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헤어질 결심>
모호한 인생사에서 헤엄치기
진느(조혜진 기윤실 청년운동본부장)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로 박찬욱 감독의 모든 영화는 불편했다. 영화 자체의 퀄리티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지만 극단적으로 묘사되는 인간의 민낯은 마주하기 부담스러웠다. 박찬욱 영화치곤 덜 자극적이라 평가받는 헤어질 결심은 ‘잘 만들었다’를 뛰어넘어 오랜만에 ‘좋다’는 애정이 생기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또, 나는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였기에 전지전능한 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런 주님은 때론 나의 자랑을 뛰어넘어, 나의 오만이 된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갖고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을 숨기지 않고 전제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과 기독교가 도덕적인 우월감, 윤리적 교만, 은근한 보수성을 내보일 때는 이를 기가 막히게 감지하고 불편한 마음이 커졌다.
이 미움의 바탕에는 결국 자기혐오가 있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안다. 분명 종교적 윤리가 좋은 작용을 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비(非)신자인 나의 가족들은 내가 청년시절 내내 집을 비우고 밖으로 나돌아 다녀도, 율법을 벗어난 지나친 비행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어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렇게 얌전히 살아온 내 삶은 어느새 그렇지 못한 인생을 배제하며 슬금슬금 우쭐함을 내보인다. 꼴보기 싫게끔. 개인적 기질도 한 몫 했겠지만 20살이 되자마자 배운 신앙과 기독교 문화는 내 사회생활의 기조를 결정했고 일상의 영역과 사회 생활에서 비교적 떳떳하고 성실했다. 하지만 이런 절제와 기개는 붕괴를 두려워하게 만들었고 나를 점점 더 좁은 곳에 가두어 내 발걸음을 제한했으며 무엇보다 포용과 겸손을 잃어버리게 했다.
남편이 죽었지만 의연한 서래와 수사를 위장하여 서래의 주변으로 다가가는 해준을 볼 때도 이러한 마음은 여전히 작동한다. ‘살인자일지도 모르는데, 사랑은 안 돼!’, ‘부인이 있는데, 감정 교류는 안된다구!’. 물론 살인과 혼외 관계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람보다 율법이 먼저 보여서 영화적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의 미묘한 내면 세계는 보지 못한 채 ‘바르지 않은’ 전개에 괜히 주먹까지 쥐고 조바심을 낸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라는 서래의 대사와 ‘나 너 때문에 고생 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는 산오의 유언을 들으며 한쪽 입꼬리가 비쭉 올라가며 냉소를 한다. ‘아름답게 포장할 게 아닐텐데?’, 또한 ‘저 관계는 완성되지 못할거야,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거야.’라며 저주도 한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는 클리셰로 끝나는 로맨스 영화는 아니지만, 나는 자꾸만 앞서 나가는 심판자가 된다. 가려진 교만의 세계관은 이렇듯 타인의 삶에 폭력을 휘두른다. 눈에 티 묻은 이웃을 판단하지만 교묘하게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 품위있는 척 살아갈 때, 대부분의 순진한 사람들은 내 가면에 속아 나를 ‘착하다’고 해줬지만 간혹 내 곁에 머물기를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은 상처와 수치심을 해결하지 못한 연약한 이들이었고, 나는 주님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에겐 가까이 하기 어려운 높은 벽을 가진 인물이었다.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내게, 서래가 인간의 얼굴을 하곤 순수하게 물으면, 내면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둔 교만을 이미 들킨 것만 같아, 쉬이 대답할 수가 없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영화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매력과 사랑의 감정은 방어적이만, 고뇌가 깊고 잔잔하여, 찬찬히 조바심을 녹이고 교만을 반성시킨다. 청색으로도 보이고 녹색으로도 보이는 원피스처럼 인생이란 것은 흐릿하고 불분명한데, 나는 종교를 사용하여 인생의 모호함을 통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답이 아닌 길은 걷지 않기’, ‘자부심에서 나오는 품위를 유지하기’, ‘비난받을 만한 수치는 가까이 가지도 않기’ 등의 가치관은 구원의 결과인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자기 의’인지 슬슬 헷갈린다. 극 중 해준의 아내 정안처럼, 굳이 나의 심판이 없어도 우리네 삶은 지켜지고 계속되는 데 말이다.
가끔 삶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내내 부정한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실수를 포함한 모든 일상의 조각이 내 삶 그 자체이고, 가변적인 인생을 모험하는 걷는 것이 믿음인데, 어느새 나는 ‘옳은 인생 살기 매뉴얼’만 끝없이 되뇌이고 있었다. 마치 인생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라며 그럴듯한 말투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지만, 막상 작은 슬픔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고 마음을 닫아버린 어린아이 같이 군다. 내 슬픔에 정직한 적이 언제였는지, 삶의 슬픔으로부터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전적으로 토로한 게 언제였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래는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바다에 던져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한다. 연민도 없고 격정도 없이 의연하게. 또 다시 난 ‘이건 납득할 수 있는 사랑의 모양인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성장을 남겼는가.’, ‘세상에 건전한 임팩트를 줬는가.’ 등의 지표로 판단을 시작한다. 이렇게 당연한 듯 작동되는 경직된 기제 앞에서 떠오른 묵직하고 단순한 진리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우리 주님은 사랑이시다.’ 심판보다 사랑, 부족한 게 많지만 숱한 삶의 고비를 딛고 다시 한 번 살아낼 수 있었던 힘. 위대한 공헌이 없다고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피범벅이 된 현장을 무서워하는 해준을 위해 범죄현장의 시체를 옮기고 피를 청소했던 서래의 아침은 그 모든 거짓과 작당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것을 향한 마음으로 이해된다. 한 존재를 구원해주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무서워하는 것을 가려주는 마음은 인간이 신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진심 아닐까. 어차피 인생이 막을 수 없는 파도가 계속 오는 것이라면 사랑을 믿고 헤엄쳐 나가고 싶다. 표류하거나 침몰하더라도 그 사랑을 깨닫거나 간직할 수 있다면 의미있는 것이 아닐까. 붕괴 전의 품위와 붕괴 이후의 간절함 중 주님이 기뻐 받으실 제사는 무엇인가. 답변은 이미 성경에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고압적으로 굴고 싶은 면전에, 당당하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반문하듯 돌아온 대답을, 계속 부끄러워하며 상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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