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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방의 환희는 짧았고, 1948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오늘날까지 그 태극기가 보존되어 전해졌다면 한국 교회사 최고의 국보급 유물이 되었겠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길선주가 언제나 머리 위의 태극기를 마음에 품고 복음을 전했듯이, 오늘의 우리 역시 예배당 지붕 아래 그 태극기를 품은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고,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회복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할 때이다. (본문 중)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학 교수)
1945년 8월 19일, 해방 후 첫 주일 평양 장대현교회 강단에 선 김화식(金化湜) 목사의 손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김화식 목사는 말했다.
“이 태극기는 일한 합방하던 경술[1910년] 8월 29일에 우리 장대재 예배당 강대 위 천장 밑에 숨겨두었던 것입니다.” 감격의 눈물, 환호하는 함성, 흥분의 박수는 예배당이 떠나가는 듯하였다.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 장대재교회는 평양에서도 최고 최대의 교회요, 과거 반세기 동안 전국 교회를 영도하던 본산이었다. 일제 36년 그 무서운 침략 정책 밑에서도 그 꼭대기에 태극기를 비장(秘藏)하고 있었다.1)

김성여, “길선주 목사”, 「新天地」 제9권 10호(1954년 10월): 162쪽.
태극기를 품고 강단에 선 길선주
그 태극기를 숨긴 이는 길선주 목사였다. 국망의 비통함 속에 눈물을 흘리며 태극기를 접어 강단 천장에 숨길 때, 그의 마음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1911년,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교사가 된 촉망받던 장남 길진형이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신민회 회원임이 드러나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폐가 상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길선주는 그 태극기 밑에서 설교했다. 1917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떠났던 아들이 병세가 악화해 귀국한 지 이틀 만에 숨을 거두었을 때도 그는 태극기 밑을 지켰다. 매주일 강단에 선 그의 입에서는 불같은 설교가 쏟아져 나왔다. 그 누구도 비밀을 알지 못했으나, 길선주는 머릿속에 태극기를 품은 채 설교를 이어갔다.
길선주와 3·1운동
1919년 3·1운동 직전, 길선주는 평양 광혜녀원(廣惠女院)에 위장 입원 중이던 이승훈을 만나 독립선언에 쓸 인장을 건넸다. 맏아들을 민족의 제단에 바쳤으니, 이제는 자신이 헌신할 차례였다.
황해도 사경회를 인도하기 위해(이때 김성여 목사가 동행했다) 사리원과 해주를 거쳐 장연읍교회에 머물던 길선주는 장대현교회 박인관 조사를 통해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을 발표한다”라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당일 밤 말을 타고 장연을 출발해 이튿날 기차에 올랐으나 연착으로 해 질 무렵에야 서울에 도착했다. 민족 대표들이 이미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인력거를 타고 총독부 경무총감부로 향했다. 그는 명함을 건네며 서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자수했고, 곧바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년 7개월간 미결수로 복역하며 요한계시록을 깊이 묵상했다. 재판 과정에서 시위 조직과 실행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점이 인정되어 길선주는 1920년 11월 민족 대표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세상의 시선은 싸늘했다. 사람들은 다른 대표들이 모두 옥고를 치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변절 없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는지 의구심을 품었다. 평양역에 마중 나온 장대현교회 교인들조차 그를 ‘독립운동 대열에서 홀로 빠져나온 노인’으로 차갑게 바라보았다. 당시 53세였던 길선주는 옥고를 치른 탓에, 눈에 띄게 쇠약해져 있었다.
1920년대 종말론과 교회 내분
1920년대에 접어들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년층 사이에서 반기독교 감정이 거세졌다. 길선주가 강단에서 말세론을 전파하며 전국 부흥회 인도에 집중하고 본교회 목회에 소홀해지자, 일각에서는 “저 늙은이가 왜 죽지도 않고 살아서 저러는가”라며 배척 운동을 일으켰다(1925년 3월). 청년층과 장·노년층 사이의 갈등은 격화되었고, 1927년 3월에는 강단에서 물리적 충돌까지 빚어졌다. 결국 평양노회의 중재로 동사목사 변인서는 시골 교회로 전임되었고, 길선주는 1928년 1월 성역 25주년 기념식을 치른 뒤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이어 길선주를 따르는 교인 500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를 개척·분립하고 반대파 청년들이 장대현교회를 떠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1920년대 말 신채호의 『용과 용의 대격전』이 대변하는 반기독교적 무정부주의 종말론, 일제 군국주의가 내세운 만주국 건설의 제국주의 종말론, 러시아 사회주의의 공산주의 종말론이 청년들의 사상을 뒤흔들 때, 길선주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참된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했다.
길선주는 1910년 8월부터 1919년 2월까지,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15년 넘게 천장에 숨겨둔 태극기 아래서 복음을 전했다.
길선주 배척 운동을 주도한 변인서 일파는 과거 3·1운동 참여 제안을 거절하고, 평양 교인들이 만세를 외칠 때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던 인물들이었다. 길선주는 눈물과 기도가 서린 강단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끝내 교회를 분립해 물러나야 했다. 이후 반대파는 “길선주가 3·1운동에 소극적이었고 일제에 협조해 무죄로 풀려났다”라는 음해를 지속하며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 결과 길선주는 오랫동안 민족 대표로서의 독립운동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년 7개월간의 옥고 사실이 명확히 입증된 2009년 광복절에 이르러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길선주의 말세론에 숨은 민족주의
1930년, 『아빙돈 단권성경주석』이 출간되자 길선주는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을 말세의 징조로 보았다. 이어 1931년 만보산 사건2)의 여파로 평양에서 다수의 중국인이 살해되고 상점이 불타는 유혈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이를 인간성이 파괴된 명백한 말세의 징후로 여겼다. 일제의 괴뢰 만주국 수립, 무신론의 팽배, 교회의 영적 타락을 목도한 길선주는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이 배교의 시대에 영적으로 깨어 공중에서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그와 함께 다스릴 지상 천년왕국을 바라보았다.
길선주는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이 장차 적그리스도의 도성 바빌론으로 전락할 것이라 경고했다.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 고창교회에서 새벽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쓰러진 그는 필담으로 “不入平壤”(불입평양)이라는 네 글자를 남기고 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는 자신이 살아서 평양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뜻이자, 멸망할 도성 평양에 들어가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로 해석되었다.
어느 쪽이든 길선주는 평양을 비롯해 한반도와 만주 일대가 전쟁과 참혹한 고통, 배교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임을 내다보았다. 그 대신 그는 새로운 시공간이 열리는 평화의 천년왕국과 그 너머의 영원무궁한 세계를 소망했다. 이러한 그의 묵시적 비전은 일제가 선전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국주의적 시공간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일왕이 지배하는 제국은 종말에 심판받을 바빌론에 지나지 않았다.3)
장대현교회 강단 천장에 비장되었던 태극기는 일제 강점 36년의 고난을 견뎌내고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다. 길선주가 숨겨둔 그 태극기는 평양 개신교의 신앙적 절개와 민족의식의 결정체였다. 1945년 8월, 해방의 환희 속에서 천장을 열고 그 태극기를 펼쳤을 때, 김화식 목사와 성도들이 느꼈을 감격과 감사는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의 환희는 짧았고, 1948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오늘날까지 그 태극기가 보존되어 전해졌다면 한국 교회사 최고의 국보급 유물이 되었겠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길선주가 언제나 머리 위의 태극기를 마음에 품고 복음을 전했듯이, 오늘의 우리 역시 예배당 지붕 아래 그 태극기를 품은 심정으로 예배에 임하고,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회복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기도할 때이다.
1) 김성여, “길선주 목사”, 「新天地」 제9권 10호(1954년 10월): 162쪽.
2) 1931년 만주 만보산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일어난 충돌 사건. 사건에 대한 과장·오보로 조선 내 반중 감정이 격화되어 평양 등지에서 중국인에 대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편집자 주).
3) 옥성득, “공간의 확장과 이동, 시간의 예언과 성취”, 「좋은나무」, 2021.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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