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학자인 톰 라이트가 공공신학의 전거로 삼은 본문은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이다. 보통 요한복음은 영적이고 내세지향적이라고 여겨지므로 좀처럼 공공성과의 관련성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증언, 특별히 빌라도와의 대화 중에 새로운 질서와 진리를 선포하는 말씀 속에서 공공신학의 중요한 모티브를 발견한다.(본문 중)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서평] 광장에 선 하나님 (God in public)
톰 라이트 / 안시열 옮김 / IVP / 336면 / 16,000원 / 2018.6.25
최경환(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읽고 싶은 책도 읽어야 할 책도 많지만, 늘 바쁘고 분주하여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또 핫한 이슈들은 왜 이렇게 많은지 올바른 정보를 모아 검토하고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성경적이면서도 신학적인 비평과 의견을 제시하는 건 불가능한 욕심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겐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신선하게 조명할 수 있는 ‘예언자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톰 라이트는 바로 그런 상상력을 제공하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성경학자이자 이야기꾼이다.
최근에 여기저기서 ‘공공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래서 언젠가는 톰 라이트도 이 주제를 한번쯤 다룰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광장에 선 하나님>이 바로 그 작업이다. 이번 책에서도 역시 톰 라이트 특유의 글 솜씨와 뛰어난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그가 말하는 공공신학의 특징과 성서적 근거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성서학자인 톰 라이트가 공공신학의 전거로 삼은 본문은 특이하게도 요한복음이다. 보통 요한복음은 영적이고 내세지향적이라고 여겨지므로 좀처럼 공공성과의 관련성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톰 라이트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증언, 특별히 빌라도와의 대화 중에 새로운 질서와 진리를 선포하는 말씀 속에서 공공신학의 중요한 모티브를 발견한다. 톰 라이트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겉보기에는 지상의 통치자에 의해 좌우된 것 같아 보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힘은 강력하고 파괴적이다) 사실은 예수가 하늘의 권세를 힘입어 새로운 질서와 세상을 가져올 분임을 확증하고, 새 질서 안에서 이루어질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사건이다. 예수는 “창조주의 새로운 창조라는 프로젝트”를 개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과업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수되었다(127쪽).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개입하시는데, 그 방법은 기존 권력과 권세를 완전히 부정하거나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 상대적인 것이며 일시적인 것임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공적인 삶’의 어색하고 껄끄러운 관계를 ‘예수’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의 행동을 통해 해소한 것이다.
둘째, 그렇다면 예수는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 갈등을 해소하는가? 톰 라이트는 예수의 사역과 부활은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패턴을 형성하는 하나의 모범이라고 말한다.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언급한 연약하고 온유하고 슬픈 자들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사고는 반드시 세상의 고통을 짊어지고 세상을 다시 새롭게 만드시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 너머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영의 약속을 포함해야만 한다.” (129쪽)
하나님은 역사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예수를 보내셔서 온유하고 겸손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스스로 세상의 악을 짊어지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탱크를 보낸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통해 그들 안에서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신다. 가장 반정치적인 방식으로 정치를 전복시킨 것이다.
셋째,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영역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고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행동 지침을 제시해 준다. 오늘날 대다수의 공공신학자들은 공론장에서의 공적 합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구체적인 현장과 사람들의 목소리와 분리되어 거대 담론에만 몰두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톰 라이트는 공공신학의 원리나 방법론을 제시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할 모범을 간접적으로 제시해 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영국 교회가 부상당한 망명자와 난민들을 발 벗고 나서서 환대하고 필요를 공급해 주는 일,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전에 먼저 교회가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는 일, 이런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공적 영역에 드러나신다. 또한 “터무니없는 빚을 탕감해 주는 주빌리 프로젝트들을 통해, 저소득 가구나 노숙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주택 신탁들을 통해, 빠른 수익을 약속하는 파괴적 방식이 아닌 창조 세계를 보듬는 방식의 지속 가능한 농업 프로젝트들을 통해 예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284쪽) 톰 라이트는 이런 일들이 바로 오늘날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세상을 향해 부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제적인 행동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복음은 단순히 예수 믿고 죄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마치는 단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야기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다.
만약 톰 라이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신학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본다면, 그는 아마도 어렵고 딱딱한 설명 대신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깨어지고 분열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밤이 가장 어둡고 고통이 가장 극심한 곳, 즉 광영이 빛나고 나팔이 울리는 곳이 아니라 아기의 울음소리와 고문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곳입니다. 예수가 그러했듯 우리 역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이들의 곁을 가장 먼저 지켜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공공신학의 역할입니다”(129쪽).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의 소문은 무성하고 빈부의 격차는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로마의 제국의 질서와 영지주의의 유혹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살아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성도들이나, 포스트모더니즘과 새로운 제국 질서 안에서 조심스럽게 신앙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이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광장에서 외롭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다. 그 긴장과 역설 속에서 우리가 예수가 실제로 살아냈던 삶의 방식을 뒤쫓아 간다면, 우리의 광장에서도 하나님의 흔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tip. 이 책에서 필자가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던 부분은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 세상에 관해 말하기’(122~129쪽)였다. 기독교 사회 윤리의 가장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다. 톰 라이트의 신학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