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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한 문화평론가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징어 게임>이 지금까지 제작된 데스 게임 장르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앞서 이야기한 욕망의 힘이 얼마나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 사회를 얼마나 좌지우지하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본문 중)

이민형(성결대학교 파이데이아학부 교수)

 

시즌 1의 엄청난 성공 때문이었을까? <오징어 게임 2>가 OTT 채널에 공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는 이런저런 혹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조금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즌 1을 흥미롭게 보았던 기억을 되새기며 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어느새 마지막 에피소드를 시청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마이너 장르의 영화나 드라마를 선호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매우 몰입해서, 즐기면서 감상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물론 주변의 혹평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후속편이다 보니 <오징어 게임 1>에 비해 시청자가 느끼는 신선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시즌 1에서 공간의 디자인이 주었던 신선한 충격이 시즌 2에서도 이어지지는 못했다.) 또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고, 시즌 3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그래서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감점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데스 게임 장르물 중에 <오징어 게임> 시리즈만큼 스케일, 캐릭터, 연기, 영상미를 고루 갖춘 영화나 드라마가 얼마나 될까? 그것은 시즌 1이나 2 모두 해당하는 이 시리즈만의 장점이었고, 따라서 <오징어 게임 2>는 이 정도면 전편의 아성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수작이라 평가할 만했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전편과는 다른 양상의 갈등 구도였다. 참가자들의 생존에 초점을 맞춘 시즌 1과 달리 시즌 2의 주제는 게임에 대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저항의 주체는 시즌 1의 주인공인 성기훈이다. 전편의 게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승자 성기훈은 400억이 넘는 상금을 수령한다. 하지만, 그는 수억의 돈으로 영위할 수 있는 편리한 삶보다 사람의 목숨을 유흥거리 삼는 게임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고발하려는 불편한 수고를 선택한다. 그래서 서바이벌 게임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것을 만든 무리를 파훼하기 위해 다시 게임에 참가한다. 그러나 게임을 진행하는 쪽에서는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게임의 현장 관리자인 프론트 맨이 성기훈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참가자로 신분을 속이고 게임에 참여한다. 성기훈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지만, 성기훈의 계획을 치기 어린 행동으로 여기고 있는 관리자는 그것을 와해하기 위해 순간순간 교묘한 방해 작전을 펼친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 두 인물 사이의 묘한 긴장 구도를 가슴 졸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제 발로 들어온 사람들

 

하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성기훈의 계획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저항으로 인해 좀처럼 진행되지 못한다. 그 저항은 다름 아닌 게임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400여 명의 다른 참가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들 대부분은 각자 나름의 사정으로 돈이 필요해 게임에 참가한 이들이다. 물론 게임이 시작되기 전까지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당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그러한 상황을 마주하고 난 후에도 게임을 계속하기를 원할 만큼 돈을 욕망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의 욕망은 극의 초반부, 게임 참가자들의 유인책인 “딱지남”이 공원에서 노숙인들을 상대로 벌이는 기행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빵과 복권을 가지고 선택을 하라는 그의 말에 대다수의 노숙인은 빵 대신 복권을 선택한다. 당장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50%의 확률보다 훨씬 더 낮은 복권 당첨의 확률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것이다. “나는 (당첨이) 될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단순한 확률의 셈조차도 흐리게 만드는 그 욕망은 노숙인들이 복권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400여 명의 참가자들이 게임에서 탈락하면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게임의 지속을 원하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욕망을 가진 이들의 눈에 성기훈의 저항은 불편한 이상주의, 비현실적인 선택일 뿐이다. 아니, 자신들에게 주어질(지도 모르는) 상금을 눈앞에서 빼앗아 가는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성기훈의 계획에 거칠게 저항한다. 어쩌면 참가자로 신분을 속이고 성기훈과 같이 행동을 하는 프론트맨이 그토록 대담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참가자 대다수가 “나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묘사가 되지는 않지만, 그의 독백 중에는 그 역시 프론트맨이 되기 전에는 돈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참가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 이기심에 충만한 욕망을 직접 경험하기도 했고, 그 욕망에 먹히고 만 사람들을 지켜보기도 한 그가 그러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우리는 오징어인가?

 

시즌 2에서 성기훈의 저항은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마무리된다. 아직 시즌 3이 남았기에 그것이 끝이 아닐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오징어 게임>이 현대 한국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는 감독의 말은 성공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떨어뜨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그릇된 욕망이 이기심과 만나 사회적 가치를 묵살하는 장면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오징어 게임>에 반영된 것이라면 결국 욕망의 승리로 끝난다고 하여도 함부로 그러한 결론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오히려 한국 사회를 적나라하게 묘사했구나 하고 칭찬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전에 한 문화평론가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오징어 게임>이 지금까지 제작된 데스 게임 장르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앞서 이야기한 욕망의 힘이 얼마나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 사회를 얼마나 좌지우지하고 있는지를 대변한다. 수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나는 성공하겠지”하는 마음으로 부동산과 주식, 그리고 전자화폐에 자신이 가진 것을 몰아넣는다. 그것이 결코 성공을 향한 긍정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지독하게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라고 이야기해도, 그들은 멈출 줄을 모른다. 오징어 배의 불빛에 취한 오징어가 죽음의 춤사위를 성공을 향한 날갯짓이라 생각하며 수면으로 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 사회는 진짜로 <오징어 게임>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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