”(25)이라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종말을 앞당기거나’ 계산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어 있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절한 때에 하나님이 선택하실 것이며, 이 과정에 개입하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단이며, 정죄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27)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독서의 폭이 좁은 필자에게 도널드 M. 루이스는 낯선 인물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지난 500년 사이에 크고 작게 전개된 기독교 시온주의를 연대기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다. 630쪽에 가까운 두꺼운 분량에, 수많은 낯선 인물과 연대, 사건이 겹겹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 시온주의의 흐름을 이해하도록 돕는 면에서는 아주 친절하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팎의 ‘국가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맥락을 토대로 성찰해 볼 수 있도록 돕는다. 혹시 이 책이 기독교 시온주의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논쟁적인 책일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저자는 기독교 시온주의의 역사를 살피며 공정한 평가를 추구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부끄러웠다. 필자는 지난 30-40년 정도를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이 주제를 언급해 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통찰이 부족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선택적 평화를 추구하고, 분쟁의 실마리와 자양분이 되어온 한국 교회와 전 세계에 흩어져 자리하고 있는 한인 교회의 일원일 뿐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맹목적 지지나 두둔, 비하나 반대를 넘어설 수는 없을까? 친이스라엘, 친팔레스타인, 반이스라엘, 반팔레스타인, 친유대주의, 반유대주의 같은 용어를 제대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 ‘가자 전쟁 즉각 중지’, ‘네타냐후 하야’ 등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시민은 반이스라엘일까? 가자 전쟁 반대를 외치는 미국과 유럽의 시민은 반유대주의이고 친팔레스타인일까?
나는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통찰과 넓고 깊은 정보를 얻었으면 좋겠다. 지금 한국과 미국의 교회가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이런 책을 펴내는 출판사 새물결플러스 대표와 구성원의 수고와 용기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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