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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문학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확한 해답이 아니라, 체험적 참여다. 성경은 독자가 주어진 질문에 올바른 답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문을 통해 사건을 경험하고, 메시지를 내면화하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묵시문학은 독자에게 신앙의 본질적 경험을 제공하는 문학적 도구다. 답을 찾으려는 자는 그 메시지를 놓칠 것이다. (본문 중)

 

기민석(한국침례신학대학교 교수, 구약학)

 

메뚜기인지 말인지, 아니면 종말적 전쟁을 수행하는 그로테스크한 초월적 존재인지, 요엘서 2장 4-5절을 읽고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의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는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검불을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줄을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묵시문학은 아니지만 요엘서는 묵시적이다. 이 책의 종말 사상과 우주적 재앙 묘사는 후대에 발달한 묵시문학의 성격과 유사하다. 묵시문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본문이 수수께끼나 암호 같다는 것이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단 7:13). 다른 본문에서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명확하게 계시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해 주기도 했다. “털이 많은 숫염소는 곧 헬라 왕이요, 그의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8:21). 반면 “인자 같은 이”는 해설이 없다.

 

묵시문학의 암호성은 해석을 닫지 않고 열어 놓는다. 요한계시록의 ‘적그리스도’는 본문에서 명확히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각 시대의 독자들은 이를 자신들의 현실에 맞춰 재해석했다. 그래서 계시록의 적그리스도는 시대에 따라 로마 황제이기도 했고, 특정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해석의 유연성은 묵시문학의 모호성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본문이 명확히 정의되어 있었다면 이런 다양한 재해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묵시문학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갇히지 않는다. 모든 시대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열린 텍스트다.

 

‘인자 같은 이’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그래서 해석은 열려 있다. 이를 성서학자는 천사장 미가엘로, 교회 목사는 예수로 보는 것이 일반이지만, 홀로코스트를 겪던 유대인들에게는 쉰들러로도 해석된다. 그러고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정체를 추측하고 싶어 한다.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하나님의 귀하신 뜻을 놓칠까 봐 그럴까? 사실 누구인지 몰라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는 눈곱만큼도 지장이 없다. 문제는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우리의 지적 욕망에 있다. 묵시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 ‘덫’을 놓았다. 이 덫은 인간의 지적 호기심과 자만을 교묘히 겨냥한다.

 

 

언어의 ‘모호성’이 어떤 의도나 효과를 가지는지 정리해 보자. 첫째, 언어의 모호성은 해석의 과정에 있어 적극적인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모호함의 불확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독자는 본문에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게 된다. 둘째, 모호성은 독자의 읽기 경험을 정적으로 극대화한다. 모호한 언어로 인해 독자의 심상이 교란될수록 의도된 해석적 경험이 극대화되는데, 위에서 인용한 요엘서 본문이 의도한 해석적 경험은 바로 ‘공포’다. 정체가 모호하여서 더 무서운 것이다. 셋째, 그리고 핵심적으로, 의도된 묵시문학 본문의 모호성은 독자의 읽기에 ‘덫’을 놓는 것이다. 학문적 유희에 몰두하거나 자기만의 정답을 고집하는 사람은 이 덫에 걸려 본문의 진정한 의도를 만나지 못한다. 반면,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본문을 통해 들으려는 사람은 이 덫을 피하고 본문의 의도를 ‘경험’할 수 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마지막 날’은 그때와 시간이 감추어져 있다(행 1:7). 그런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은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것을 자기가 나서서 들추려 해왔다. 언제 오시는지 모르기 때문에, 마치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실 것처럼 깨어서 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겸허하게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적 자만심을 충족하는 것에 더 무게를 두면, 그래서 덫에 걸리면, 주님이 묻은 것을 감히 자기가 파내려 한다. 덫에 걸리면 본문의 참 의도를 경험하지 못한다. 반면 모호함으로 인해 심란해하고 본문을 사건으로 경험하는 자는 본문의 올바른 의도를 경험한다. 묵시적 언어는 독자를 교란한다. 본문의 답은 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1)

 

요엘서 2장의 전쟁 이미지는 이런 의도된 모호성의 대표적인 예다. 그 군대는 메뚜기 떼 같기도 하고, 인간 군대 같기도 하며, 초월적인 존재일 가능성도 있다. 명확한 해답은 없다. 하지만 본문이 전하려는 의도를 ‘경험’하는 데 이 해답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메시지는 단순하다. 여호와의 날은 가까웠고, 그날은 두렵고도 경외스러운 날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의 체험이다. 독자는 모호함 속에서 고민하며 본문이 가하는 정서적 압박과 혼란을 체험한다. 독자는 그날의 심판이 갖는 두려움에 어느새 깊이 빠져든다. 공포를 경험한다. 이 공포는 본문의 의미를 이해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호성은 환영받지 못한다. 성경의 본문이 그리고 해석이 불분명하다는 것은 신앙인에게 매우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은 요엘서의 모호성을 억지로 제거하려는 시도도 했다. 예를 들어, 한국어 ‘새번역’ 성경은 요엘서 2장 2절을 번역하면서 원문에는 없는 ‘메뚜기’를 삽입하여 편집 번역했다. 본문의 모호한 군대를 메뚜기로 명시하며 독자의 혼란을 해소하려 했다. 결과는 어떨까? 독자는 본문의 의도인 심판의 공포를 체험하는 대신, 그 군대를 메뚜기로 단정 짓고 단순히 메뚜기 떼의 습격이라는 사실의 인지에 머물게 된다. 원문이 일으키는 모호성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면, 모호성이 야기하는 독자의 해석적 참여와 상상력은 제한되며, 본문의 진정한 의도, 즉 그날의 공포를 독자가 경험하기 어렵게 된다. 이는 본문이 의도한 문학적 신학적 효과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묵시문학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확한 해답이 아니라, 체험적 참여다. 성경은 독자가 주어진 질문에 올바른 답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문을 통해 사건을 경험하고, 메시지를 내면화하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묵시문학은 독자에게 신앙의 본질적 경험을 제공하는 문학적 도구다. 답을 찾으려는 자는 그 메시지를 놓칠 것이다. 반면, 본문의 정서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는 참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성경은 이해가 아니라 경험하는 책이다. 성경은 텍스트가 아니라 말씀이기 때문이다.

 

묵시문학의 역설과 맞닿아 있는 예수의 발언과 그 반응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39-41). 보지 못한다는 겸허와 본다는 자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바로 성경 읽기다.

 


1) 위 두 문단은 다음에서 요약 인용. 기민석, “요엘 2:1-11에 나타난 전쟁 이미지 연구: 묵시 언어의 모호성과 그 효과.” <복음과 실천> 59.1 (2017): 5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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