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기윤실 자문위원장, 고신대 석좌교수)

 

 

지난 1월 15, 17, 18일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당일 매우 심각했던 미세먼지를 줄여보려고 대중교통 무료라는 파격적인 조처를 내렸다. 그에 따른 예산 150억 원은 서울시에서 대신 지급했다. 그러나 서울 시내 도로 교통량은 각각 0.3%, 1.3%, 1.7%밖에 줄지 않았다. 돈만 낭비했을 뿐 효과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언론과 일부 정당이 일제히 박 시장을 공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언론, 어떤 정치인도 박 시장의 호소에 응하지 않은 운전자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비판하지 않았다. 박 시장의 시도는 비현실적일 수는 있었지만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호소에 응하지 않는 운전자들은 분명히 비도덕적이다. 미세먼지가 사람의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웃의 호흡기관에 더 많은 양의 독가스가 들어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불가피하지 않은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분명히 비도덕적이다.

 

공기가 오염되면 모두가 해를 입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더 큰 해를 입는다. 넉넉한 사람들은 공기 좋은 곳으로 이사하거나 공기정화장치가 있는 공간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대부분 나쁜 공기를 흡입하며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대기의 질이 나쁜 곳에는 집값이 내려가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곳에 몰릴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오염산업은 주로 개발도상국에 몰리게 된다. 따라서 환경오염은 심각한 정의의 문제를 일으킨다. 적어도 수도권 인구의 20%는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의 절반이라도 박 시장의 호소에 호응했더라면 가난한 사람들의 허파에 들어가는 독가스의 양을 줄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시민은 자신의 편의 때문에 많은 이웃,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건강이 해를 입는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 알았다 하더라도 ‘나 하나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했을 것이다. 언론, 정치인도 그렇게 무감각한데 일반 시민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달랐어야 한다. 몰라서 잘못했다 하여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눅 12:48). 잘못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고 도덕적으로 책임질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해를 입는다면 그 무지는 비도덕적이다. 모르고 잘못했다 해서 피해자가 고통을 당하지 않거나 그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옳음과 그름은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행위자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영향을 받은 이웃이 손해를 보느냐 않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적 윤리의 특징이다(A. Nygren). 십계명의 윤리적 계명들은 모두 이웃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는 명령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고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더 자신의 행동이 이웃에게 미치는 결과에 민감해야 한다. 직접 끼치는 영향 못지않게 간접적으로 미치는 결과에까지 민감해야 한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에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언론인, 정치인은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로 이런 것을 알게 하는 책임이 바로 설교자들에게 있다. 설교자에게는 단순히 성경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지도 알릴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한 손에는 성경,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어야 하고 그 둘을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는 시민교육, 교양 교육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오늘날 그 어떤 청중도 교인들이 설교 듣는 만큼 강연을 열심히 듣지 않고 어떤 강의도 설교만큼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 좋은 기회를 교인들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교양 교육에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모든 설교자와 교회 교육자들의 엄청난 특권이자 무거운 임무다.

 

한국 사회의 시민교육과 교양 교육을 한국 교회가 책임지고 그리스도인들이 환경보호, 교통질서, 사회 안전, 공명선거, 교육 정의 등에 앞장서면 기독교는 다시 사회의 한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복음도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은 물론이고, 그리스도인 개인들도 소중한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들이 올바로 판단하고 정성을 기울이면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거둘 수 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이며 무거운 의무인가?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 This field is for validation purposes and should be left unchanged.

관련 글들

2024.11.19

인권 기록 활동,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회적 기억을 함께 쓰다(박희정)

자세히 보기
2024.11.18

미등록 아동에게 희망을!(은희곤)

자세히 보기
2024.11.15

베이비부머 세대와 디지털 격차(신하영)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