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와 관련된 가르침은 신약성경에 그리 많지 않다. 그 가운데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내용뿐이다. 이 부분도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일 뿐 예수님이 먼저 적극적으로 가르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속 국가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본문 중)

손봉호(기윤실 자문위원장, 고신대 석좌교수)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의 수가 많고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정부와 정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비민주적인 통제와 인권 탄압에 대해 항거했는데 요즘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대북한 유화 정책과 노동정책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 중에 정부의 정책에 대해 이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나라는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인들밖에 없다. 요즘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미국 기독교인들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것 같다.

정부 정책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런 간섭은 국가와 교회에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긍정적이기 위해서는, 아니 적어도 부정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면밀하게 살피고 좀 더 신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따져봐야 할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일부 보수 교인들이 상황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아 걱정된다. 트럼프 같이 비도덕적으로 행동하고 비기독교적인 정책을 쏟아내는 사람을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80%가 지지하여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심각한 경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국가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와 관련된 가르침은 신약성경에 그리 많지 않다.[1] 그 가운데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내용뿐이다.[2] 이 부분도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일 뿐 예수님이 먼저 적극적으로 가르치신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속 국가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내용에 따라서 국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Peter Paul Rubens의 작품 <Caesar’s Coin>(1612). (출처: Wikipedia)

 

예수님이 사셨던 시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는데, 로마 총독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지만 치안 유지와 행정은 로마 황제의 위임을 받은 분봉왕 헤롯이 책임지고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고 로마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고 물론 바리새인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두 부류를 모두 신랄하게 비판하셨고, 그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싫어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무로 묶으려는 시도에는 한 패가 되었다.

로마가 식민 지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금을 거두는 것과 주민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바쳐야 하는 주민세(poll-tax)는 어느 시대든 인기가 없었다. 로마가 이 세금을 징수하자 주후 6년에 갈릴리 사람 유다는 민중을 충동해서 폭력으로 로마에 항거했다. 유다의 저항운동은 일반적으로 열심당(Zealots)으로 알려진 여러 반로마 항거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로마가 유대인들을 노예로 끌고 가지는 않았지만 주민세와 그것을 거두는 세리들은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로마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가는 그 시대에 가장 민감한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은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로 옭아매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그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등을 돌릴 것이므로 예수님의 영향력이 약해질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이는 로마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엄벌을 받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선 예수님에게 아첨을 쏟아 부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막 12:16). 비록 아첨이지만 이 내용은 그 시대에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상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악의를 숨기고 예수님이 경계하지 않고 솔직하게 생각을 털어놓게 하려는 술책이었던 것 같다. 그래 놓고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물었다. “다른 군소리 하지 마시고, ‘예스’나 ‘노우’, 둘 중 한 가지만으로 대답하시오”라고 한 것이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가운데 공직 후보자나 증인들에게 자기가 틀을 만들어 놓고는 그 틀에 맞게 대답하라고 강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와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첨에 넘어가지 않으셨고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이 짜 놓은 틀에 들어가시지도 않으셨다. “너희들이 세금 바칠 때 사용하는 돈을 내게 보이라”라고 요구했고, 그들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은 제2계명에 따라 사람의 형상이 새겨진 돈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로마 당국에 세금을 바칠 때는 반드시 로마 은전 데나리온을 사용해야 했다. 그 돈에는 황제의 초상과 “TI(BERIUS) CAESAR DIVI AVG(USTI) F(ILUS) AVGVSTVS”(티베리우스 황제 아우구스투스, 신이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시대에는 어떤 화폐가 사용되는 곳은 바로 그 화폐를 발행하는 권력의 지배하에 있다고 인식되었다. 유대인이 데나리온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로마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그 사실을 지적하셨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후에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할 때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라고 거짓말로 고발했다.

어쨌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일단 로마 지배에 항거하는 열심당과는 거리를 두었고 로마의 식민 통치를 기정사실로 수용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으로 끝났다면 바리새인들은 쾌재(快哉)를 불렀을 것이다. 로마 지배와 주민세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정치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신자로 취급하고 그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말씀을 더 하심으로써 그들이 비판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형상이 있지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러므로 돈은 황제의 것일지 모르지만 황제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따라서 데나리온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냐 정치권력이냐의 대비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전체요 정치권력은 그 전체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이 국가나 국가의 정치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태도에 반영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나지 않은 한 국가의 권위와 민주적으로 이룩된 법의 권위를 인정해야 하며 순종해야 한다. 물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수정하며 개혁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정당하다. 그러나 국가가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등의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권위를 무시하고 법을 어겨가면서 항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로마 제국은 민주적이지 않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게 정의롭지도 않았으며 인도적이지도 않았다. 예수님이 그런 로마 통치에 찬동하시지 않으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권력을 비판하고 개혁하는데 목숨을 걸지 않았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지도 않으셨다.

상식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은 민족주의자가 될 모든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민족주의적이 될 이유보다 훨씬 더 많고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어졌고, 메시아가 그 백성 가운데 오셨다.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의 대표라 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은 그저 여러 나라들 가운데 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 백성이 그들이 그렇게 무시했던 이방인에 의하여 지배받고 무시당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도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민족주의를 초월하셨다.

자기 나라가 강할 때는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라면 민족주의를 초월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를 비판했고 지금도 일본 기독교인들은 과거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한국에 사죄하고 있다. 강국 국민은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나라가 식민지가 되어 강국의 지배를 받을 때는 민족주의를 초월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구나 그 식민지 지배가 전혀 정의롭지 못하고 악랄할 때 그에 항거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기독교인이 일본을 비판하지 않고, 일본 정부에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 아닌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회복할 정치적 메시아가 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을 비롯한 상당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메시아라고 믿고 따랐다. 그들이 회복하고 싶었던 나라도 역시 세상 나라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기대를 철저히 배격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식민 지배를 받을 때 기독교인이 정부에 반대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또한 현 정부의 북한 정책, 노동 정책에 대해서 비판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주국가 시민의 당연한 권리고 심지어 의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정치활동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정당을 만들고 정치활동을 할 수도 있다. 물론 필자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이 시점에 기독교 정당을 만드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 활동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거기에 마치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이념적’ 행동이다. 종교적으로 정당화된 이념은 ‘거룩한 확신’이 되고 열광적이 되며 아주 쉽게 비이성적, 비도덕적 행동을 낳을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얼마 전 하버드 로스쿨의 선스테인(Cass R. Sunstein) 교수는 그의 『#공화국: 소셜 미디어 시대의 갈라진 민주주의』란 책에서[3] 미국 국민들이 점점 더 이념적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자녀가 다른 당원의 자녀와 결혼하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가 1960년에는 공화당원의 5%, 민주당원의 4%였는데, 50년 후인 2010년에는 공화당원의 49%, 민주당원의 33%로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뜻밖에도 보수적인 공화당원들이 좀 더 이념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또한 이념 차이가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녀 결혼 문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소셜 미디어(SNS)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점점 심해지고 있다. 한심한 것은, 특히 보수 기독교인들 가운데 이념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최근 사설에 의하면, 원래 보수는 이념적이지 않은데 우파는 이념적이라고 한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이념적인 우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 11일, 한국기독교총연합이 청와대 부근에서 텐트를 치고 릴레이 단식 농성에 돌입했지만 단 하루만에 종료되었다. (출처: 뉴스앤조이 장명성)

 

‘이념’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절대화된 정치적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은 ‘과학’(Wissenschaft)이고 자기 이론과 다른 모든 정치 이론은 ‘이념’이라 평가하면서, 이념이란 “거짓 의식”(falsches Bewußtsein) 혹은 모든 사물을 거꾸로 반영하는 “암실”(camera obscura)과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후에는 역설적으로 마르크스 자신의 이론이 이념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도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마르크스처럼 자신들의 주장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반면, 그것과 다른 주장은 모두 이념이므로 틀렸다고 생각한다. 이념은 일종의 이론적 우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상의 특징은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이 그것을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데 있다. 아무도 우상을 우상인줄 알고 숭배하지 않는다. ‘거짓 의식’인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는 중립적이고 사실에 입각해 있으며, 자기의 생각과 다른 생각은 모두 편향되었고 거짓이라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께는 로마 제국도, 민족주의도, 정치적 메시아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거기에 목을 맬 가치는 없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와 그 의’였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상대적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태도를 지녀야 한다. 보수도 진보도 우파도 좌파도 다 상대적이고 일방적이다. 그 어느 것에 목을 매는 것은 우상숭배다.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만 절대적이다.

이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할 필요가 없는 것,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것에 초연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의 특권이면서 의무다. 그런 태도는 영원히 확실하고 진정한 가치가 있는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돈, 권력, 민족, 우파나 좌파의 이념 같은 상대적이고 하찮은 것들에 몰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대표적인 것이 로마서 13:1-7이며 유사한 내용이 베드로전서 2:13-17, 디도서 3:1에 있다.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에서는 타락한 로마 제국의 모습이 등장한다.

[2] 이 사건은 공관복음, 즉 마태(22:15-22), 마가(12:13-17), 누가(20:20-26) 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 복음서 간에 차이가 별로 없다.

[3] #Republic: Divided Democracy in the Age of Social Media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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