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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에서 내밀함과 진실함이 감지되는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가 쓰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에는 그의 개인적 경험과 시대적 맥락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끄러움은 자신과 유리된 채 공허하게 흩어지지 않는다. 그는 당위와 윤리로서의 부끄러움을 주장한 게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감각했다. (본문 중)
박예찬(IVP 편집자)
송우혜 지음 |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 2014년 5월 20일 | 562쪽 | 16,000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확한 조사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윤동주일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시’라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꼽힐 수도 있겠지만, 시인으로서는 윤동주를 앞설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나도 그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다. 누가 먼저 묻지 않았는데도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니, ‘좋아한다’에서 좀 더 심화된 정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랑한다’까지는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이 윤동주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다. 청춘, 저항 시인, 친숙함…. 그의 시 안에서 이유를 찾자면, ‘부끄러움’을 꼽을 수 있겠다. 프레데리크 그로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가벼운 당혹감, 스스럼, 수줍음이 즉각 감지되는 사람들에게 애착이 간다. 그런 자신감의 결핍에서 우정을 굳건하게 결속해 줄 무언가를 발견하는 모양이다.”1)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이 아닐 것이다. “수줍음이 즉각 감지되는 사람”, 윤동주는 그런 사람이다.
부끄러움의 무게
우리는 윤동주가 무엇을 부끄러워했는지 국어 시간에 배웠다. 잘못된 시대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부끄러움, 창씨개명을 했다는 부끄러움, 혼자 안락하게 공부나 하고 있다는 부끄러움…. 그러나 『윤동주 평전』의 저자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저자는 윤동주가 부끄러움의 본질을 알아낸 계기로 ‘낙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은진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숭실중학교로 편입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데, 한 학년 아래로 배정된다. 4학년인 그가 3학년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 형편이 좋지 않았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치렀던 편입 시험이었기에 상심과 미안함이 컸을 것이고, 친구 문익환도 통과한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점도 민망했을 듯하다.
또 하나, 송몽규에 대한 감정도 중요하겠다. 영화 <동주>를 통해 널리 알려진 윤동주와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 그는 윤동주보다 등단도 먼저 하고, 성적도 우수했으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임시 정부를 찾아가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윤동주보다 한발 앞선 것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송몽규와의 관계에서 오는 여러 감정과 경험 역시 시인의 부끄러움의 뿌리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에서 내밀함과 진실함이 감지되는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가 쓰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에는 그의 개인적 경험과 시대적 맥락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부끄러움은 자신과 유리된 채 공허하게 흩어지지 않는다. 그는 당위와 윤리로서의 부끄러움을 주장한 게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감각했다. 다시 말해, 윤동주의 시 전면에 흐르는 부끄러움은 그의 머리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낸 그의 정수다. 바로 이것이 “죽는 날까지 이르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2)라는 짧은 문장 앞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이 구절을 두고 저자 송우혜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윤동주 이전에 이토록 자기의 전 존재를 던져서 사람의 삶이 업보처럼 지니게 마련인 근원적인 부끄럼과 마주 선 존재가 없었다. 우리는 무수한 세대를 기다려서야 드디어 이 구절을 얻었다.… ‘부끄럼’이란 것은 인간이 지닌 일상적인 정서의 하나라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실존 그 자체에 관한 성찰의 한 양식이라는 것을! 그렇다! ‘부끄럼’이라는 것은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이 그들의 불완전함을 슬퍼하는 참회의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정직하게 부끄럼에 마주 서자면 그의 전 존재, 그의 전 중량이 필요하다.
부끄러움과 슬픔
‘전 존재를 던져서 부끄럼과 마주 선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윤동주의 시 한 편을 살펴보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의 시 중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이 시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곧바로 알 수 있다. 놀랍지 않게도 시의 제목은 “팔복”이다.
놀라운 것은 슬픔만이 여덟 번 반복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복이 있다고 선언했던 것들이 전부 슬픔으로 바뀌어 있다. 왜일까? 아마 윤동주는 “슬퍼하는 자”로 바꾸어도 의미가 통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아니, 슬픔이라고 쓰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그가 보기에 이들은 다름 아닌 슬퍼하는 자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통함을 향해 굴절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슬픔’이란 이토록 넓고 깊은 의미를 가진다.
그는 이 막대한 슬픔을 부끄러움이라는 그릇에 담는다. 윤동주에게 있어 부끄러움은 슬픔의 변주다.3) 그의 부끄러움에는 슬픔이, 슬픔에는 부끄러움이 따라온다. 그러므로 ‘전 존재를 던져 마주하는 부끄러움’은 팔복의 삶을 살아 내는 (또는 살아 내지 못하는) 슬픔이다. 이 모든 것을 지고 사는 자는 필연적으로 부끄럽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부끄러움은 크고 힘이 세다. “올바른 자의 수치심, 그것은 그가 인간의 타락을 마주하고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고통스러운 시련”이며, “분노와는 전혀 달라서, 결국엔 힘이 되는 고결한 노여움이고, 우리를 양심 한가운데 자리 잡게 해 주는” 태도이기 때문이다.4)
적극적 부끄러움
분노가 가득한 오늘날 분노로 맞서려는 사람이 많다. 시대를 향해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시대를 슬퍼”하는5) 사람은 드물다. 시대 속에 몸담은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고, 그런 사람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질문은 ‘이 시대에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인가’보다는, ‘시대를 어떻게 부끄러워할 것인가’ ‘언제까지 지치지 않고 슬퍼할 수 있을 것인가’이지 않을까.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 데/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던 그의 시구6) 앞에서 나의 이 글과 이제껏 쉽게 써 버렸던 글들을 부끄러워해야 하겠다.
1) 프레데리크 그로,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2) 윤동주, “서시”.
3) 김상봉, 서경식, 『만남』.
4)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5) 윤동주, “바람이 불어”.
6)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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