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현재성과 더불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장차 완성될 미래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무시하는 것은 이 세상 현실의 어두움과 고통과 혼란스러움에 눌려서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희망과 비전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본문 중)

현요한(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 말씀의 핵심 주제이며, 그 나라는 어떤 공간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통치를 우선적으로 가리킨다는 점, 그 나라의 주권자는 하나님 자신이며 그 나라가 우리에게로 온다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이런 내용들은 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다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현재성과 더불어 또한 미래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하여 지금 여기에서 미리 맛볼 수 있는 나라로 경험되기도 하지만, 미래에 가서야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도래하였다는 현재성과 그 나라가 아직 다 오지 않았으며 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 미래성의 긴장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서 현존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는 사람들이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지만, 사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새로이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웅장한 선포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현재성은 하나님의 주권의 현재적 실현을 의미합니다. 이미 여러 번 인용한 마태복음 12:28의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11:20은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이미 현재화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그 나라의 왕이심을 인정하지만,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라고도 말합니다(요 18:36). 이러한 말씀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또한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종말론적인 나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 비유들 중 많은 내용이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라든지, 잡은 물고기를 골라내는 비유(마 13:47-50) 등은 종말론적인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마 25:1-13)도 “그 때에 천국은…”이라는 말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장차 올 종말의 때를 깨어 준비하라는 교훈입니다. 작은 묵시록이라고 부르는 마가복음 13장은 예루살렘이 당할 환난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하면서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13:29)라고 하였는데,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21:31에서는 인자가 가까이 옴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옴으로 바꾸어서,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막 14:25; 비교, 눅 22:18; 마 26:29).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미래적 희망과 함께 바라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문에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나라는 아직 다 임하지 않았기에 그 나라가 속히 오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4에서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라고 말하여, 그 나라의 완성이 종말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보여 줍니다.

 

영화 ‘선 오브 갓’ 스틸컷.

 

어찌 보면, 이러한 두 가지 진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소 이상한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세상에 있는 불의한 일들과 악한 일들을 만나기도 하고, 질병과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직 완전히 도래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 둘의 긴장 관계가 불편한 어떤 사람들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친 해석을 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만을 강조하여 그 미래성을 상실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미래성만 강조하여 현재성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단자들은 임박한 미래에 도래하는 종말을 가르치며 “그 날과 그 시”를 특정하면서, 자기네 집단에 와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사람들을 미혹하기도 하였습니다.1) 건강한 종말론 신앙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함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미 온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장차 올 그 나라를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흥미롭게도 신약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 서로 반대되거나 대립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됨을 보여주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과 2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합니다. 유대교 사상에는 종말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상이 있었습니다.2) 그런데 그리스도인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니,3) 종말이 벌써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부활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라는 개념은 이 양면성을 잘 보여줍니다. 부활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추수라고 이해한다면, 추수가 시작되어 처음 익은 열매를 이미 수확하였는데, 아직 추수해야 할 열매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장 22절5장 5절에는 우리 마음에 주어진 성령을 가리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혹은 부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 ‘인치심’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서 주어질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틀림없음을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아라본’이라는 말인데, 흔히 상거래에서 전체 대금을 지불할 것을 의미로서 먼저 준 일부의 돈을 의미합니다. 현대 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의 ‘선취’ 혹은 ‘예기’(prolepsis, anticipation)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맛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롬 14:17)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앞당겨 맛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현재성과 더불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장차 완성될 미래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현실 도피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무시하는 것은 이 세상 현실의 어두움과 고통과 혼란스러움에 눌려서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희망과 비전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고난이 닥쳐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의 마지막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들의 영성은 그 나라가 이미 시작되어 우리 가운데 있음을 기쁨으로 미리 맛보는 기억의 영성이요, 동시에 그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고 기대하는 희망의 영성입니다.4)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능력과 은혜가 어떤 것인지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과 고통과 불의한 일이 많은 세상에서도 낙심하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맛본 것을 초월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과 능력과 정의와 평화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미리 맛본 사람들로서,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세상에 있는 불의와 악과 싸우면서,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를 들면, 1992년 다미선교회는 그해 10월 28일에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휴거가 있다고 가르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도 버리고, 학교도 그만두고, 재산도 다 팔아 헌납한 채, 산속에 들어가서 그날만을 기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기다리던 그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2) 예수님 당시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행 23:6-8).

3) 간혹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을 ‘부활’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자기 수명을 다 살고 결국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4)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구원과 현존을 끊임없이 기억하면서, 또한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잔치를 기다리는 희망의 성례전입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3-26). 이스라엘도 이와 유사하게 끊임없이 출애굽 구원 사건을 기억하면서 살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사 46:9), 특히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나 초막절을 통해 끊임없이 과거의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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