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본문을 읽고 또 읽으면 우리에게는 기억이 창조된다.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기억은 사실적 경험과는 다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보고 만지지 못했어도, 말씀과 성령의 권능은 공시적 읽기가 우리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같이 되도록 기억을 창조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격스럽게 예수가 나에게 행하신 다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기억. 오래전의 일이고 마음에서 사라져 가는 것일까? 아마 그렇다면 기억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 것, 사진이나 영상처럼 되살아나 오히려 시간이 가도 더 생생해지는 것을 기억이라 부른다.

 

그런데 기억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다. 정말 싫지만 사라지지 않고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는 기억이 있다. 기억이란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좋든 싫든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내게도 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나를 괴롭히던 섬뜩한 기억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연세가 많으신 여선생님이셨다. 미안한 말이지만 무서운 할머니 혹은 마녀(?)처럼 기억되는 분이다. 어느 날 선생님이 교실에서 무언가 도와달라고 하셨는데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건지 쭈뼛거리는 성격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실수를 저질렀다. 긴장된 그 순간 선생님이 내게 뭐라고 핀잔하셨는데 그렇잖아도 당황했던 나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아직도 그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다. 심지어 그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아 아직도 가끔 재생되곤 한다. 안 그래도 수줍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나는 더더욱 그런 아이로 굳어져 버린 것 같았다. 특히 선생님의 무서웠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하다. 기억은 결코 옛것이 아니다. 기억은 살아남아 현재 나에게 영향을 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기억 속에 있는 그 선생님의 얼굴이 실제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며 그 얼굴이 몇 번은 바뀌었던 것 같고, 심지어 선생님께 면박당하던 그 순간은 삼인칭 시점에서 보는 것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 기억에서 선생님께 혼나는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능한 일인가? 이 기억은 왜 그렇게나 생생하게 재구성되었을까?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아내와 내가 처음 데이트했던 날 밤, 아내를 버스 정류장에서 보내고 나는 집까지 걸어갔다. 사실 나도 버스를 타야 했지만,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먼 길을 걸었다. 그날 밤 집까지 걸어가던 길은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다. 이것도 마치 동영상처럼 살아 있다. 그런데 이 기억도 이상하다. 당시는 아직 쌀쌀한 3월이었는데 기억 속에는 따뜻한 공기가 내 몸을 스쳐 가고 심지어 어디에선가 향긋한 꽃내음도 난다. 이 기억도 많이 조작되었다. 기억은 고정되지 않고 자꾸만 변한다.

 

왜 그럴까?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살아나며, 심지어 변화 발전하는 것은 왜일까? 행복하고 달콤한 기억을 생각해 보자. 왜 달콤할까? 기분 좋은 경험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기억이 아직 되살아나는 것은, 지금 나의 삶에 그 기억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 기억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기억은 옛것이 아니다. 기억은 현재의 필요 때문에 존재한다. 무서운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나의 수줍고 내성적이었던 성격 형성을 누군가에 혹은 무언가에 그 책임을 돌리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래서 그 선생님의 얼굴이 실제 어떻게 생겼는지가 중요치 않다. 필요에 따라 그 선생님은 나쁜 마녀처럼 생겨야 했다.

 

 

4월은 목사들이 가장 곤란해 하는 달이다. 고난주일과 부활절 설교를 해야 하는데, 같은 본문과 주제를 가지고 매년 다르게 설교해야 하니 쉽지 않다. 5년에 한 번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면 편할 것 같은데, 교회의 전통은 변함없이 해마다 이를 기린다. 그러다 보니 목사의 설교와는 별개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 본문은 빠짐없이 매년 낭독된다. 그리고 이 행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마치 내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기억에 심어 놓는 것 같다. 언제든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억으로 말이다.

 

“우리가 아직 무력할 때에, 그리스도님이 때맞춰 불경건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6; 이하 인용은 새한글성경). 여기서 ‘우리’는 약 2천 년 전 로마서의 수신인이나 당시 보편적인 사람들을 가리키지만, 신앙인은 이 본문을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전하는 말씀으로 읽는다. 본래 신앙인은 성경의 최종 본문을 공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1) 우리가 이 본문을 읽고 또 읽으면 우리에게는 기억이 창조된다. 위에서 관찰한 것처럼 기억은 사실적 경험과는 다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보고 만지지 못했어도, 말씀과 성령의 권능은 공시적 읽기가 우리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같이 되도록 기억을 창조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감격스럽게 예수가 나에게 행하신 다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십니다. 곧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그리스도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로마서 5:8).

 

역사상 단 한 번 일어난 일이지만, 이 한 번은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해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리며 우리는 그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다. 심지어 기독교는 간접적 경험을 통해 그 기억을 더 깊이 각인한다.

 

아니면, 여러분은 모르십니까?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게 된 우리가 침례를 받아 그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요? 우리는 침례를 통해서 그 죽음 안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킴 받아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 자신들도 새 생명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6:3-4)

 

모든 교단의 그리스도인들이 침례식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경험과 함께 되살아나는 우리의 기억은 예수와 함께 완전히 죽어 묻혔다가 예수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침례받는 우리 자신의 기억이 된다. 이 기억이 지금 우리의 삶을 만든다. 죽었던 우리가 새 생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각오가 남달라야 한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동참하여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그분의 부활하심에도 동참하여 그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곧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없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는 우리가 죄를 섬기는 종이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6:5-6)

 

바울이 한번은 기도에 대하여 이런 표현을 했다. “또 그 기도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 눈을 밝게 해 주셔서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18). 맨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언급하는 것이, 마치 기억의 메커니즘을 말하는 것 같다. 성경의 문자는 몇천 년 전에 적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운동력이 있다고 한다. 성경을 마음의 눈으로 읽는다면, 성경의 복된 소식은 우리의 살아 있는 기억이 될 것이다.

 


1) 성서학에서 성경 본문이 완성되기 전까지 시간에 따른 본문 형성 과정의 각 단계(구전, 자료, 편집 등)를 고려하는 읽기를 ‘통시적’(diachronic) 읽기라고 하고, 독자가 최종 완성된 본문만 고려하며 자신이 속한 현재 시간 안에서 읽는 것을 ‘공시적’(synchronic) 읽기라고 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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