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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주식 투자에 참여하면서 우리 안의 찜찜함을 성급히 없애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감정은 투자를 포기하라는 명령은 아니지만, 내가 무엇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더 정직하게 살펴보라는 요청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 편히 투자할 수 있도록 신앙적 허가를 얻는 일이 아니라, 돈과 투자까지도 이웃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라는 가치 아래 두는 일이다. (본문 중)

 

노종문(좋은나무 편집주간)

 

주식 투자가 일상적인 재테크 수단이 되었다. 이제 주식 계좌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특별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주식 투자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는 여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찜찜함’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주식으로 얻는 수익이 어디에서 오는지, 내가 정확히 무엇에 참여하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찜찜함은 단순히 금융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감정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행위가 인식을 앞질러 갈 때 양심이 보내는 신호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주식 투자를 생각할 때는 “어떻게 투자해야 하는가”보다 먼저 “주식 투자란 무엇인가”, “나는 이 투자를 통해 어떤 경제 질서에 참여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구별

 

먼저 주식 투자의 배경이 되는 경제 체제 자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현실이라는 말과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같지 않다. 또한 흔히 생각하듯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박해한 악이므로 그 반대말(?)인 자본주의는 신앙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시장 경제는 시장에서의 가격과 수요·공급을 통해 재화와 자원을 교환하고 배분하는 방식이며 제도다(이에 대응하는 말은 계획 경제일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강한 사유 재산권과 이윤 동기, 임금 노동과 자본 축적을 기초로 경제를 움직이는 이념이다(이에 대응하는 말은 공산주의일 것이다). 시장 경제는 효과적인 교환의 제도로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때 국가 경제가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지만, 시장과 결합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언제나 공동선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이념은 ‘사유 재산의 인정’이라는 요소를 성경과 공유하지만, 다른 많은 중요한 부분에서 긴장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전제 위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성경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합리적인 목표로 여기지만, 예수님은 곳간을 더 크게 지어 재산을 쌓아 두려 했던 부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셨다. 자본주의는 사적 소유권을 매우 강하게 보장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일깨운다.

 

물론 성경이 시장이나 사유 재산, 이윤 추구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이 절대적인 가치로 당연시될 수 없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법과 제도, 시민의 덕성, 사회적 책임에 의해 규율되지 않으면, 빈부 격차를 확대하고 노동과 자연을 상품화하며 인간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우리 사회에서 변화시킬 수 없는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살고 있지만(실패한 공산주의 계획 경제 체제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가!), 공정한 규칙, 책임 있는 기업 경영, 노동과 환경의 보호, 취약한 이들을 위한 안전망은 우리 제도의 파행과 우상화를 막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들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도록 만들려는 노력이다.

 

주식을 산다는 것의 의미

 

이제 주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주식은 한 기업에 대한 소유 지분을 나타낸다. 따라서 주식을 산다는 것은 기업이 만들어 내는 상품과 서비스, 고용과 기술, 이익과 위험에 일정 부분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식 제도는 원론적으로 기업의 가치 창출에 자본을 제공하고, 그 결실과 위험을 투자자가 함께 나누도록 하는 제도다.

 

다만 개인 투자자들이 주로 거래하는 곳은 기업이 처음 주식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1차 시장이 아니라, 이미 발행된 주식이 투자자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2차 시장이다. 2차 시장 참여도 주식의 유동성을 높이고, 기업의 가치를 실시간으로 평가하며, 기업이 장차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일부의 시각처럼 2차 시장의 모든 거래를 단순한 제로섬 게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투자의 관심이 기업의 장기적인 가치보다 단기적인 가격 변동에만 집중될 때 생긴다. 어떤 기업이 무엇을 생산하고, 노동자를 어떻게 대하며, 환경과 지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주가가 오를 것인가 내릴 것인가만 묻게 된다면, 투자는 기업의 가치 창출에 참여하는 행위라기보다 가격 차이를 이용해 수익을 얻는 행위에 그치게 된다. 기업의 장기적 가치보다 가격 변동 자체에 집중할수록, 주식 매매는 시장 초과 수익을 놓고 벌이는 제로섬 게임에 가까워진다. 제로섬 게임이란, 누군가 이익을 얻으면 누군가는 손해를 입는다는 의미다. 제로섬 게임 자체로는 선악을 단정할 수 없지만, 여기에 정보 우위나 미공개 정보의 불공정한 이용, 시세 조종 같은 행위가 더해지면 그것은 명백한 악이 된다. 그리고 대만의 한 연구에 따르면, 단타 매매자 대부분이 손실을 보고 있으며 단타 매매로 지속적으로 수익을 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3%도 되지 않았다.1) 또한, 단타 매매로 운 좋게 수익을 낸다 해도, 그 수익은 기업의 생산적 활동에 자본을 공급하고 그 결실을 나눈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주식 투자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한다면, 주식을 살 때 “이 종목이 오를까?”만 물어서는 안 된다. “이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버는가?”, “그 과정에서 누구에게 유익을 주고 누구에게 비용을 떠넘기는가?”, “노동자와 소비자, 지역 사회와 자연을 어떻게 대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내가 사는 것은 화면 속 숫자가 아니라 한 기업이 만들어 가는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기 투자, 분산 투자, 과도한 차입을 피하는 투자는 단순한 위험 관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업의 실제 가치와 무관한 단기 변동에 몰두하지 않는 것이고, 자본을 비교적 생산적인 활동과 연결하려는 노력이다. 투자 대상에서 명백히 해로운 기업을 제외하고, 주주로서 의결권을 행사하거나 기업의 책임 있는 경영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자본 시장에 참여하는 중요한 방식이 될 수 있다.

 

돈은 중립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은 경제생활에 대해 의외로 구체적으로 말한다. 구약성경의 안식년과 희년법은 빚과 토지의 소유권이 한 세대를 넘어 대대로 고착되는 것을 막았다(신 15:1-2; 레 25:10, 23-28). 동족에게 이자를 아예 금지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의 곤궁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했다(출 22:25; 레 25:35-37; 신 23:19-20). 밭의 곡식을 모두 거두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이주민을 위해 남겨 두라는 명령(레 19:9-10; 신 24:19-22), 정직한 저울을 사용하라는 명령(레 19:35-36), 품꾼의 삯을 해가 지기 전에 지급하라는 명령(신 24:14-15)은 경제 질서가 약자의 생존과 존엄을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보여 준다.

 

이러한 명령의 바탕에는 물론 개인의 사유 재산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믿음이 있다. 땅과 재산은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개인에게 잠정적으로 맡겨 두신 것이다(레 25:23; 대상 29:11-14; 고전 4:7).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의 소유에는 언제나 이웃에 대한 책임이 따라온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 눅 16:13)고 말씀하셨다. 돈이 단지 선하거나 악하게 사용할 수 있는 중립적인 도구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이 그것을 하나님과 경쟁하는 주인으로 묘사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돈은 은근히 우리에게 안전과 자유, 성공과 인정을 약속하며 충성을 요구한다. 특히 오늘날처럼 금융 소득이 노동 소득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쉬운 오늘날에는, 재물을 향한 사람들의 신뢰는 더욱 강력해진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마 25:14-30)에는 투자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이 비유의 초점은 투자 기술이나 수익률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두려움 속에 묻어 두지 않고 신실하고 과감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제자도에 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맡기신 돈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이 아니며,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능동적으로 활용할 책임이 있음을 보여 준다. 비유의 경제적 배경만 놓고 보면, 오늘날의 진정한 기업가 정신, 진정한 의미의 투자와도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라고 하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눅 12:33; 마 19:21),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꾸어 주고(눅 6:34-35), 되갚을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대접하는 일에(눅 14:13-14) 돈을 사용하고, 때로는 큰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 작은 빚을 탕감해 주라고 말씀하신다(마 18:21-35; 참고. 신 15:1-2). 성경적 경제관에서 돈의 최종 목적은 자산 증식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관계를 회복하며,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돕는 것이다.

 

수익률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식 시장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직접 투자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연금이나 펀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의식적으로 투자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투자하지 않는 선택 역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주식 투자를 하든 하지 않든, 누구도 경제 질서와 완전히 무관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소비자이자 노동자이고, 예금자이자 연금 가입자이며, 동시에 제도와 정책을 결정하는 시민이다. 투자하지 않는 사람도 소비 선택과 시민 행동을 통해 기업과 자본 시장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주식 투자를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벌 수 있는가?”가 아니다. “내 돈은 주식 시장에서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가?”, “나는 어떤 사업을 얼마나 윤리적으로 하는 기업에 투자하는가?”, “나의 투자 행위는 궁극적으로 더 정의로운 경제 질서에 기여하는가?”, “나의 수익 뒤에서 누군가가 부당한 비용을 치르고 있지는 않은가?”, “얻은 이익을 누구와 나눌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투자는 그 자체로 신앙적이지도, 비신앙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투자자를 움직이는 욕망과 투자자로 참여하게 되는 기업의 사업, 주식 투자가 이루어지는 생태계인 금융 시스템, 그리고 투자를 통해 얻은 수익을 사용하는 방식은 결코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 주식 투자가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청지기적 자본 운용이 될 수도 있지만, 더 많은 돈을 향한 욕망을 정당화하는 맘몬 숭배가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식 투자에 참여하면서 우리 안의 찜찜함을 성급히 없애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감정은 투자를 포기하라는 명령은 아니지만, 내가 무엇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더 정직하게 살펴보라는 요청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 편히 투자할 수 있도록 신앙적 허가를 얻는 일이 아니라, 돈과 투자까지도 이웃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라는 가치 아래 두는 일이다.


1) Brad M. Barber, Yi-Tsung Lee, Yu-Jane Liu, Terrance Odean, and Ke Zhang, “Learning, Fast or Slow,” The Review of Asset Pricing Studies 10, no. 1 (2020): 6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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