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머니들과 아내들은 남자를 뒷바라지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녀들도 자신을 위해 살 때가 됐다. 그저 ‘남을 위한 인간’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인간’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 생각이 조금 바뀌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몸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이다.(본문 중)

아재들을 위한 페미니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서평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 / 김명남 옮김 / 창비 / 96면 / 9,800원 / 2016.1.20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겐 큰 상처를 주고, 습관처럼 익숙한 행동이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 같은 한국의 40~50대 아재들이 새로운 삶의 습관을 배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동안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딸들에게, 그리고 직장의 여성 동료들에게 쏟아 놓았던 차별의 언어와 습관을 돌아보아야만 할 때다. 이제 페미니즘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최근 여성 혐오와 페미니즘 관련 이슈가 연일 화제가 되면서 ‘모르면 배워야 한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렇다. 우리는 몰랐다. 그러나 ‘몰랐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큰소리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배우고 사과하고 바꿔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배워야 한다.

처음으로 큰맘 먹고 서점에 들어가 페미니즘 코너를 서성였다. 가장 얇고 쉬워 보이고 예쁜 책을 골랐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소설가인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가 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가 눈에 띄었다. 이 책은 그녀의 테드(TED) 강연 원고를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어렵고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그녀의 경험과 일상을 부드러운 언어로 풀어쓴 페미니즘 입문서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원래 그런 것이란 애초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된 진리다. 회사의 사장은 늘 남자였고, 학교에서 반장도 주로 남자였다. 어릴 때부터 가장 높은 자리는 언제나 남자인 것을 보며 자랐다. 그러니 우리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그리고 나중엔 ‘원래 그런 것’으로 의심 없이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애초에는 없었던 남자와 여자의 자리가 정해지고,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규범이 생긴다. 남자는 강해야만 하고, 여자는 늘 조신해야만 한다. 여자 아이들은 앉을 때 다리를 오므려야 하고, 거친 행동을 해서도 안 되고, 얌전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한다.

“남자의 기가 죽는다.” 저자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라고 한다. 여자가 기를 살려줘야만 기가 사는 남자라니. 초라하다.

 

본 서의 저자 Chimamanda Ngozi Adichie. (출처: Youtube 영상 캡쳐)

 

아디치에가 들려주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은 마치 나와 아내의 대화를 엿들은 것처럼 내게도 생생하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는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보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어.” 남자는 주로 저녁에 늦게 들어올 일이 있었지만 참았다며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여자는 주로 직장이나 경력이나 꿈을 포기할 때 그렇게 말한다.

남편이 불평한다. ‘결혼 전에는 부드럽고 상냥한 여자였지만, 결혼 후 갑자기 사납고 툭툭거리는 여자로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변한 것이 아니다. 결혼 전까지는 욕구를 꾹꾹 눌러서 “가식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것뿐이다. 결혼 전에는 진정한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자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결혼을 하려면 최대한 여성답게 가꾸라고 배워왔다.

집안일은 아무래도 여자들이 많이 한다. 그리고 잘한다. 왜 그럴까? 여자들이 집안일을 잘하는 유전자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런데 요즘 TV에 나오는 유명한 셰프들은 죄다 남자다. 하지만 집에서 요리는 대부분 여자들이 한다. 뭔가 이상하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집에 돌아오면 결국 집안일은 여자가 도맡아서 한다. 남자가 눈치를 살피며 빨래를 개거나 아이들을 돌봐주면, 아내는 ‘그래도 우리 남편은 집안일을 많이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매일 집안일을 하면서도 여자는 남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어머니들과 아내들은 남자를 뒷바라지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그녀들도 자신을 위해 살 때가 됐다. 그저 ‘남을 위한 인간’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인간’도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면 생각이 조금 바뀌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몸이 피곤하고 힘들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해서나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사람이 젠더 감수성은 상당히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남자와 여자 모두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인권 담론은 좋아하지만, 여성의 차별을 없애자는 페미니즘은 뭔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구체적인 대상이 여성이고 난민이라고 말하면 은근히 발을 뺀다.

복음주의 운동가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추상적인 구호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면 부담스러워 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동안 성소수자, 난민, 여성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불의한 정치, 극심한 빈부 격차와 같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목소리를 내면서도, 동성애 이슈와 여성 혐오 발언, 난민 문제와 같이 구체적인 타자의 얼굴이 나타나는 문제에서는 은근히 뒤로 숨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모두의 인권을 말하기보다도 구체적으로 여성의 인권을 더 강조해야 한다.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말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누가 도움이 필요한 이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구체성을 결여한 담론은 사상누각이 될 소지가 많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 해야 해.”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정의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먼저 한번 읽고 나서 그대로 친구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책이다.

tip. TED 강연은 짧기 때문에 이 책도 아주 얇다. 한국어판에는 강연 전문과 더불어 「여성스러운 실수」라는 짧은 에세이가 실려 있다.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지만 울림은 강렬하다. 저자가 유명한 소설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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