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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과 불안으로 시작된 나의 메모도 꿈과 사랑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쩐지 믿어 보고 싶어서 작가 정혜윤과 『아무튼, 메모』를 응원하는 긴 글을 쓰고 있다. 우리의 메모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실망과 실패로 얼룩진 분투일지라도 계속해서 빛이 있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이 아무래도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본문 중)

 

김보경(전 IVF 동서울지방회 간사)

 

정혜윤 | 『아무튼, 메모』

위고 | 2020. 3. 15. | 166쪽 | 12,000원

 

메모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놓치지 않기 위해, 잊으면 안 되는 것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내용이나 필요한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우리는 메모를 한다. 또한 메모는 자기 계발의 필수 덕목이기도 하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메모 방법에 대한 가이드는 어디에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에게도 메모와 필기는 오랜 습관 중 하나다. 고백하자면, 이 습관은 오랜 약점과 관련이 있다. 나는 더딘 편이다. 그래서 투박하고 무식하지만 내용이 이해될 때까지 반복해서 쓴다. 또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금세 잊는 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들은 아주 크고 굵게 적는다. 일할 때는 동료들에게 ‘문서 중독’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까지 문서 작성에 몰두한다. 물론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이다.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불안해서, 혹은 잘해 내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나의 메모는 약점과 불안으로 시작됐다. 반면, 책의 저자 정혜윤은 메모주의자가 된 시작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달라지고 싶어서.”

 

사회가 힘이 셀수록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가만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 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45쪽)

 

나는 재미, 이해관계, 돈이 독재적인 힘을 갖는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살고 싶지 않아서, 좋은 친구가 생기면 좋겠어서, 외롭기 싫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힘과 생각을 키우는 최초의 공간, 작은 세계, 메모장을 가지길 바라 마지않는다. (55쪽)

 

『아무튼, 메모』 표지 ⓒ위고

 

그녀의 초기 메모는 대부분 문장이었다. 많은 책들을 읽으며, 주로 ‘내 인생을 담아놓을 가치가 있는 문장’들을 수집했다. 다만 일기는 쓰지 않았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나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정혜윤은 메모를 통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를 스스로 결정했다(63쪽). 더 인상 깊었던 부분은 책의 후반부다. 지금의 그녀는 예전처럼 ‘나를 위한’ 메모를 하지 않는다.

 

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을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67쪽)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 생각만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어가는 중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들은 이야기가 내 이야기보다 좋은 것이라면 그때 비로소 갑자기 내가 인간이 되는 것 같다. (70쪽)

 

다시 시작하고 싶어서, 달라지고 싶어서 시작된 메모가 도달한 곳은 ‘꿈’과 ‘사랑’이다. 꿈은 이 세계에 일부분이 될 방법을 찾는 것이다(86쪽). 그 방법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에겐 음악이고, 누군가에겐 문학이며, 또 누군가에겐 평범함일 것이다. 정혜윤에겐 사랑이다. 그녀에겐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증언하고, 기록하는 것이 곧 이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방법이고 최종적인 꿈이다. 이 모든 과정에 메모가 있었다. 가장 좋은 메모는 삶으로 부화해야 하기에, 메모장은 그야말로 분투의 장이 된다.

 

꿈은 재료와의 싸움이다. 내 인생에도 몇 번은 아주 멋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몇 번은 멋진 이야기를 들었다. 멋진 밤도 있었고 멋진 낮도 있었다. 멋진 여행과 영화와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최고로 멋진 책들도 읽었다. 나의 어리석음은 그걸로 좋은 꿈을 만들어볼 생각을 오랫동안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는 점이다. (89쪽)

 

나를 위해 펼친 메모장은 당신을 위해 분투하는 꿈의 공간이 됐다. 이는 분명 바람직하다. 하지만 솔직한 감상으로 이 책은 이상적이다. 그녀가 진정한 메모주의자라면, 나는 비메모주의자에 가깝다. 꿈과 사랑이라니. 개살구 같은 단어에 희망을 거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정혜윤의 말처럼, 세상은 서로를 축소시키기 바쁘고, 꿈의 자리는 돈이 차지한 지 오래다. 아무리 굴욕적일지라도 돈이 꿈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에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는 게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정혜윤은 이토록 지치지 않고 힘차게 희망을 말한다. 꿈과 사랑은 언어를 통해, 문장을 통해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다고 말이다. 결국 이 세상은 축소되지 않고 확장될 것이라고 말이다.

 

약점과 불안으로 시작된 나의 메모도 꿈과 사랑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장담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쩐지 믿어 보고 싶어서 작가 정혜윤과 『아무튼, 메모』를 응원하는 긴 글을 쓰고 있다. 우리의 메모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실망과 실패로 얼룩진 분투일지라도 계속해서 빛이 있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이 아무래도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평론가 신형철은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는 여전히 이 말을 믿습니다.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능력의 산물이니까요”라고 말했다. 전쟁과 절망의 문장이 가득한 세상 속에도 여전히 희망의 문장이 있다고 믿는 마음으로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을 메모한다.

 

우리의 삶은 결국 평생에 걸친 몇 개의 사랑으로 요약될 것이다. 어떤 곳이 밝고 찬란하다면 그 안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해 한 해 빛을 따라 더 멀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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