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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기준 일본 내 재일 동포 수는 436,167명이다. 이 중 무국적으로 불리는 조선적은 26,312명이다. 재일 동포의 대부분이 한국 여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 여권을 갖고 있어도 일본에서의 특별 영주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로부터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지 못한다. 재일 동포에게 특별 영주권은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정체성으로 끊어 버리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일본과 한국 어디에서도 온전한 국적 혹은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본문 중)
박영춘(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 팀장)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은 4대에 걸친 재일 동포의 삶을 단단하게 담아냈다. 격랑의 근대사가 한반도를 관통했고 한민족은 디아스포라로 흩어졌다. 200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본격적인 일본행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중공업의 폭발적 수요는 근대 일본 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고, 조선인은 값싸고 질 높은 노동력으로 충당되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과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에 수많은 조선인들이 몸을 실었다. 남자들은 일본 내 탄광 및 건설 현장에서, 여자들은 방적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을 했다.
세월이 흘러 부모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아이들이 일본어로 교육을 받으며 성인이 될 즈음 한반도는 광복을 맞이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지만 일본으로부터 재산 반출을 금지당해 귀향을 보류한 이들도 있었다. 200만 중 60만이 일본에 남았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리라 다짐하며 아이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삽시에 600여 개의 국어 강습소가 일본 곳곳에 생겨났다. 오늘날 총련 산하 조선학교의 모태이다.
해방 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남한은 이념 논쟁으로 어수선한 사이 북한은 재일 동포 사회를 돌보며 학교 건설과 교육비를 지원했다. 재일 동포의 대다수가 남한 출신임에도 북쪽을 지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지금도 남한을 고향, 북한을 조국이라 부른다. 분단의 역사가 낳은 비극이다. 재일 동포 사회에서 널리 불리는 노래 ‘임진강’ 가사에 그 절절함이 담겨 있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해방 후 세워진 국어 강습소 중 4곳만이 민단 계열의 학교로 발전해 왔다. 얼마 전 한국 미디어를 달군 일본 고교 야구 고시엔 우승을 거머쥔 교토국제고가 그중 하나이다. 교토국제고는 원래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은 ‘교토한국학원’으로 일본 내 조선학교와 함께 ‘각종 학교에’ 속했다. 그런데 2003년 ‘1조교’를 신청하고 학교명을 ‘교토국제고’로 변경했다. ‘각종 학교’는 지자체장의 승인을 받으면 되지만, ‘1조교’는 일본 문부과학성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 학습 지도 요령을 따라야 한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조선학교와 교토국제고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일본 내 극우 세력에게는 다를 바 없다. 헤이트 스피치와 무차별한 인신공격이 매일같이 일어났다. 한국 사회가 우승을 향한 찬사와 민족 자긍심을 만끽하는 사이 그들은 오늘도 짙은 그림자에 드리워 땀 흘리며 주어진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
2021년 기준 일본 내 재일 동포 수는 436,167명이다. 이 중 무국적으로 불리는 조선적은 26,312명이다. 재일 동포의 대부분이 한국 여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 여권을 갖고 있어도 일본에서의 특별 영주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로부터 주민등록번호를 부여받지 못한다. 재일 동포에게 특별 영주권은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된 정체성으로 끊어 버리기가 쉽지 않다. 결국 일본과 한국 어디에서도 온전한 국적 혹은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한국 여권을 소지하여 한국에서 종종 한국인으로 분류되어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대학으로 유학을 온 재일 동포 학생은 졸업 요건을 한국 학생과 동등하게 요구받는다. 외국인 유학생일 경우 별도의 졸업 요건이 적용되어 졸업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인과 결혼한 재일 동포 이주민은 외국 국적자 혹은 외국 국적으로부터 귀화한 자가 아니어서 여성가족부로부터 다문화가정에서 배제된다. 지자체나 관공서의 재일 동포에 대한 규정은 제각각이어서 방문할 때마다 자세히 설명해야 하고 설득을 해야 마땅한 권리를 얻어낸다. 재일 동포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인식과 이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시간은 쉬지 않고 앞으로 흐른다. 재일 동포는 100년의 세월을 이겨내며 자신과 가정을 지키고 민족성을 포기치 않았다. 재일 동포를 다시 마주하는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우리 안에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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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대한민국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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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2009). “식민지 시기(1910년-1945년) 조선의 인구 동태와 구조”. 한국인구학, 32(2), 2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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