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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퍼 님은 명절마다 돌아다니는 ‘명절 잔소리 요금표’라는 이미지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도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돈을 내놓아라!’라는 맥락이겠죠. 청년들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넘어갔는데요. 여태 잔소리를 해왔던 나이대의 어르신들은 지인들과 ‘명절 잔소리 요금표’ 이미지를 공유하면서 자중하자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청년들이 결혼을 망설이는, 또는 비혼을 결심하는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아요. 가부장적인, 또는 성평등하지 않은 사회 때문이기도 하고, 원가정 또는 자라온 환경에서의 상처일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청년들이 결혼을 고민한다는 것은 고민의 맥락은 소거되고 단지 ‘믿음 없음’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요. 최근 있었던 1027 집회의 100대 기도문에서 비혼과 비출산을 회개해야 할 기도제목으로 써놓은 것을 보고 슬픈 마음이 들더라고요.
결혼과 비혼 사이, 청년과 교회 사이
<미래목회와말씀연구원> 인카운터포럼 “핵개인 시대 ‘혼’을 말하다” 중에서
1. 비혼 담론의 등장과 확산 배경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었던 미혼(未婚)이라는 단어는 ‘혼인은 반드시 해야하는 것이나 아직 하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관습을 깨고 비혼(非婚)이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이는 ‘혼인 상태가 아님’, ‘결혼을 선택하지 않음’이라는 객관적이고 주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미혼’을 대체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비혼 담론과 비혼주의자들을 다양한 매체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체감상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비혼’은 낯선 것이었고 인생에 결혼이 없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나 교회 전통과 문화 안에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을 거스르는 불순종한 일로 여겨졌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결혼은 누구든 당연히 거쳐가는 관문이고, 결혼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비혼’은 나라 전체의 화두가 되었고, 많은 청년들이 비혼 담론에 동의하며 자신의 삶의 양식으로 고려하고 있다.
지난 십여년에 걸쳐 우리 사회에 비혼이 확산된데에는 분명한 맥락과 배경이 존재한다. 여러 요인들 가운데 두가지 축을 꼽자면 ‘여성주의의 확산’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해체’다. 젠더 갈등, 고정된 성역할과 위계의 문제, ‘정상가족’ 신화가 야기하는 소외와 편견 등 지금의 20~30대들은 이러한 사회 환경의 위기, 가치관과 생활양식 변화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 한층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1997년 IMF사태 이후 등장한 비혼 1세대가 그러했듯, 사회적 지위 획득 및 성평등의 관점에서 여성에게 불합리한 제도와 문화를 거부하며 연애, 결혼, 출산에 대한 관점을 새롭게 갖게 되었다. 그 중 하나로 스스로 경제적, 정서적 자립을 이루어 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남성들 또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주입해온 가부장제와 고정된 성역할의 편견 하에서 막중한 부담과 고충을 떠안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전통과 억압에서 벗어나 본인만의 삶의 모양, 취향, 경제력,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며 점차 개인화되고 비혼을 선택하고 있다.
4. 청년과 교회 사이 : 정직하게 묻고 답하기, 공존하며 연결되기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인식이 젊은 세대로부터 점차 옅어지고 있다. 그것은 ‘비혼이 맞고 결혼이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생애주기’를 오롯이 통과하는 것과 ‘정상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갈수록 더 환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은 분명히 드러났다. 비혼 담론은 사회 변화에 따른 대안적 길을 내는 하나의 운동이자 권리로서 의미를 갖는다. 상황과 환경에 의한 것이든,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이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청년들, 그리고 ‘정상성’을 따르지 않는/못하는 청년들은 오히려 더욱 진중하고 치열하게 삶의 의사결정 앞에서 숙고한다. 그리고 이 때 기독 청년은 ‘결혼과 비혼 사이’에서 사회적 환경, 개인의 고민, 담론적 이해 위에 성경과 신앙이라는 한 겹의 기준을 더 고려해야 하는 형편이다.
청년부 예배 후 결혼을 앞둔 한 청년이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면서 “나 먼저 갈게, 너희도 할 수 있어! 좋은 남자 만나서 빨리 장년부로 올라와!” 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경악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러움과 어색함이 뒤섞여 웅성거리는 청년들, 승자의 미소를 머금은 예비신부. 청년을 결혼대기자 취급하며 소위 결혼적령기를 넘긴 청년들에게 눈총을 주는 목회자까지. 그 완벽한 기괴함에 친구는 그 교회를 탈출했다. ‘결혼=신분상승, 미혼=낙오자’로 여기는 분위기는 비단 그 교회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비혼은 교회 안에서 금기시하거나 근절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회자되어야 하고 공동체의 것으로 끌어안아 다듬고 가꾸어야 한다. 결혼과 비혼을 양자택일해야하는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된다. 결혼과 비혼 사이에 촘촘하게 늘어서 있는 청년들이 만들어 낼 다채로운 삶의 모양과 갈래들에 주목해야 한다. 청년들의 고민과 도전과 선택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의 가장자리를 확장시킬 것이다. 해서 보다 평등하고 인격적인 관계맺기를 도모하며,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을 자유케 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교회는 비혼 청년을 포함한 그 누구도 ‘소외’와 ‘고립’을 느끼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 전통과 신학을 근거로 교회 ‘강단’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메시지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들에 대한 사려깊은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가족’의 의미로 청년과 교회가 연결 될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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