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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2:2-4로 만들어진 찬양 “오라 우리가”의 영어 가사를 찾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원래, 이 노래에는 2절이 있었던 것이다. … 왜 성경 본문을 가사로 삼은 노래에서 절반이 사라졌을까? 왜 우리는 오랫동안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다음 내용을 묻지 않았을까? 특히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에서, 다음 부분의 말씀은 왜 빠져 있었을까? (본문 중)
김성한(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 동북아 대표)
나는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서울의 한 작은 메노나이트 교회에 출석했다. 교회 식구들 가운데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함께 부를 찬양을 고를 때면 영어 가사가 있는지를 확인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이사야 2:2-4로 만들어진 찬양 “오라 우리가”의 영어 가사를 찾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원래, 이 노래에는 2절이 있었던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불린 곡이지만 단 한 번도 불려 본 적 없는 2절. 이유는 단순했다. 그 2절이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노래는 한국에서 ‘1절만 있는 노래’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또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불렀던가!
더 놀라운 점은, 이 노래의 가사가 이사야서의 본문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성경 본문을 가사로 삼은 노래에서 절반이 사라졌을까? 왜 우리는 오랫동안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그다음 내용을 묻지 않았을까? 특히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에서, 다음 부분의 말씀은 왜 빠져 있었을까?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2:4)

기독교 반공주의라는 토양
이 노래의 절반이 사라진 배경에는 한국 교회 깊숙이 자리 잡은 기독교 반공주의와 분단의 트라우마가 있다. 해방 이후 분단과 한국 전쟁을 거치며, 반공주의는 단순한 정치적 입장을 넘어 한국 교회의 신앙적 감각으로 내면화되었다.
특히 북한에서 남하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남한 교회 안에서 강력한 반공 담론을 형성했다. 냉전이라는 세계적 흐름은 광범위한 것이었고 한국 교회 역시 그 영향을 받았지만, 한반도에서는 그것이 실제 전쟁과 분단이라는 현실과 결합되며 훨씬 강렬하게 작동했다. 한국 교회는 끝나지 않은 전쟁의 공간에서, 분단 트라우마라는 토양 위에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는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악으로 규정되었고, ‘반공–승공–멸공’으로 이어지는 언어가 신앙과 결합했다. 결과적으로 전쟁과 군사 훈련의 종식을 선포하는 이사야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평화의 비전이 교회의 중심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한국 교회는 민족을 복음화한다는 열망 속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해진 복음은 ‘순복음’(Full Gospel)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통치가 지향하는 샬롬, 곧 폭력의 종식과 평화의 확립이 충분히 포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온의 영광과 지워진 평화
이사야 2장 가사 중 4절을 삭제한 채 2절과 3절만 반복해서 읽거나 노래하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중심으로서 회복된 예루살렘, 그리고 영광에 둘러싸인 시온의 모습이다. 이러한 상상이 ‘기독교 시온주의’를 떠올리게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리한 해석일까?
실제로 한국 교회는 ‘제2의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이해를 발전시켜 왔다. 1960–80년대 민족 복음화 운동은 이러한 상상력을 대규모 집회를 통해 확산시켰다.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모인 전도 집회들은 단지 선교 전략을 넘어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민족, 정확히는 복음화된 민족 혹은 기독교 국가라는 집단적 신앙 서사를 형성하는 장이었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은 “선택된 민족”, “세계 복음화의 중심”, “공산주의를 극복할 사명을 지닌 나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는 냉전의 국제 질서와 맞물리며 더욱 강화되었고, 정치적 반공주의와 신학적 정체성이 긴밀히 결합되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오래전에 일어난 과거의 이야기일 뿐일까? 미국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찰리 커크는 2025년 9월 5일과 6일, 서울 근교에서 열린 ‘빌드업코리아’(Build Up Korea) 컨퍼런스에 등장했다. 한국의 보수 개신교 집회에 등장했던 그의 모습은 단순한 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보여 준다. 미국 복음주의의 정치 신학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한국의 복음주의와 계속해서 공명하며, 서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시간은 많이 흘렀고, 새로운 워십 밴드들이 “오라 우리가”를 리메이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 노래를 끝까지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1절만 부르고 있다.
자기의 정원을 가꾸는 평화
이사야의 평화 비전은 미가서에서도 반복된다. 그러나 미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평화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그린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미가 4:4)
이 구절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각자가 자기 몫을 누리며 살아가는, 일상의 평화를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어디에서 왔을까?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가 심고, 돌보고,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여기서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악뮤의 “우아한 아침 식사”이다. 이 노래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곧 “저마다의 정원을 가꾸자”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저항이다. 소음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고요함을 선택하고, 파괴의 논리 속에서 돌봄을 실천하는 삶,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를 위해 번역된 미가의 평화일 것이다.
우리는 전쟁과 폭력의 현실 앞에서 쉽게 무력감을 느낀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에서 삶을 가꾸는 일은 가능하다. 매일의 식탁을 감사로 받는 일, 관계를 돌보는 일, 평화를 선택하는 일은 지금도 할 수 있다. 평화는 거대한 선언만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저마다의 정원에서 시작된다. 누군가 씨를 뿌리고, 그것을 돌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자라난다.
우아한 아침 식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평화는 조금씩 현실이 된다. 그렇게 ‘모두를 위한 식탁’을 향한 꿈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오라 우리가” 찬양의 마지막 절을 부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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