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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안정의 기반이 되어야 할 가정과 공동체는 이제 인정을 갈구하고 통제를 받는 공간으로 경험된다. 과거에는 생계를 꾸리기에도 바쁜 가정이 많았지만, 넓게 보면 이웃과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 양육자의 역할을 하고 안전망을 제공했다. 방임처럼 보였어도 최소한의 정서적 지지 체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담실을 찾는 많은 내담자들은 정서적 트라우마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 결과 합리적 판단과 의사결정은 물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도 큰 어려움을 호소한다. (본문 중)
곽은진(아신대 상담학 교수)
분노는 불평등, 부당함, 권리 침해, 불합리한 대우 등에서 비롯된다. 이는 상호 존중의 경계가 무너지고, 타인에 의해 안전한 거리가 침해되거나 공격당할 때 느끼는 인간의 본능적 감정 중 하나다. 특히 분노가 위험한 감정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 안에 내재된 공격성 때문이다. 분노는 궁극적으로 부당한 상황을 자각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감정이지만, 때로는 이 감정이 공격적 행동으로 나타나 타인에게는 폭력으로, 자신에게는 우울을 동반한 자해나 자살 등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또한 수면 장애, 가슴 답답함, 신체적 통증과 같은 신체화 증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최근 서울대 보건대학원 BK21 건강재난 통합대응 교육연구단이 실시한 “2025 정신 건강 증진과 위기 대비를 위한 일반인 조사”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가량이 마치 화산 폭발 직전과 같은 울분의 위기 정서 상태에 놓여 있다. 화산이 폭발한 뒤 마그마를 통제할 수 없듯, 이 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의 내면에 자리 잡은 정신적 위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의 정신 건강에 대한 병식1)은 51.3%로 높았고, 예방 차원의 관리 의식도 91.7%로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정신 질환이나 질병에 대한 관리와 대응에는 80% 이상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연구는 단순히 우리 사회가 정신적 분노와 울분 상태에 심각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드러낼 뿐 아니라 몇 가지 주요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참가자들은 신체적 건강 문제에는 신속히 대응하면서도 정신 질환에는 소홀하거나 대응이 미흡한,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둘째, 병식은 높지만 대처가 미흡한 이유로 사회적 요인이 지목되었다. 경쟁과 성과 중심의 사회 분위기, 타인이나 사회가 정한 기준과 평가, 물질주의적 가치관, 그리고 개인보다 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요구 등이 그 예다. 이는 개인의 정신적 문제가 사회·경제적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소속된 환경이나 공동체가 문제를 촉발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내가 있는 곳이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셋째, 특정 질문에 대한 응답자들의 반응은 그 비율과 강도가 90%를 넘나들 정도로 뚜렷했다. 이는 상황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고 강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분명히 알면서도 대처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러한 모순이 정서적 혼란과 판단 장애를 유발하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는 점도 드러났다.
넷째, 사회적 편견과 낙인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나타났다. 이는 자신의 삶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사회적 기준, 규범,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개인이 선택권을 발휘하기 어렵다. 삶의 우선순위나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때 흔히 무력감을 느끼게 되며, 이는 인간 내면의 자율권, 선택권, 주도성과 충돌하여 극단적 상황에서는 분노와 같은 부정적이고 억압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이 결과는 한국 사회의 의미 있는 단면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과거에 비해 개성을 중시하고 자율적 선택권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자율성이 침해되는 부분이 더 뚜렷하게 부각되거나 자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이는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성장 과정의 일부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문제의식이 결코 가볍지 않다.
상담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과거에 비해 정신과 약물 복용이 보편화되었고, 실제로 내담자 10명 중 8명은 여러 이유로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 정서적 문제는 단순히 특정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개인적으로 주목하게 되는 점은 부모의 통제적 양육과 환경이 너무도 당연시되고, 경제적 힘으로 자녀의 개성과 자율성을 억압하는 부모가 과거보다 많아졌다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권위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가치관이 점점 만연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때가 많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삶이 이미 가정 내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 과정에서 이성과 감성은 쉽게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가정에서 비롯된 혼란이 사회로 이어져 그대로 작용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서적 안정의 기반이 되어야 할 가정과 공동체는 이제 인정을 갈구하고 통제를 받는 공간으로 경험된다. 과거에는 생계를 꾸리기에도 바쁜 가정이 많았지만, 넓게 보면 이웃과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 양육자의 역할을 하고 안전망을 제공했다. 방임처럼 보였어도 최소한의 정서적 지지 체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담실을 찾는 많은 내담자들은 정서적 트라우마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 결과 합리적 판단과 의사결정은 물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도 큰 어려움을 호소한다. 이러한 모습은 결국 자기 선택권을 경험하지 못하고 주도적 삶을 살지 못하는 현실, 철학적 소양과 사고 능력의 저하, 산업화 과정에서 붕괴된 가정과 그로 인해 깨진 환경-정서적 안정의 경계, 억압·통제·순응을 안정이라 강요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불안, 우울, 분노로 표출되고, 이성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정서적 교육과 양육의 부재, 생존을 위한 경쟁의 합리화로 인해 악화된다.
나는 상담의 주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을 보며 스스로에게 자주 묻게 된다. “지금 상담실을 찾는 내담자들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질문은 상담실 내담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적어도 보편적 가치와 철학적 세계관이 무너진 상황에서 방향 없는 무의미한 경쟁이 인간 고유의 가치를 파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는 자각-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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