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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은 그 세 가지 삶의 여정을 시간순으로 풀어냈습니다. 글은 흥미롭고 감동의 여운이 깊으며 누구나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웠습니다. 책을 통해 표현된 저자의 삶의 특징을 요약하면 ‘정직’, ‘검소와 절제’, ‘약자에 대한 관심’, ‘정의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보니, 이는 그가 창립했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뜻과 일치했습니다. 조직과 운동이라는 것은 한 리더가 일생을 통해 품었던 가치를 구체화하고 확산하는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 중)

 

송인수(기윤실 이사, 교육의봄 공동대표)

 

손봉호 |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 | 교육의봄 기획

우리학교 | 2025. 3. 10. | 300쪽 | 18,000원

 

얼마 전, 강영안 교수님으로부터 카톡이 왔습니다. 「신앙과 삶」 잡지에 손봉호 교수님의 회고록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의 서평을 써서 싣게 되었다는 말씀과 함께 원고를 보내 주셨습니다. 강영안 교수님은 손봉호 교수님을 가장 잘 아는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생을 학자로 사신 강 교수님다운 회고록 소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제 눈길을 끌었던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손봉호 교수님의 성품을 아는 자신으로서는 그분의 회고록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는 대목과, 둘째로 회고록 제목인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는 그분이 직접 정하신 것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었습니다.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2023년 무렵, 당시 국민일보의 연재 코너 “역경의 열매”에 손봉호 교수님의 삶을 돌아보는 30회의 자전적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글 하나하나가 귀해서 자주 챙겨보다가, 연재가 다 끝난 후 책이 나올 것이라 짐작하고 교수님께 출판 계획을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런 계획도, 준비를 위한 별다른 의지도 없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교육의봄’ 뉴스레터로 연재한 후 출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출판할 때 글을 뒷받침할 변변한 사진도 한 장 없어서 사진 없이 글만 싣기로 했습니다. 저자가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의지가 크지 않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원고를 확인할 때마다 본인의 글에 허세가 낄까 봐,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부분에서조차 ‘오래 살다 보니 그 가운데는 소중한 것도 없지 않았다’, ‘그동안 경험한 것이 다 헌신짝 같지는 않고’, ‘사회에 큰 해는 끼치지 않았고 착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지는 않았다’ 같이 극도로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읽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곤 했습니다.

 

제목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를 정하는 과정도 강 교수님의 예측과 같습니다. 회고록 본문을 보면, 과거에 재미 화가 김원숙 씨가 됫박 바닥 면에 한 남자가 산봉우리 세 개를 지고 가는 그림을 그리고 “세 개의 산봉오리를 지고 가는 사나이”라는 제목을 붙여 손 교수님에게 선물로 드린 바 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출판사는 그분의 삶을 잘 묘사한다고 판단해서 “산을 등에 지고 걸었네”를 제목으로 추천했지만 손 교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실제보다 과장된 교만한 제목이라고 하셨고, 가족들은 더욱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그런 ‘고집 센’ 가족들은 처음 보았습니다. ‘무거운 짐을 졌다는 것이 아니라 지려는 의도와 시도는 있었다’는 의미에서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라는 겸손한 표현으로 바꾸어 겨우 책 제목에 대해 합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래의 그 제목이 교만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학자로서 시민운동가로서 손색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산을 등에 지고 걷지 않았다면, 다른 누가 그렇게 걸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산을 등에 지고 가려 했네』표지 ⓒ우리학교

 

회고록은 그 세 가지 삶의 여정을 시간순으로 풀어냈습니다. 글은 흥미롭고 감동의 여운이 깊으며 누구나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웠습니다. 책을 통해 표현된 저자의 삶의 특징을 요약하면 ‘정직’, ‘검소와 절제’, ‘약자에 대한 관심’, ‘정의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고 보니, 이는 그가 창립했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뜻과 일치했습니다. 조직과 운동이라는 것은 한 리더가 일생을 통해 품었던 가치를 구체화하고 확산하는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교사로 혹은 교육운동가로 살아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즉, “그런 검소와 절제, 사랑과 정의가 통합된 삶의 추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하는 것입니다. 그분도 우리와 같은 입시 중심의 한국 교육을 통과했으니 공교육 제도가 만들어준 심성은 아닐 것입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책에서 말씀합니다. ‘애통해하는 마음은 어린 동생 3명의 죽음으로 비통해하셨던 어머님 때문이고, 이념을 상대화하는 마음은 6.25 전쟁의 비극 때문이며, 시민운동에 대한 관심은 정권의 부패에 대한 4.19학생 운동과 새생활운동 참여에서 비롯되었고, 영어학에서 신학과 철학으로 관심이 바뀐 것은 군 생활 중 부대의 부패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신비롭습니다. 부정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대개 절망하고 비관하며 냉소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손봉호 교수님은 가정적 고난과 사회‧국가적인 고통과 부조리 속에서 도망가지 않고 변화를 위한 에너지를 끌어내셨을까? 그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답은 간단할 것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일 것이고, 예수님이 찾아와 나누어 주신 영원한 생명과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조건 없는 사랑이 내 인생에 부어질 때, 우리는 그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를 사랑하시다니,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렇게 사랑을 부어 주신 분을 주목하고 흠모하다가 자신도 그분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 따름은 의무를 넘어 욕구가 되고, 의지가 아니라 사모함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의 십자가를 나도 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럽고 손해가 따르며 지고 가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손 교수님과 같이 십자가 같은 산 하나씩 등에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은 순교자적으로 비장하거나 어둡지 않고, 겸손과 미소, 은은한 감동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도 각자의 산을 지고 갈 때 그런 밝은 태도를 잃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시민운동가 사울 알린스키(S. Alinsky)는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유머라고 했습니다. 아마 비슷한 맥락의 말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회고록을 다 읽은 어느 독자의 짧은 소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유학 시절에 2등을 해서 학비 장학금을 받았지만, 대학이 주겠다는 생활비는 거절하고 아르바이트를 하신 이야기가 마음에 남습니다. 역시 1등을 한 미국 친구가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은 것도요. 공부한다는 핑계로 장학금 받고 육체노동을 안 할 수도 있었고 외국어로 공부해야 했기에 더 어려운 때였을 텐데,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 대한 마음도 품으셨다는 것이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유학 생활 중 교수님들의 강의보다 그분들의 온후한 인품에 더 감동했다고도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반백 살이 되었는데, 이 글들을 읽으며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회고록 내용 중, 풀을 뽑다가 점심 식사 시간이 되자 친구들은 하던 일을 다 멈추고 식사하러 달려갔지만, 교수님은 마무리하고 가려고 더 머물렀다는 장면, 그때 다른 친구가 교수님을 찾다가 와서는 “나, 너 여기 있을 줄 알았어!”(I thought you would be here)라고 말한 것을 일생의 가장 큰 칭찬으로 여긴다는 말이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남들이 어려워하는 자리에 기꺼이 있기! 저는 나름 기관장이랍시고 편한 자리에서 지시만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찾는다면 가장 좋고 편한 자리에 가서 “너 여기 있을 줄 알았어”라고 하겠지요. 부끄럽습니다. 앞으로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나, 너 여기 있을 줄 알았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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