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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정의를 말한다는 것은 이 불균형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누가 더 많이 배출했고, 누가 더 큰 이익을 누렸으며, 그 결과로 생긴 위험과 비용은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네팔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위기의 청구서를 생명과 터전으로 치르고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말만 하기에는 너무 미안하다. 애도는 그들의 눈물 곁에 머무는 일이면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책임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어야 한다. (본문 중)

 

유미호(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센터장)

 

네팔 홍수 영상을 보다가 나는 몇 번이나 화면을 멈췄다. 흙탕물이 계곡을 덮치며 집과 다리, 공사 현장까지 삼키는 장면을 오래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밥을 짓고 아이를 재우며 내일을 이야기했을 집이,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떠밀려가는 지붕과 차량을 보며 그 안에 있었을 사람들, 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가족을 기다릴 이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뉴스는 사망자와 실종자 숫자를 먼저 전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은 숫자 하나에 담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부모였고 자녀였고, 함께 일하던 이웃이었을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은 전화 한 통, 구조 소식 하나를 기다리며 밤을 새울 테고, 살아남은 이들도 무너진 집터 앞에서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그 슬픔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희생자들의 평안을 빌고, 실종된 이들이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의 손길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누가 위기를 만들고, 누가 대가를 치르는가

 

지난 8월 26일 네팔 히말라야에서 발생한 홍수의 직접 원인은 더 면밀한 조사와 확인이 필요하다. 현재까지는 거대한 빙하와 암석이 계곡 아래로 무너져 강을 막았고, 그 뒤 불어난 물이 한꺼번에 쏟아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만 빙하·암석의 붕괴와 천연 댐의 형성·붕괴가 어떤 과정으로 이어졌는지는 아직 섣불리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재난을 기후 위기와 무관한 우연한 사고로만 보기도 어렵다. 기온 상승으로 히말라야의 눈과 얼음은 빠르게 줄고 있다. 오랫동안 얼어 있던 땅과 바위가 느슨해지고, 빙하가 물러난 자리에는 불안정한 호수가 늘어난다. 작은 충격이 대규모 붕괴로 번질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재난을 일으킨 마지막 방아쇠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일과 함께, 그 방아쇠가 쉽게 당겨지도록 만든 조건이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만들어 왔는지도 물어야 한다.

 

그 질문 앞에서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세계 탄소 프로젝트 자료에 따르면 네팔의 2024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배출량의 약 0.05%이고, 산업화 이후 누적 배출량은 약 0.01%에 지나지 않는다. 지구를 뜨겁게 만든 책임이 극히 적은 나라가 가장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번 재난의 복구 비용은 네팔 국내 총생산(GDP)의 약 10%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나온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집과 농지와 일터를 다시 세워야 하지만, 그 부담을 감당할 자원은 충분하지 않다.

 

기후 정의를 말한다는 것은 이 불균형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누가 더 많이 배출했고, 누가 더 큰 이익을 누렸으며, 그 결과로 생긴 위험과 비용은 누구에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네팔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만들지 않은 위기의 청구서를 생명과 터전으로 치르고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는 말만 하기에는 너무 미안하다. 애도는 그들의 눈물 곁에 머무는 일이면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책임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어야 한다.

 

 

먼 나라의 재난이 아니다

 

한국도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의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은 네팔보다 훨씬 높고, 산업화 이후 누적 배출량 역시 세계 상위권에 속한다. 우리가 누려 온 성장과 편리함이 지구 곳곳의 기후 위기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이번 홍수로 한국 기업이 참여한 수력 발전소 건설 현장도 큰 피해를 보았다. 재난의 구체적 원인과 사업의 책임 관계는 충분한 조사와 확인이 필요하다. 다만 기후가 빠르게 달라지는 상황에서 과거의 기상·수문 자료와 기존 안전 기준만으로 대규모 시설의 위험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 개발 이익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현지 주민과 노동자에게 어떻게 나뉘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

 

정부는 실종자 수색과 구조에 힘을 보태고,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해 온 나라로서 네팔의 재난 수습과 피해 복구, 주민들의 삶 회복을 위한 책임 있는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 기업과 금융 기관도 이번 일을 계기로 사업의 계획과 운영 전반에 달라진 기후 위험을 더 꼼꼼히 반영하고, 현지 주민과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이다.

 

네팔을 향한 우리의 책임을 돌아보는 일은 결국 우리 사회의 안전을 점검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후 재난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우리는 폭우로 반지하 주택에 살던 이웃들을 잃었고, 지하 차도에 갇힌 시민들을 지켜봐야 했다. 짧은 시간에 쏟아지는 비는 산비탈과 도로를 무너뜨리고, 길어진 폭염은 야외 노동자와 홀몸 어르신, 쪽방 주민의 생명을 위협한다. 메마른 산에 강풍이 불면 산불이 일어나 마을과 그곳에 쌓인 삶의 기억을 한꺼번에 삼킨다. 재난이 지나간 뒤 남겨진 신발과 가재도구, 검게 탄 집터 앞에서 망연히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네팔의 무너진 계곡 앞에 선 이들과 다르지 않다.

 

같은 비와 더위도 모두에게 같은 재난이 되지는 않는다. 안전한 집이 있는지, 위험을 미리 알 수 있는지, 제때 이동하고 대피할 수 있는지, 냉방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피해의 깊이는 달라진다. 재난은 자연 현상에서 시작되기도 하지만, 누구를 먼저 쓰러뜨리고 누가 더 오래 고통받는지는 사회의 불평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네팔과 한국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장 적게 가진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아파한다는 기후 부정의의 모습은 닮아 있다.

 

그래서 기후 정의는 온실가스를 누가 얼마나 줄일 것인가만을 묻지 않는다. 이미 닥쳐오는 재난 속에서 특히 위험에 놓인 이들의 생명을 어떻게 지키고, 모든 사람에게 피할 기회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도 함께 묻는다. 2025년 스위스 알프스의 블라텐 마을은 빙하와 암석 붕괴로 매몰되었지만, 붕괴 징후를 관측한 당국이 주민 대부분을 미리 대피시켜 인명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든 재난을 막을 수는 없더라도, 위험을 미리 살피고 알리며 제때 대피하도록 하는 체계는 갖출 수 있다. 그런데 그 체계에 접근할 기회마저 나라와 지역, 주거와 소득에 따라 달라진다면 안전 또한 불평등하게 배분되는 셈이다. 온실가스를 줄이는 노력과 함께, 기후 약자를 가장 먼저 보호하는 예방·대피·돌봄 체계를 갖추는 일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기후 정의의 과제다.

 

먼저 울고, 함께 바꾸는 교회

 

이런 현실 앞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함께 울어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는 말씀처럼, 재난을 겪는 이들의 고통을 서둘러 교훈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그 슬픔 곁에 머물러야 한다. 구호금을 모아 보내고 복구를 돕고,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해야 한다. 살아남은 이들이 오래도록 겪게 될 상실과 두려움도 살펴야 한다. 아픔은 뉴스가 끝났다고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운다’는 일이 눈물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계속 울게 만드는 현실을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교회는 교회 건물의 에너지 사용과 소비를 줄이는 일과 함께, 화석 연료 의존과 끝없는 전력 수요를 당연시하는 정책에 질문해야 한다. 전환의 비용과 재난의 위험을 가난한 나라와 지역, 노동자와 농민,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는 결정 앞에서 침묵해서도 안 된다. 창조 세계를 돌본다는 고백은 개인의 선의에만 기대는 실천을 넘어, 공동의 삶과 제도를 바꾸는 공적 책임으로 이어져야 한다. 애도에는 회개가 따르고, 회개는 결국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청소년의 외침 앞에서

 

얼마 전, 청소년들이 직접 쓴 선언문 “지구를 숨 쉬게 할 우리의 발걸음”을 국회에 전했다. 약 1,100명의 청소년이 그 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국가 온실가스 감축 경로를 정하는 과정에서, 왜 어른들이 부담을 뒤로 미루는 낮은 기준을 택하려 하느냐고 묻는다. 아이들에게는 늘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를 지키는 일에는 최소한만 하려는 건 아닌지 되묻는다.

 

선언문을 읽는 내내 어른인 나는 부끄럽고 미안했다. 우리는 청소년을 ‘미래의 주인공’이라고 부르지만, 그 미래를 위태롭게 만든 우리가 오늘의 책임을 제대로 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거리와 법정, 국회 앞에서 자신의 생존권을 호소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너희가 희망’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내려놓을지부터 답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외침을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의 부탁으로만 듣지 말고, 교회와 사회를 깨우는 예언자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도에 발을 달아 주는 날

 

오는 9월 19일, 서울에서 기후 정의 행진이 열린다. 올해 행진은 반도체, 인공 지능, 데이터 센터와 관련된 대규모 개발이 요구하는 막대한 전기와 물, 토지의 문제를 정면으로 묻는다. ‘첨단 산업’이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해서 성장이 저절로 깨끗해지거나 정의로워지지는 않는다. 그 전기는 어디서 만들고, 그 과정에서 필요한 물과 땅은 누구의 삶터에서 가져오며, 이익과 위험은 또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재생 에너지를 늘리는 일만큼이나, 에너지 수요 자체를 줄이고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농민·지역 주민의 삶이 희생되지 않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행진에 앞서 오후 1시 30분, 덕수궁 돌담길 서울 시청 별관 앞에서 “들어라! 땅의 탄식을, 행하라! 하나님의 정의를”이라는 주제로 기후 정의 연합 예배를 드린다. 예배는 세상의 고통을 잠깐 기억했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행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아파하는 생명을 바라보고, 그 아픔을 품은 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는 자리다. 네팔의 무너진 마을과 우리 곁의 재난 희생자들, “미래를 지켜 달라”고 외치는 청소년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우리는 이제 그 기도에 발을 달아 주어야 한다.

 

9월 19일, 함께 예배하고 함께 걷자. 한 번의 행진이 세상을 단숨에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걸음은 교회가 어느 편에 서려 하는지 분명히 보여 줄 수 있다. 더 많은 성장과 편리함의 편이 아니라, 흙탕물 앞에서 가족을 기다리는 이들, 무너진 집터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이들, 아직 오지 않은 세대와 말없이 신음하는 땅의 편에 서자.

 

히말라야의 눈물이 더는 외로운 눈물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상처 입은 이들에게 위로와 도움이 닿고,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기를 바란다. 우리의 애도가 잠깐의 슬픔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의 선택과 교회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그 마음으로, 아파하는 생명 곁을 향해 함께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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