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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의 강단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세 개의 계단을 거쳐야 했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성도는 그 공간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구조물은 마치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과도 같았다. 장애인에게는 강단이 오를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지성소의 휘장을 찢기 위하여 하나뿐인 아들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또 다른 장벽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본문 중)
김수원(목사, 태봉교회)
최근 배리어 프리(Barrier-Free)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하고 있다. 배리어 프리 운동이란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편안하게 건물이나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제거하자는 운동이다. 이는 단순한 편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적 정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와 관련된 문제다.
오늘날 교회도 동일한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 교회는 과연 장애인을 ‘환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배려하고 있다고 여기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필자가 섬기는 교회 역시 이러한 고민 속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예배당을 건축할 때 설계 단계부터 장애인의 동선을 고려하고, 주차장부터 예배당, 식당과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불편함이 없도록 보완해 왔다. 목회자로서 최소한 ‘교회에 들어오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입’에 대한 배려였을 뿐이다.

ⓒ 태봉교회
어느 날 한 언론의 배리어 프리 기획 기사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장애인이 예배에 ‘참관’하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도록 했지만, 정작 ‘참여’하는 데에는 구조적인 제한을 남겨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배실의 강단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세 개의 계단을 거쳐야 했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성도는 그 공간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구조물은 마치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과도 같았다. 장애인에게는 강단이 오를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지성소의 휘장을 찢기 위하여 하나뿐인 아들까지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오히려 또 다른 장벽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 문제를 인식한 후 당회에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장애인 주일을 앞두고 강단 접근 제약 문제를 해결하고 시설을 개선할 방안을 찾았다. 처음에는 승강기나 리프트 설치가 제안되었으나, 1,500만 원 이상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때 한 장로님의 제안으로 논의 방향이 전환되었다. 목공과 간단한 자재를 활용한 조립식 경사로를 설치하자는 의견이었다. 결과적으로 약 25만 원의 비용으로 강단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비용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단순한 시설 개선에 그치지 않았다. 한 성도가 휠체어를 이용하여 강단에 오르는 그 순간, 교회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격의 기운이 흘렀다.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 태봉교회
이번 경험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첫째, 장애인은 예배의 ‘참관자’가 아니라 ‘참여자’이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며, 공동체가 모여 구경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서는 자리이다. 교회는 그 누구도 주변인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 공동체이다.
둘째, 시설은 반드시 ‘장애인의 관점’에서 점검되어야 한다. 비장애인의 시선으로는 인식되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 진정한 배리어 프리는 설계자의 배려가 아니라, 당사자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셋째, ‘배려’라고 여기는 순간 차별이 시작될 수 있다. 선의를 베푼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는 이미 동등한 위치에서 밀려난다. 배려는 때로 ‘도와주는 자’와 ‘도움받는 자’라는 위계를 만들어 낸다. 교회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해 주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이다. 교회는 시혜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모두가 동일하게 서는 공동체이다.
넷째, 장애는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장애를 경험할 수 있다. 장애인은 공동체 가족의 일원이며, 이 가족을 위한 준비는 미래의 나 자신을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장애 문턱 낮추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현재의 필요 정도만으로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종종 미래의 소망이나 신학적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지금 이 자리에서 드러나야 하는 실재이다. 장애인이 차별 없이 예배하고,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공동체,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 일어난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다시 묻게 된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 남아 있는 문턱이 없는가. 그 문턱이 물리적인 것이든, 인식의 문제이든, 구조적인 장벽이든 간에, 그것을 허무는 일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가 먼저 그 문턱을 낮출 때, 우리의 예배당이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예배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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