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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전쟁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자국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에는 그런 노력은 둘째로 치더라도 오류에 대한 깨달음조차 없다. 이념에 치우친 설교를 들으면 힘이 지식이라 한 푸코가 옳다. 참 말씀의 부재는 2025년 세계 전망을 어둡게 한다. (본문 중)

 

권수경(목사, 일원동교회)

 

2024년을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의 날들을 다시 세어 본다(시 90:10-12). 탄핵, 환율, 전쟁, 챗지피티, 한류가 뒤엉킨 가운데 맞는 2025년은 산술 아니라 미적분으로도 풀리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성경마저 잘 모르니 지혜의 마음은 언제나 얻을까? 새해에도 우리의 날들은 신속히 날아갈 텐데….

 

정치와 경제

 

2025년을 바라보는 키워드는 혼란이다. 정치도 경제도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있다. 대통령이 평화 중 비상 계엄이라는 희대의 자살골을 넣었다. 노골이라 우긴 집권당의 자충수는 오히려 국민의 뜻을 거센 열망으로 결집했고, 국회는 탄핵을 의결했다. 긴장과 혼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 정권이 국회의 다수를 얻는다면 적지 않은 정리 작업이 일어날 수 있다. 거대 카르텔을 이룬 정치, 돈, 언론과 싸우는 일이 쉽지는 않겠으나, 성숙한 민주 국민의 힘이 역사를 잘 이끌 것이다. 새해를 앞두고 경제 위기설이 커지고 있다. 세계 경제의 장기 불황과 나라 안팎의 특수 상황 때문이다. 경제의 안정과 발전은 모두의 바람이지만 노동 의지 약화와 수출 동력 상실은 험난한 새해를 예상하게 한다. 게다가 빈부 격차 문제는 수도권 집중을 업고 도를 더해가고 있다. 온 나라가 물질주의에 물든 지금은 정의, 평등, 인권, 자비 등 보편 가치의 회복이 시급하다.

 

교회가 문제다. 이념 싸움을 영적 전투와 혼동해 온 역사가 길어 신앙과 정치를 아직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의 정치적 혼란이 좋은 기회다. 이념을 추종해 국민의 절반 이상을 적으로 만들면 전도도 사랑도 불가능이다. 교회는 권력에 기웃거린 역사를 아파하며 십자가를 회복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와 자비 구현을 위해 애써야 한다. 경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인간의 탐욕을 꾸짖는 대신, 번영 복음을 퍼뜨려 나라를 돈독에 빠뜨린 장본인 아닌가. 성 관련 윤리에는 극도로 민감하면서도 사회 정의나 약자 배려에는 등을 돌린 결과 세상의 외면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교회는 돈에 무릎 꿇은 자신을 먼저 깨닫고 얼른 말씀으로 돌아가 참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미 6:8). 사경회든 세미나든 수도원 운동이든, 새해에는 돈과 이념을 이기려는 몸부림이 도처에서 강하게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세계와 지구

 

연전에 시작된 전쟁이 해를 넘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시리아 내전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주변 아랍국들의 상황과 이어져 있다. 폭력적 정치 혼란을 겪는 나라도 많다. 하나의 중국론에 기반한 중국의 대만 흡수 방식도 큰 변수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극우와 극좌가 엎치락뒤치락 혼란을 일으킨다. 포스트모던 상대주의가 낳은 무한 투쟁이다. 트럼프의 재등장은 이 모두를 미궁으로 밀어 넣어, 기존 질서나 관행의 급변을 예고한다. 정치 불안은 경제적 불확실성을 낳아 전문가들도 전망 대신 점만 친다. 국제 관계는 복잡하므로 유튜브 몇 개 보고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는 큰 그림을 그려 굵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전쟁이 가져오는 죽음과 난민의 고통을 막고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의 이념 편향은 국제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도 막는다. 우리는 특정 국가를 절대 선이나 절대 악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조심하되, 양비론에 근거한 무관심에 빠져서도 안 된다. 잘못된 이념이 신학도 많이 왜곡했다. 이스라엘 건국을 언약의 성취로 보는 신학적 오류는 무고한 사람을 죽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공격한다. 교회는 전쟁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자국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교회에는 그런 노력은 둘째로 치더라도 오류에 대한 깨달음조차 없다. 이념에 치우친 설교를 들으면 힘이 지식이라 한 푸코가 옳다. 참 말씀의 부재는 2025년 세계 전망을 어둡게 한다.

 

 

과학과 기술

 

2024년은 융합의 시대가 왔음을 확인했다. 인공 지능과 바이오가 과학 기술의 선두를 이룬 가운데, 특히 인공 지능의 약진이 눈부셨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석권했고, 관련 반도체 산업이 세계 경제를 주도한다. 챗지피티 등 생성형 인공 지능이 우리 삶을 크게 바꾸고 있는데, 워낙 갑작스러워 혼란을 부르고 위기감을 키운다. 새해에도 변화는 더 빨라질 것이고 특이점이라 불릴 뭔가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 틈바구니에서 기후 위기는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2024년이 역사상 가장 더운 해였는데, 그 명예는 매년 다음 해가 앗아갈 것이다. 올해는 1.5도 상승이라는 상징적 방어선도 처음 무너졌다. 부끄럽게도 우리 대한민국은 탄소 예산 활용이 세계 꼴찌 수준이다. 2025년에는 우리가 파국에 한 걸음 다가섰음을 다시금 온몸으로 느낄 것이다.

 

교회는 뭘 하고 있는가? 주류 자연 과학과 인공 지능은 유물론을 기반으로 하여 전통 가치관과 대립한다. 바이오산업은 인간 존엄성과 생명 윤리에서 도전을 제기한다. 교회가 비판으로 일관하는 사이 새 세계관은 포스트모던 세상을 거의 장악하였으며 교회의 스마트폰 세대도 그런 환경에 순응하고 있다. 교회와 세상의 대립이 교회에 들어와 세대 간의 대립이 되었으니 열린 대화가 시급한 상황인데 2025년을 앞두고도 삐걱거리는 소리만 들린다. 융합의 시대에 과학과 기술을 외면하고 어쩌자는 말인가? 새해에는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성경적 세계관 구축을 새롭게 시작하기 바란다. 한국교회가 최근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두루 알리고 실천하여 잘 대응하는 일은 이웃과 자녀를 사랑하는 일이며 우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일이다.

 

인문학과 통합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은 한류의 인문학적 기초를 확인했다. 기름진 토양에서 자란 한류가 세계로 뻗어가고 그 줄기와 잎은 우리의 밭을 다시금 비옥하게 만든다. 한강은 고통과 실존을 통해 극도의 이념 대립을 풀어갈 실마리를 제시하여 셰익스피어를 꿈꾸게 한다. 하지만 교회의 냉소적 반응은 문학으로 복음을 꽃피운 단테의 길부터 막고 있다. 르네상스가 있어 가능했던 교회 개혁의 후손들이 역사를 모른 채 인문학을 마귀 보듯 한다. 과학과 기술을 향한 부정적 태도의 연장이라면 전부 갈아엎어야 한다. 2025년에는 노벨상 작품을 원어로 읽는 쾌감을 동력 삼아 신화와 전설 등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문학을 즐기고 우리 자녀들의 머리와 가슴도 키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머뭇거리다가는 챗지피티보다 못한 인간을 양산할 수도 있다.

 

이념 대립이 첨예화할 2025년 한반도의 온도가 궁금하다. 남북 정치인들의 탐욕과 무능으로 꽁꽁 얼어붙은 땅에 얼른 훈풍이 부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다. 핵 하나로 버티는 북한을 다시금 대화와 공존의 장으로 불러내려면 정치나 돈 이전에 따스한 마음이 필요할 것이다. 북한을 위해 많이 기도해 온 교회가 전도 외에 그들을 사랑하는 다양한 방법도 모색하면 좋으리라. 남북 관계 변화는 한류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주민을 향한 환대도 2025년의 숙제다. 교회는 그들을 형제로 맞아 더 아름다운 나라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이념과 인종의 통합이나 남북통일 같은 값진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 리는 만무하다.

 

지혜의 2025년?

 

과학과 기술이 주도하는 세상은 젊다. 세계의 20대, 30대가 우주로 뻗어나가는데 우리는 아직도 나이 타령이다. 정치도 기업도 뒤돌아볼 틈이 없다. 교회는 정말 큰 일이다. 고령화되고 유튜브 의존도도 높아가고 있다. 환갑쟁이들이 힘을 쓰는 노회, 총회는 지혜의 장 아닌 이념의 게토다. 말씀의 오염이 심각한데 복잡하고 전문화된 세상은 언제 파악해 새 시대를 열겠는가. 세상이 빛의 속도로 달려간 뒤 교회는 잡초 무성한 간이역에 홀로 앉아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린다. 2025년에 우리를 살릴 지혜는 무엇일까? 말씀 읽기부터 교회 구조까지 정말 혁명적 변화가 필요한데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시작이 당연히 내 몫이라면 혹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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