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2-3회 발행되는 <좋은나무>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무료),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우리가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는 단 몇 가지 항목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신앙생활 속에서 켜켜이 축적된 경험과 실망, 갈등과 고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 만들어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얽힌 실타래에 가깝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실타래가 배신감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깊은 허무함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구멍일 것이다. (본문 중)

 

김자은(기윤실 청년위원)

 

‘가나안 성도’, 나는 그 이름이 여전히 달갑지 않지만 이들은 이미 한국 교회에서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관련 연구나 기사도 적지 않고, 내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는 흔하다. 무엇보다 나 자신도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신앙은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나는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어 나름대로 재치 있게 일컫는 ‘가나안’이라는 이름이 담아내지 못하는 사연들과 그 이면에 숨겨진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궁금하고 그들에게 마음이 간다.

 

왜 요즘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가기 싫어할까? 혐오와 차별이 마치 하나님의 공의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봉사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무급 노동과 그로 인한 소진 때문일까? 혹은 위계와 권위주의로 중무장하고는 명백한 잘못조차 문제로 지적하지 못하게 만드는 폐쇄적인 공동체 문화 때문일까? ‘하나님 나라’를 입에 담으면서도 정작 돈과 힘의 논리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지곤 하는 교회의 민낯 때문일까?

 

이런 말들이 언뜻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우리가 교회에 가기 싫은 이유는 단 몇 가지 항목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신앙생활 속에서 켜켜이 축적된 경험과 실망, 갈등과 고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 만들어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를 얽힌 실타래에 가깝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실타래가 배신감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깊은 허무함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구멍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졌다. 나처럼 교회 가기 싫은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데, 다들 그 얽힌 실타래를 쥔 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떤 고민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가. 교회 안에서는 도무지 배울 기회가 없었던 교회 밖 신앙을 이들은 어떻게 이고 지며 살아가고 있는지 들어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몇 가지 유형이나 통계적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 이 다채롭고도 반짝이는 존재들의 삶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또 무엇보다 나 자신은 대체 왜 이런 경계 위를 자꾸만 걷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고 싶었다.

 

이런 개인적인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교회 가기 싫은 사람들의 순모임’(이하 ‘교가싫순’)이다. 누군가에게는 도발적으로, 누군가에게는 위로로, 누군가에게는 서글프게 들릴 이 이름을 내걸고 모임을 시작했을 때는 확신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라는 어쩌면 보수적이기도 한 이 기독교 단체 안에서 이 모임을 꾸리며 나는 스스로 묻곤 했다. 교회에 가기 싫다는 사람들을 기독교 단체로 불러들여도 될까? 왜 나는 이들을 한곳에 모아 보고 싶은가? 그리고 나와 이 사람들은 왜 교회는 거부하면서도 이 모임에는 기꺼이 발걸음하는가?

 

그냥 한번 나와 같은 이들을 만나고 싶어 특별한 계획도 형식도 없이 시작한 이 모임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고, 네 번째 시즌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고 있다. 모임이 거듭될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교회가 싫어서, 신앙의 방황 때문에,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을 몰라서 이 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우리는 교회를 향한 뜨거운 질문을 지니고 있어서, 하나님을 포기할 방법을 여전히 모르겠기에, 신앙이란 선물을 꼭 부여잡고 이곳에 모이고 있는 것 같다. 기성 교회의 견고한 시스템과 그 안에서 반복되는 확신에 찬, 그러나 폭력적인 말들에 지쳐 버리긴 했지만, 믿음을 향한 갈증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이들이 알음알음 소식을 듣고 이곳에 모였다.

 

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은 누군가에게 ‘설명할’ 만큼 거창하지 않다. 이 모임은 처음부터 꼭 들어맞게 정해진 계획도 형식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올바른 형태의 신앙이 무엇인지 정의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모인 이들의 말을 듣고 또 들을 뿐이다. 우리는 신앙이 모두 다른 모습일 수 있음을, 사람들은 늘 불안정한 상태일 수밖에 없음을, 때론 확신보다 머뭇거림이 더 강력한 신앙의 언어일 수 있음을 인정하며 서로의 빛을 존중하고 공감할 뿐이다.

 

교회 안에서는 감히 꺼내 놓을 수도 없었던 질문들을 우리는 안전한 이 모임에서는 스스럼없이 던진다. 전혀 다른 생각들이 교차하지만 모두 신앙의 일부로 존중받는 경험,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편하게 튀어나오는 말들로 늘어놓는 시간 또한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 머무는 시간임을 인정한다. 누구도 자신의 자아와 주장만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이 모임에서 해방감을 누리는 가장 큰 이유다. 교회가 요구하곤 하는 전형적인 태도와 명확한 신앙고백은 더 이상 필수 조건이 아니다. 대신 각자의 다채로운 삶과 경험에서 출발한 언어들이 서로를 지우지 않은 채 겹겹이 쌓인다. 내 말이 타인의 ‘정답’에 의해 지워지지 않는다는 안온함 속에서 우리의 신앙도 조금씩 깊어져 간다.

 

우리는 교리적 명제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이의 작은 신음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를 더 많이 묻는다. 신앙은 더 이상 안전한 울타리, 견고한 건물 속에서 관리되는 무언가가 아니라, 불확실한 삶의 자리에서 계속 조율하고 다시 생각해 보는 선택이다. 그러니 ‘교회 가기 싫다’라는 말은, 교조주의적 교회로부터는 등을 돌렸지만 교회가 지녀야 할 본질만큼은 끝내 거부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숨같이 내뱉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교가싫순’은 아마도 그 경계를 걷는 모임일 것이다.

 

‘교가싫순’은 교회를 대신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교회가 감당치 못한 사람들을 잠시 붙잡아둔다. 우리가 여전히 기독교 신앙 아래 머무는 이유는 이 신앙이 도저히 버려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완성된 확신보다는 정직한 머뭇거림을, 안정된 제도보다는 위태로운 경계를 택하더라도, 하나님을 도저히 버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교회 밖’ 모임으로 쉽게 예단되는 이 모임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 역설적인 여정이 나는 무척이나 흥미롭고 즐겁다. 우리 모임의 참여자들에게도 이 자리가 참으로 안온하고 재미있는 쉼터가 되길 기대하며 어느덧 시즌 4를 마무리해 간다. 비록 우리가 기존 교회를 대신할 수도 없고 그러기도 싫지만, 이런 머뭇거림과 질문 속에서 비로소 진짜 ‘교회’가 되어가는 우리를 발견하게 되길 기도한다.

 

* <좋은나무> 글을 다른 매체에 게시하시려면 저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02-794-6200)으로 연락해 주세요.

* 게시하실 때는 다음과 같이 표기하셔야합니다.
(예시) 이 글은 기윤실 <좋은나무>의 기사를 허락을 받고 전재한 것입니다. https://cemk.org/26627/ (전재 글의 글의 주소 표시)

<좋은나무>글이 유익하셨나요?  

발간되는 글을 카카오톡으로 받아보시려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하여 ‘친구추가’를 해주시고

지인에게 ‘공유’하여 기윤실 <좋은나무>를 소개해주세요.

카카오톡으로 <좋은나무> 구독하기

 <좋은나무> 뉴스레터 구독하기

<좋은나무>에 문의·제안하기

문의나 제안, 글에 대한 피드백을 원하시면 아래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편집위원과 필자에게 전달됩니다.
_

 

 


관련 글들

2026.01.19

배임죄 폐지와 교회 재산 범죄 처벌 공백 우려(정재훈)

자세히 보기
2025.11.14

트럼프, 복음주의, 그리고 한국 교회(배덕만)

자세히 보기
2025.10.17

신앙이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담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손승호)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