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장애인의 느린 속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케이퍼는 시간을 근본적으로 재지향(reorientation)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직선적인 발달 과정을 거쳐야 한다거나 나이대별로 완수해야 할 과업이 존재한다는 식의 이론들, 사람이 아닌 자본의 속도에 맞춰져 있는 노동 속도 등, 그간 당연시되어 온 시간성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본문 중)
박은영1)
“낮엔 주로 쉬나요?” 내가 실제로 종종 받았던 질문이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도리어 묻고 싶다. ‘나는 정부 지원금을 받지도 않는데 일도 안 하면 난 무엇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나요? 낮에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삶은 대체 어떤 삶인가요?’ 그들이 상상하는 장애인에게는 구체적인 삶이 없다. 그들에게 장애인은 텅 빈 개념일 뿐, 그들과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실제 존재가 아니다.
지난 7월 번역 출간된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오월의봄)(이하 『페퀴불』)란 책은 ‘불구의 시간’에 대한 책이다. 저자 엘리슨 케이퍼는 사람들이 장애인의 시간을 ‘치유’에만 매진하는 ‘치유의 시간’에 가둔다고 지적한다. 그런 서사는 장애인의 현재를 빼앗고 (장애는 치유되고 사라질 것이기에) 미래에 대한 상상에서 장애인의 존재를 삭제한다.
사람들은 장애인의 과거에 대해, ‘어쩌다가 장애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 한다. 그러나 장애인의 현재에 대해선 그들의 빈 도화지를 채울 생각이 없고, 특히 과학기술이 발전한 ‘밝은 미래’엔 당연히 장애인이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여긴다. 케이퍼는 ‘우리가 모두 같은 미래를 바란다는 믿음, 이를 합의했다는’ 이러한 추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책을 시작한다.
저자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상상은 결국 현재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현재의 장애를 끝없는 비극으로만 개념화하는 문화, 장애인의 실제 현실과 일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문화가 상상하는 ‘더 나은 미래’에는 장애가 부재할 수밖에 없다.
케이퍼는 장애가 없는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거나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장애인의 존재를 미래에 대한 위협으로 상정하는 인식이 산전 검사, 우생학, 시설화 등 장애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 역사를 지적한다. 이에 자신은 장애인의 존재를 삭제하는 미래상을 거부하며, 오히려 장애가 있는 미래를 욕망한다고 선언한다.
‘장애가 있는 미래를 욕망하다니! 그래도 되는 거야?’ 글을 읽는 동안, 내 안에 박혀 있던 ‘도덕 법칙’(장애는 가능하면 없애야 하고 그게 안 되더라도 재활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이 꿍얼거린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단숨에 책을 읽어 내린다. 두어 달 넘게 겹겹이 쌓여온 울적함이 케이퍼의 문장들로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늦봄쯤부터 나는 미래에 대한 절망감에 꽤 오래 젖어 있었다. 저 먼 미래에서 희미하게 찰랑이던 어둠이 울컥 현재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내가 쉬면서 살 거라고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내 미래가 밝을 거라고 말해주곤 한다. 꾸준히 열심히만 하면 기회는 계속 찾아올 거라고 격려해 준다.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꽤 오래 살아남아 계속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꾸준히 열심히’란 말에 나는 멈칫한다. 한국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큼 ‘꾸준히 열심히’는 어느 정도일까? 언제부턴가 선배들을 보면 부러움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오기 시작했다. 할 일은 늘어나고 감당해야 할 책임은 갈수록 더 복잡하고 난해해진다.
나는 그 삶을 감당할 수 있을까? 누구나 닥치면 다 한다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들은 다들 비장애인 선배들이고 나는 장애인이다. (사회 활동을 하는 장애인들과 연결될 기회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닥치면 그들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을까? 40대, 50대의 나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노동은 얼마만큼일까? 만약 충분한 노동을 할 수 없다면, 내 노후는 어떻게 될까? …….
미래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으면 “모두가 그래. 나도 불안해”란 대답이 돌아온다. 맞는 말이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은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모두가 불안해”라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차이를 소거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일상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평균적으로 비장애인의 생활비를 초과하지만, 장애인은 노동을 하거나 수익을 올릴 기회를 박탈당해 왔다. 그럼에도 많은 장애인들이 노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노동의 현장도 장애인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이긴 마찬가지다.
비장애인 노동자가 8시간 동안 하는 일을 장애인 노동자는 더 많은 시간 일해야 마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비장애인이 80이란 성과를 낼 때 장애인은 적어도 85 정도는 달성해야 ‘쓸 만한 사람’으로 간신히 인정받을 수 있다는 압박을 느낀다. 하지만 당연히 그들에게 맞지 않는 환경 속에서 노동 생산성을 높여 비장애인보다 빨리 많은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다.
비장애인에게 맞춰진 노동 환경은 장애인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하기도 한다. 장애인 노동자들은 이 때문에 비장애인보다 빨리 노동 현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실제로 30-40대 장애인 노동자들은 때로 “미래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지만 장애인의 불안에 주목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전 세대와는 다를 미래에 대한 상상과 대비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 가운데 (노동 여부와 상관없이) 장애인의 미래를 구상해 주는 계획은 없다. ‘모두가 나이가 들면 장애나 질병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미래에 대한 상상에 현재 장애인들의 자리는 없다.
지난봄과 여름 내내 ‘결국 나에겐 미래가 없다’고 절망하고 있던 내게, 앨리슨 케이퍼는 그럼에도 기꺼이 장애인이 존재하는 미래를 꿈꾸자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다양한 몸이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미래는, 표준이 아닌 몸을 가진 사람들의 노력이나 그들에 대한 ‘치유’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케이퍼는 반대로 시간을, 미래에 대한 상상을 바꾸고 ‘불구화’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단순히 장애인의 느린 속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케이퍼는 시간을 근본적으로 재지향(reorientation)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직선적인 발달 과정을 거쳐야 한다거나 나이대별로 완수해야 할 과업이 존재한다는 식의 이론들, 사람이 아닌 자본의 속도에 맞춰져 있는 노동 속도 등, 그간 당연시되어 온 시간성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시간 속에서만 살아온 우리가 어떻게 다른 시간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 다루기는 어렵지만 『페퀴불』의 각 장은 다양한 영역에서 구체적으로 시간의 불구화 작업을 시도한다. 그럼에도 상상력에 자신 없는 나로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선 시간에 대한 다른 상상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게 사실이다. 다만 어쩌면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예전에 친한 언니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장애인 중에 8시간 노동이 힘든 사람들을 위한 파트타임 일자리들이 있대요. 그런데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결국 핵심 부서에는 절대 못 가요. 결국 오래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자리는 아주 한정적인 거예요.”
해야 하는 일은 꼭 해야 한다고 믿는 언니가 대뜸 대답했다.
“그래? 모든 사람들이 4시간씩만 일하고 살아야겠네!”
현실에 대해 한 말에 너무 비현실적인 답이 돌아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가끔 언니의 대답이 계속 생각난다. 언니가 던진 방향이 맞다. 사회 전체의 시간의 방향을 바꾸고(케이퍼의 표현처럼 ‘재지향하고’) 미래에 대한 전혀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상상에서 늘 배제되어 온 ‘다른 몸’들이 미래를 획득하는 길은 더 열심히 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장애가 있는 몸과 마음을 시계에 맞추는 대신, 시계를 장애가 있는 몸과 마음에’ 맞춰야 한다. 사람들을 밀어내며 일직선으로 달릴 줄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의 시간을 비틀고 미래를 불구화해야 한다. 시간을 재반죽하고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자!
1) 『소란스러운 동거』(IVP, 2022)의 작가이며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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