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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평화는 힘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될 때 시작된다. 정당 전쟁론은 전쟁을 쉽게 허용하는 면허증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정당성을 엄밀하게 따져서, 폭력이 정말 정의 회복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는지를 묻는 윤리적 제어 장치다. …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로 벌이신 모험은 족쇄를 채워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십자가라는 사랑의 모험을 통해 자발적인 회복을 기다리셨다. (본문 중)
강성호(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 윤리학 교수)
2026년 현재, 중동을 비극으로 몰아넣고 있는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은 현실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참혹하다. 현대 전쟁이 표방해 온 도덕적 기준은 무너졌고, 어린아이들까지 희생되며 일상의 평화가 비극적으로 짓밟혔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의 과제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이런 현실에서 ‘정당한 전쟁’에 관한 오래된 질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국가 간의 거대한 폭력이 발생할 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정치적 이해득실로만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기독교 전통은 이 파괴적인 상황 속에서도 도덕적 식별을 멈추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임박한 위협’을 말하고, 대중은 국가의 폭력을 더 이상 정의로 수용하지 않는다. 이런 혼돈 속에서 기독교인은 어떤 관점으로 칼과 십자가의 경계를 바라봐야 할까. 이 글에서는 정당 전쟁론이라는 렌즈를 통해 2026년의 참상을 들여다보려 한다.

거친 사법 행정으로서의 전쟁
전쟁은 단순히 총칼이 부딪치는 싸움이 아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올리버 오도노반은 전쟁을 ‘거친 형태의 사법 행정’으로 규정한다. 국제사회의 사법 권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판단의 집행으로서 전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미국은 이란의 핵무기 사용을 ‘임박한 위협’이라 규정하며 선제 타격을 감행했다. 겉으로 보면 이는 사법적 처벌로서의 명분을 갖춘 듯 보인다. 그러나 이 명분은 곧 시험대에 오른다. 6개월 전 이란의 핵 능력을 제거했다던 미국의 공식 발표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UN 안보리 같은 국제적 권위체의 판결 없이 자국의 전략적 판단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유스 아드 벨룸’(Jus ad bellum, 전쟁 개시의 정당성)이 흔들리는 지점이다. 명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칼질은 정의를 구현하는 사법 행정이 아니라, 사적인 복수나 기만적인 수사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깨어진 도덕적 한계선과 기술의 기만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유스 인 벨로’(Jus in bello, 전쟁 중의 정당성)가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기독교적 양심은 무고한 피를 흘리는 것을 가장 중대한 사회적 죄로 여긴다. 적의 군대를 향해야 할 칼끝이 무고한 시민을 향해서는 안 된다는 ‘차별성 원칙’은 전쟁의 참혹함을 억제하는 마지막 보루다.
그러나 이란 남부 초등학교에 떨어진 미사일은 이 도덕적 한계선이 얼마나 처참히 무너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75명의 민간인 희생 앞에서 ‘부수적 피해 최소화’라는 수사는 기만적인 변명에 불과했다. 특히 핵무기나 드론 기술이 동원되는 현대전에서, 파괴력이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인 무기는 비례성(특정한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투입하는 무기나 폭력의 수준이 적절해야 한다)과 차별성 요건을 충족하기 어렵다. 존 스토트의 지적처럼 대량 살상 무기는 무차별적 파괴력으로 인해 정당 전쟁의 원칙과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정밀 타격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약한 존재들에게 분노를 투사하는 행위는 정당 전쟁의 요건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전쟁의 종교화라는 함정
기독교인은 국가의 폭력 행사가 신성한 희생 제사로 둔갑하는 ‘전쟁의 종교화’를 경계해야 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9/11 이후 미국이 보여 준 반응을 예로 들며, 국가의 전쟁이 구원의 서사처럼 포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된다면 전쟁의 서사는 진정한 예배와 대립하는 대항적인 예배(counter liturgy)를 만들어 낸다. 전몰자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그들의 죽음을 제물처럼 포장할 때, 복음의 메시지는 왜곡된다. 십자가를 전쟁 승리의 도구로 삼았던 과거의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반면, 평화주의 전통은 산상수훈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며 무력 사용 자체를 거부한다. 십자가를 인내와 고난의 본보기로 삼으며, 신약 시대 신자의 전쟁은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 전통 역시 문자주의적 해석에 근거해 공적 의무(제3자를 보호해야 할 책임)를 방기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핵무기 시대의 전쟁과 교회의 사명
핵무기 시대의 전쟁은 인류 멸망이라는 종말론적 질문을 던진다. 전면 핵전쟁은 전례 없는 비극이겠으나, 그리스도인은 이 위기조차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시며 인류가 스스로 파멸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창 8:21-22).1) 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핵으로 인한 파괴가 아니라 복음의 보편적 선포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무책임한 회피나 맹목적인 평화주의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헤르만 바빙크가 강조했듯, 정부는 구조 악에 저항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신 제도적 장치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이란 정권의 위협을 외면하지 않되, 동시에 국가의 무력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지 않는 ‘불편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국가가 정의로운 판단을 내릴 때는 협력하되, 폭력의 도구로 변질될 때는 복음의 이름으로 가장 날카로운 비판자가 되어야 한다.
족쇄를 벗겨야 시작되는 평화
결국 평화는 힘에 의한 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될 때 시작된다. 정당 전쟁론은 전쟁을 쉽게 허용하는 면허증이 아니다. 오히려 전쟁의 모든 과정에서 정당성을 엄밀하게 따져서, 폭력이 정말 정의 회복을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는지를 묻는 윤리적 제어 장치다.
누군가를 힘으로 눌러 얻은 평화는 잠시 조여 놓은 족쇄일 뿐이다. 진정한 평화는 법과 정의가 올바르게 작동하고, 무고한 이들이 보호받을 때 비로소 싹튼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로 벌이신 모험은 족쇄를 채워 강제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인간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십자가라는 사랑의 모험을 통해 자발적인 회복을 기다리셨다.
2026년의 중동 전쟁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승리의 환상에 취해 칼의 정당성을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정의에 기초한 평화를 촉구할 것인가. 교회의 책임은 전쟁 미화가 아니라, 정부가 폭력의 도구가 되어 무고한 이들에게 잔인한 고통을 가하지 않도록 깨어 감시하는 것이다. 칼의 정당성을 묻는 그 치열한 고민 끝에만, 십자가의 평화가 깃들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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