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긴장감 넘치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서사를 과감히 버린다. 모든 사건을 한 페이지 안에 정리하고는 곧장 대화로 돌입한다. 소설의 이러한 구조는 의도적이다. 작가의 이 선택으로 우리는 무력하고 순수한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질문하고 토론하며 답을 찾아나가는 주체적 여성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미리엄 테이브스 지음 | 『위민 토킹』
은행나무 | 2023년 5월 19일 | 328쪽 | 17,000원
소설 『위민 토킹』은 메노파 공동체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에 기반한다. 여성들은 “아침이면 머리가 멍해진 채 고통을 느끼며 잠이 깼다. 그들의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간밤에 폭행을 당한 것이다.” 같은 공동체의 남성들에 의한 성폭행이었다.
분노한 남편들이 가해자 중 한 사람에게 보복하자 여태껏 잠잠하던 주교와 원로들은 그제야 그들을 경찰서로 호송한다. 경찰서에서 그들이 (별다른 처벌 없이) 돌아오기 이틀 전, 여성들은 회의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멀고도 가까운
신앙과 신념을 위해 결속된 공동체 안에서 성폭행이 일어나다니 당황스럽다. 아니 당황스럽지 않다. 놀랍지만 놀랍지 않은, 충격적이지만 진절머리 나는 이야기다. (기독교 내의 경우로만 한정하더라도) 우리는 유사한 사건들을 여럿 보았다. 범죄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설 속 공동체에는 교회의 단면들이 담겨 있다. 지도층의 일방적 권력, 그리고 교리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무마시키려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물론 이런 비극을 늘 있는 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 되겠지만, 반대로 예외적인 일로 여기는 것 역시 옳은 접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악한 사람의 끔찍한 기행’으로 탈맥락화하고 악마화한다면, 재발을 방지할 수가 없다. 변수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 예측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배경과 맥락을 따져 보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도 어떤 부분에서는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과 고민이야말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자 회복의 출발일 것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회의의 안건은 다음과 같다. 가해자들이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공동체를 떠날 것인가? 이 문제를 두고 벌어지는 토론이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초점은 ‘여성들의 대화’이며 ‘대화하는 여성들’이다. 이것이 범죄를 다루는 다른 많은 작품과 구별되는 이 책의 특징이다.
범죄 사건은 자극적인 소재로 사용되기 쉽다. 이를테면, 이 책을 성폭행 장면으로 시작해서 범인이 밝혀지는 시점으로 달려가는 내용으로 구성할 수 있다(그 와중에 독자의 관음적 욕망을 자극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긴장감 넘치고 기승전결이 뚜렷한 서사를 과감히 버린다. 모든 사건을 한 페이지 안에 정리하고는 곧장 대화로 돌입한다. 소설의 이러한 구조는 의도적이다. 작가의 이 선택으로 우리는 무력하고 순수한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질문하고 토론하며 답을 찾아나가는 주체적 여성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누구에게 발언권이 주어지는가,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여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프랑스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을 가져와 과감하게 말해 본다면, “글쓰기는 전적으로 정치적이다.”1)
용서라는 난제
이들이 떠날지 남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가해자를 용서하는 문제 때문이다. 공동체의 주교 피터스는 여성들에게 ‘용서’를 요구한다. 용서를 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그들의 공동체는 믿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를 정말 용서할 수 있는가? 인류의 영원한 난제인 용서가 이들을 가로막고 있다.
이 딜레마 앞에 서면 자연스레 <밀양>이 떠오른다. 신애(전도연)는 이 문제로 붕괴된다. 아들을 죽인 피아노 학원 원장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위민 토킹』은 신애의 한계를 넘어선다. 대화하는 여성들은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다. (스포일러 주의!) 그들은 용서를 강요받기 전에 공동체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둘의 차이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연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성들의 열띤 대화는 용서의 의미를 묻고 서로 수정해 주었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함께 상상했다.
어쨌든 용서는 복잡한 문제니 이쯤 하려 한다. 그전에 딱 하나만 더 언급하고 말이다. 그 어떤 용서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게 있는데, 바로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쉽게 죄책감에 시달리며, 주위의 의심스러운 시선, 이제 그만하라는 말, 가해자의 인생을 망친 자라는 낙인 등으로 죄인의 위치에 내몰린다. 그러나 자신을 외면하고 남을 용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책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용서에 대한 대사 역시 자신을 향한 용서다. “정확히 뭐에 대해서 용서받는다는 거죠?” “네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용서받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용서받는 거지.”
새로운 공동체의 발명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서로의 아픔을 끌어안은 이들은 기존의 공동체에 순응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고, 권위를 상대화하고,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집단을 벗어나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공동체를 떠나지만, 동시에 공동체를 창조한다. 권위/남성에 종속되지 않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여성을 발명한 결과로 새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새로운 관계의 문법을 ‘발명’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회를 다시 만드는 과정”이다.2)
누군가는 공동체를 떠나는 선택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돌봄과 연대의 공동체를 탄생시켰고, 이 공동체는 그 자체로 권력에 대한 대항과 투쟁, “가부장제에 대한 양심적 거부”3)가 된다. 그러므로 떠나는 선택은 역설적이게도 메노파의 깊은 전통, 즉 대안 공동체로서 세상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실현한다. 다음의 인용문이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드리 로드가 『빛의 폭발』에서 자신에 대한 돌봄을 정치적 투쟁으로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한 몸을 취약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집단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돌봄 연대는 권력에 대항하는 집단적인 생존의 연대와 연결되는 정치적 투쟁이다. 반복되는 소수자들의 죽음 속에서 이들이 외치는 ‘살아남자’는 이야기는 급진적인 돌봄이자 연대의 장을 만들어 내는 장치로서 작동하는 것이다.4)
1)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들』(문학과지성사)
2)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오월의봄)
3) 김성한, 『실패한 요더의 정치학』(IVP)
4) 김순남, 『가족을 구성할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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