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여성에게 허락한 자유는 남성과 다르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 덕목이다. 순종을 특별히 여성의 덕목으로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에 대한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이러한 윤리의 성별 분업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는 다른 윤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면, 마리아를 마르다가 있는 부엌으로 보내버리셨을 것이다(눅 10:38-42). (본문 중)

양혜원(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재작년 여름 일본 체류가 연장되지 않아 모든 문이 닫힌 것 같은 심정으로 일본을 떠나왔다. 그리고서 이듬해 1월, 그러니까 작년 1월부터 코로나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고, 국경들이 봉쇄되기 시작했다. 만약 체류가 연장되어 일본에 머물렀더라면 이토록 장기화되는 비일상적 일상 속에서 과연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간이라지만, 인간이 만든 사회는 이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어서 언제 어떤 위협을 받을지 알 수 없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인류는 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망할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피부로 느끼겠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음(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을 부각시키면서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한 피터 버거는 인간 세계의 이러한 구성적 성격이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종교가 필요했다고 설명한다. 종교는 이 사회에 필연성을 더해 주어 인간이 만든 의미의 세계(nomos)를 우주적 질서(cosmos)로 확장하고, 그럼으로써 이 세계의 실재가 실재 자체가 되게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은 이 세계를 하나님이 만드시고 개입하는 세계로 이해함으로써 임의적인 인간 사회의 일들로부터 필연의 의미들을 얻어 낸다. 이러한 임의적인 인간 사회의 일에는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도 포함되는데, 많은 종교가 이 두 성별이 관계 맺는 방식을 신의 뜻 혹은 우주적 질서로 설명하고 정당화함으로써 그것을 이 세계의 존재 방식으로 만든다. ‘왜 여자는 혹은 남자는 이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답만큼 기독교인에게 확실한 것은 없다. 기독교를 알기 전 우리 조상들은,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다’라는 답이 가장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종교의 권위를 대체한 게 과학인데, ‘과학적으로 그렇기 때문이다’라는 답을 사람들은 가장 신뢰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일반적으로, 남녀 차별의 원흉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이고, 그래서 종교가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많이들 타박하지만, 사실은 과학도 과학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남자와 여자를 차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드셨다는 말과 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말은 사실상 그 내용에 차이가 없다. 그 근거가 종교냐 과학이냐만 다를 뿐이다. 실제로 초기의 과학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이유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교만 시대착오적이라고 탓을 한다. 그 배경에는 세속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진보적이라고 내세우기 위해서 그 타자로서 종교를 시대에 뒤떨어진 집단으로 만들어버린 역사가 있다. 남자가 우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의 우월함을 비춰 주는 열등한 여자가 필요했고, 그래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만든 것처럼, 세속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진보성을 비춰주는 시대착오적인 종교가 필요했고, 그래서 종교를 시대착오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남녀 차별에 있어서 세속 자유주의는 종교와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으로 거슬러 갈 필요가 있다. 초기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성직 제도의 부패를 폭로하고 수도 공동체를 해산시키면서 각 가정의 남성 가장에게 사제의 역할을 위임하여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한을 강화하고,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강조했다. 이들은 부패한 교회를 대신할 거룩한 가정을 만들었는데, 이 거룩한 가정은 곧 남성 가장의 권한을 성직자 수준으로 강화하는 가부장적 가족이었다.1) 이렇게 재편된 ‘거룩한’ 가정은 근대 국가의 설립 과정에서 세속 시민 사회의 기본 단위가 되었는데, 여기에서 여성의 종속적 역할에 대해 세속 자유주의자들은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이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속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거룩한’ 가정에서 남편에게 종속된 아내들이 필요했다. 사회의 도덕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할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세기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직 종교 자체에 대한 본격적 회의가 일지 않았기 때문에, 세속 자유주의자가 분명한 그룹으로 구분되지 않았지만, 그 후 종교는 기본적으로 비합리적이고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반종교적 혹은 반기독교적인 세속 자유주의가 자리를 잡았고, 이들의 생각이 종교에 대한 세속 사회의 관점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근대 여성 운동도 점차 종교와 결별하면서 종교를 여성 해방의 적으로 보게 되었는데, 역사학자 조운 스캇은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마치 세속 자유주의는 자기편이고 종교는 자신의 적인 것처럼 보게 된 것은 중대한 착각이라고 지적한다.2) 앞서 말했듯, 과학이 얼마든지 과학적으로 여성을 차별할 수 있는 것처럼, 세속 자유주의도 얼마든지 세속적으로 여성을 차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와 종교 집단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최근에 나온 보부아르 연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농 가르시아(Manon Garcia)는 『우리는 날 때부터 순종적인 게 아니다: 가부장제는 어떻게 여성의 삶을 형성하는가』3)에서 보부아르의 사상을 통해서 여성의 순종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순종이 여성성의 본질로 자리 잡은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서 여성은 어떻게 자기 삶을 살라는 부름에 응할 수 있는지 탐색한다.4)

지난 글의 결론에서 18세기 무렵부터 등장한 인간 개인의 자유를 언급했는데, 이 무렵부터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며 자연적 권리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었고, 심지어 루소는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질을 포기하는 것이며, 자유 의지를 상실하는 것은 도덕성을 상실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래서 순종은 도덕적 악, 혹은 병리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는데,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에게 순종은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도덕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가르시아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은 어떻게 자유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고 있다. 이 책이 특별히 의미 있는 이유는 여성의 순종 문제를 보수적인 복음주의 여성이나 무슬림과 같은 비서구 사회 여성을 대상으로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믿는 서구 여성의 경험을 중심으로 연구했기 때문이다. 순종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해방된’ 서구 여성의 경험이 이러하다는 사실은 세속의 혹은 서구의 소위 진보성이라는 것을 따라가지 못해 안달 내는 기독교인들이 한번 찬찬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순종’이 그리스도인 여성에게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여성의 정체성을 넘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 여성이 여성성과 자기됨 사이에서 갈등한다면, 그리스도인 여성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여성성을 부인하지 않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그리스도인 여성이 자기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제법 심각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여성성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적어도 남자의 지배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베스 알리슨 바(Beth Allison Barr)는 『성경적 여성 만들기: 여성에 대한 지배는 어떻게 복음의 진리가 되었는가』에서 말한다.5)

성경이 여성에게 허락한 자유는 남성과 다르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에게 순종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 덕목이다. 순종을 특별히 여성의 덕목으로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종속적 지위에 대한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는데, 이러한 윤리의 성별 분업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는 다른 윤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면, 마리아를 마르다가 있는 부엌으로 보내버리셨을 것이다(눅 10:38-42).

버거의 설명대로 종교가 이 사회에 안정성과 의미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기독교인에게 궁극적 안전과 의미는 이 세계에 예고된 종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회복하실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하나님이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서 어디까지 어떻게 지시하셨는가를 놓고 오늘날 많은 갈등이 일고 있다. 그리고 이 갈등은 비단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집단들 사이의 외적인 갈등만이 아니라, 개인들이 심리적, 영적으로 겪는 내적인 갈등이기도 하다. 그럴수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데, 다음번 글에서는 마지막으로 여성의 정체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계속)

 


1) 이에 대해서는 Lyndal Roper, The Holy Household: Women and Morals in Reformation Augusburg, Clarendon Press, 1991 참조.

2) Joan Wallach Scott, Sex and Secular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8.

3) We Are Not Born Submissive: How Patriarchy Shapes Women’s Liv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21.

4)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서평은, 양혜원, “다시 보부와르와 여성의 순종(submission)을 말하는 이유”, <여성학논집> 38/1 (2021): 77-90 참조. 이 책은 2022년 상반기에 에코리브르에서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5) The Making of Biblical Womanhood: How Subjugation of Women Became Gospel Truth, Brazos Press, 2021. 이 책은 IVP에서 번역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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